34. 갑작스런 기자회견2021.04.29.
알렉산드로스가 기자회견을 연다는 소식에 처음 떠오른 것은 이혼을 발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관례가 있지. 황족의 혼인이나 이혼은 기자회견 따위가 아니라 대연회에서 발표하는 것이 황궁의 법도라고. 또 알렉산드로스가 아무리 열 받았다고 해도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혼 발표를 할 것 같진 않고…….’
희망이 사라지자 김이 샜다.
‘그럼 알렉산드로스가 발표하려는 건 대체 뭘까?’
그것을 알아야 나도 그가 하려는 행동에 제대로 대응을 할 터인데……. 지금으로선 아무런 정보도, 방법도 없었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가서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채비를 하고 기자회견이 예정된 장소로 갔다. 기자회견이 열리는 곳은 본궁의 로비였는데, 그곳에는 어림잡아도 백 명은 넘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황제 폐하! 회견 이전에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황제 폐하! 기분이 어떠십니까?”
“황제 폐하! 혹시 이혼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 세례는 무시한 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비서관과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비서관과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던 알렉산드로스는 씩 웃었다. 그러고는 평소와 같은 평온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았다.
“어허, 정숙하시오, 정숙. 아직 회견은 시작되지 않았고 이곳은 제국에서 제일 고귀하신 분의 앞이오.”
비서관이 엄하게 호령했으나 기자들이 조용해지는 것은 잠깐뿐, 곧 다시 시끌벅적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5대 일간지에 해당 사실을 보도하지 말라는 압박을 주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혼 후의 계획은 어찌 되십니까? 황비 전하를 황후로 임명하실 거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어허, 조용히 하시오! 그리고 무엄한 질문을 한 기자는 누굽니까? 자중하시오!”
보통 사람이라면 멘탈이 흔들렸을 질문 세례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잘생기고 신뢰감이 가는 얼굴로 미소 지으며 앞에 놓인 자료를 뒤적일 뿐이었다.
‘어우, 독한 인간 같으니.’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기자들의 질문을 보아하니 어쩐지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이혼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나로선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여유로운 얼굴에서 불길한 신호를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라만차의 거리에 간 것도 사실이고, 거기서 돈을 쓴 것도 사실인데……. 알렉산드로스가 여론을 어찌할 방도가 있겠어? 모든 기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언론 탄압을 하지 않는 이상.’
물론 알렉산드로스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라고 해도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권력은 클수록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정해진 법도 어기고 민중들을 괴롭혔다가 혁명이 일어난 사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왕과 귀족들이 전쟁 한 번 할 때마다 명분으로 고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치에 관한 머리는 징그럽도록 잘 돌아가니까 말이지. 나도 아는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이제 슬슬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호명관에게 눈으로 신호를 주곤, 로비를 향해 걸어 나갔다.
“황후 폐하 납십니다!”
논란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기자들은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황후 폐하! 한 말씀만 해주십…….”
“황후 폐하! 기다리고 있었…… 어?”
“아니, 이럴 수가…….”
곧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기자들이 잠잠해졌다. 물론 그건 내가 의도한 것이었다. 기자회견에서는 단정한 무채색, 혹은 어두운색의 옷을 입는 것이 황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법도였다. 그 예시로 지금 알렉산드로스 또한 단정한 검은색 정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규율을 지킬 리가 없잖아?’
나는 피식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나는 기자들에게 만만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최대한 빠르게 회견을 끝낸 뒤, 내 여론을 악화시키고, 알렉산드로스와 이혼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최대한 TPO에 맞지 않는 옷, 즉 아주 요란하고 가슴과 등이 깊게 팬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코트를 걸쳤다. 물론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석을 잔뜩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아주 단단히 미친 여자로 보이겠지?’
내 예상대로 기자들은 입을 떡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빠, 빨리 스케치해. 빨리!”
“예!”
폭발적으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가들이 내 모습을 스케치하는 듯 목탄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아, 들린다. 내 여론 나빠지는 소리가!’
나는 부채 뒤에서 그 분위기를 마음껏 만끽했다.
‘게다가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고 있잖아. 내가 말이 통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인 거지. 완벽해!’
나는 최대한 도도한 포즈로 걸어가 준비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공교롭게도 알렉산드로스와 딱 붙어 있는 옆자리였다.
“화, 황후 폐하…… 어찌 이런 자리에서 그런 옷을…… 으, 으허어억……. 아이고, 혈압이!”
알렉산드로스의 비서관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려 하자 궁인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그를 끌고 갔다. 아마 궁의의 도움을 받으러 간 것이겠지. 하지만 늘 있는 일인지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쪽을 쓱 보더니, 살짝 인상을 썼다. 그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그렇게 파인 드레스는 입지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그대는 내 말을 듣지 않겠지?”
“어머, 당연하죠? 제가 왜 폐하의 말씀을 듣겠어요.”
알렉산드로스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깊게 파인 드레스를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해야겠군.”
나는 그것이 당연히 농담일 거로 생각하고 넘겼다.
“그보다 말씀해보시죠. 대체 어떤 것을 발표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대와 나의 목적이 정반대이니 그대에게 그것을 알려줄 수는 없지. 내용을 알게 된다면 즉시 그대는 그 대처법을 궁리할 것이 아닌가.”
‘이래서 눈치 빠른 남주인공은 싫다니까.’
내가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그때였다. 신문에서 얼굴을 본 적 있는 대신이 기자회견의 시작을 알렸다. 알렉산드로스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황후가 라만차의 거리에 갔다는 사실에 공분하여 이 자리에 모인 것을 알고 있다. 수도의 귀족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황후가 자리에 맞지 않는 비행행위를 하였으며 황실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
“하지만, 오늘 짐이 발표할 사실은 그와 반대되는 내용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람? 내가 기겁하여 그의 말에 반박하려던 찰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재빠르게 먼저 말을 이었다.
“황후가 라만차의 거리에 갔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아.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 대체 어떤 것이 반대되는 내용이라는 겁니까?”
겁 없는 기자의 질문에 알렉산드로스는 나른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는…… 라만차의 거리에 갔으나, 자신의 의지로 간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나의 부탁으로 인해 라만차의 거리에 간 것이다.”
“뭐라고?”
“이럴 수가!”
알렉산드로스의 충격적인 발언에 기자들이 필기하는 소리가 로비를 가득 채웠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거짓말이에요! 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라만차의 거리에 갔다고요. 오로지 개인 물품을 사기 위해서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더 빨랐다.
“모두 주목하도록.”
그의 말과 함께 로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기자들의 정면, 아무것도 없는 벽에 밝은 빛이 비췄다. 그것은 환영 마도구로 만들어낸 영상이었다. 기자들은 모두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 역시 이곳에 온 뒤로 이런 물건은 처음 보았으니까. 알렉산드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상이 번쩍이고 있는 흰 벽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쯤에서 발표하지. 수도의 유일한 그레이마켓, 라만차의 거리는 나, 알렉산드로스 그란디아 크샤야르샤 르 카스티야의 소유다. 지금 그대들이 보고 있는 것은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빙자료들이다.”
“아니, 이럴 수가!”
“그레이마켓이 황제 폐하의 소유라고?”
“특종이다, 특종!”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거 기밀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당당히 밝혀도 되는 거야?!’
“진실은 이렇다. 나는 라만차의 거리에서 특정한 조사를 할 사람이 필요했고, 마침 그 일이 가능한 사람이 황후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후는 나를 위해 직접 가서 필요한 조사를 한 것이다.”
“어떤 조사였습니까?”
“그것은 기밀이다. 아주 중대하며,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조사였다고만 해두지.”
“라만차의 거리는 언제부터 폐하의 소유였습니까?”
“즉위하고 석 달 뒤이다. 여기 그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가 있다.”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셔도 되는 겁니까? 그레이마켓의 특성상 황가의 소유인 것을 껄끄러워할 이들이 많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그레이마켓이 형성될지도 모르는데요.”
“그렇기에 이제껏 숨겨왔던 것이지. 하지만 이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 소중한 황후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제국의 어머니인 황후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에!”
“특종이다, 특종!”
기사들이 미친 듯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뒷목이라도 잡고 싶은 지경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저는 폐하께 그런 부탁을 받은 적도 없고, 국가적인 임무를 수행하러 간 것도 아니에요. 애초에 거기 갈 때까지만 해도 라만차의 거리가 황제 폐하의 소유인 줄도 몰랐……!”
내가 항변하려는 그때였다.
“나의 황후가 오늘따라 부끄러움이 많군.”
그 나직한 목소리는 예상치 못하게도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어 하는 순간, 나는 크고 따스한 손이 내 허리를 감싸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대가 부끄러움이 많은 것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늘 그렇지 않았던가? ……그날 밤에도 그랬지.”
이 말은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속삭임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의 숨결이 귓가를 선연히 간지럽히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그가 어느 날 밤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틀림없어. 우리가 키스했던 날 밤을 얘기하는 거야!’
아마 지난번의 대화로 그는 눈치챈 것 같았다. 키스했던 일에 대해 언급하면 내가 당황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예상은 옳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팔 역시, 그저 안은 것뿐이지만 닿은 부분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당신, 갑자기 왜 상관없는 얘기를……!”
내가 말문이 막힌 것은 정말 잠깐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 더 질문할 것은 없나? 내 그대들에게 모든 의문을 해소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그는 내가 발언할 기회를 빼앗아 기자들에게 돌리고 말았다! 질문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자 당연히 기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흥분한 기자들의 비이성적인 열기 속에서, 나는 이곳에서 나의 항변을 들어줄 사람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완전히 휘말리고 만 것이다. 하여간에 징그러울 정도로 모략에 능한 작자였다.
‘저 인간을 진짜!’
나는 눈에 한껏 힘을 주고 알렉산드로스를 쏘아보았으나, 그는 그저 눈꼬리를 휘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나와 이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기자의 폭탄과도 같은 질문이 떨어진 것은.
“황후 폐하,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황후 폐하께서 대량의 성인용품을 구매하신 것 역시 황제 폐하의 지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