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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국을 주어도 그대와는 바꾸지 않아 (10/151)

10. 제국을 주어도 그대와는 바꾸지 않아20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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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74477382.jpg“네?”

갑작스러운 그 말에 나는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돌아보니, 알렉산드로스의 금빛 눈동자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빙긋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나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16549674477386.jpg“역시 그 정도로는 부족했나? 그것보다 더 훌륭하고 값비싼 옷이라면 그대의 안목에 맞을까. 어떻게 생각하나, 로벨리아.”

주변에서 헉하고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16549674477382.jpg‘아까 나를 그렇게 싸고도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이런 얘기라니! 누가 봐도 우리 관계를 오해할 만하잖아!’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알렉산드로스와 관계가 좋아 보이는 것은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최대한 그와 관계가 나빠 보여야 이혼에 대한 여론이 올라오기라도 할 텐데, 관계가 좋아 보이면 좋아 보일수록 그럴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16549674477382.jpg‘다시는 선물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야겠어.’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학을 떼도록 다소 허세를 부리기로 했다.

16549674477382.jpg“잘 아시는군요. 제 고귀함이 그 정도 옷에 어울릴 리가 없지요. 성 한 개 정도가 아니라 도시 한 개 정도는 견주어야 저와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까?”

16549674477406.jpg“허억!”

16549674477406.jpg“허헉, 쿨럭쿨럭!”

말도 안 되는 나의 허세에 주변의 가신들이 기겁하며 식기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아이샤마저 당황했는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16549674477382.jpg‘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이 정도면 지나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렉산드로스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웃는 정도가 아니었다. 누드톤의 매끈한 입술과 부드럽게 휘어진 입꼬리 위로, 그의 빛나는 금빛 눈동자에는 진심 어린 만족감과 즐거움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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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저 표정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굳이 해석하자면…….

16549674477382.jpg‘그래, 나의 황후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일까?

16549674477386.jpg“고작 도시 가지고 되겠나?”

알렉산드로스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16549674477386.jpg“제국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대와는 바꾸지 않아. 그대는 이 제국의 기둥이자 나의 하나뿐인 황후가 아닌가?”

이 인간, 대체 왜 이래? 어디서 뭐라도 잘못 집어먹은 거 아니야? 이쯤 되니 나로서도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입이 떡 벌어지려는 것을 막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16549674477382.jpg‘미친 거 아냐! 도시 한 개가 뉘 집 개 이름이야?’

아무리 내가 사치 부리려고 마음먹었기로서니 그건 모두 알렉산드로스와 이혼하기 위해서다. 알렉산드로스가 싫어하는 사치를 해야 의미가 있지, 그가 앞장서서 사치로 향하는 레드카펫을 깔아준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16549674477382.jpg‘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다고! 제국민들은 대체 뭔 죄야?’

말만 그러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짜 도시 한 개짜리 값어치의 옷을 선물할까 싶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 한 개 값어치의 옷을 선물하고, 공공장소에서 후작의 뺨을 후려친 나를 말도 안 되게 싸고도는 알렉산드로스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16549674477382.jpg‘저러다 진짜로 도시 한 개짜리 옷을 제작해 선물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대답해야 정신 나간 폭주 기관차 같은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민하는 내 앞에서 아이샤가 선수를 쳤다. 평소 아이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가 구세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16549674507124.jpg“저는 그렇게 비싼 드레스를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는 그저 명주와 아마로 짠 드레스라면 충분하답니다. 사람의 가치는 옷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아이샤는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16549674507124.jpg“그저 황제 폐하께서 제 곁에 있어 주신다면 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제게 금은보화는 없어도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금은보화처럼 대해주시잖아요.”

나는 아이샤의 잔머리가 꽤 잘 굴러간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다소 분위기에 맞지 않는 대사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값비싼 선물을 해준다고 했는데 옆에서 자신은 값비싼 선물 따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면 상대가 듣기 좋을 리 없었다.

16549674477382.jpg‘그만큼이나 다급해진 거겠지, 아이샤도.’

그럴 만도 했다. 눈앞에서 알렉산드로스가 내 과실을 티 날 정도로 감싸주고, 심지어 값비싼 옷을 선물했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아무리 아이샤라도 초조해질 수밖에. 더군다나 원작에 의거하면 알렉산드로스는 여태까지 로벨리아에게 단 한 번도 관심이나 호의를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아이샤도 완전히 처음 겪어보는 상상 밖의 일일 것이다. 당황스러운 탓에 어떻게든 알렉산드로스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방법이 지금까지 효과가 좋았던 ‘검소함 어필하기’ 였던 거고.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16549674477386.jpg“그게 무슨 소리지? 아이샤.”

달그락하고 알렉산드로스가 브랜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 낮아져 있었다.

16549674477386.jpg“너에게 금은보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너에게 제국의 황비라는 직분에 걸맞은 예산을 충분히 지급했는데.”

16549674507124.jpg“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16549674477386.jpg“네가 가진 자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진정 가진 것 없는 자들에 대한 기만이다. 자신이 가진 자임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가진 자로서 백성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16549674477382.jpg‘그냥 권위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알고 제법이네.’

16549674477386.jpg“그러니 겸손하고 겸허한 것이 황실의 미덕이 아니다.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는 것은 우리 황족뿐만이 아니라 제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 말 알아듣겠나, 아이샤?”

그의 말에 아이샤뿐만 아니라 나까지 놀랐다. 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야 원작에서는 지독하게 오만한 모습과 아이샤에게 미쳐 있는 모습밖에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의 황제로서의 철학 같은 것을 엿볼 구석이 없었다.

16549674477382.jpg‘아주 조금쯤은 다시 봤어.’

한편 아이샤의 동공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진으로 따지자면 진도 8.0의 대지진이었다.

16549674507124.jpg“네, 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이샤는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16549674477382.jpg‘저래서야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원.’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16549674477382.jpg‘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에게 무언가를 지적한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나는 머릿속에 있는 원작의 내용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원작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아이샤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16549674477382.jpg‘그럼 오늘은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의 언행을 지적한 역사적인 날인 건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인 나도 이 사실이 이렇게나 당황스럽고 믿어지지 않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더할까?

16549674477382.jpg‘아직 원작의 초반이라서 그런 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에게 호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닌 시기라서.’

하지만 이걸 당사자들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결국 내가 눈치껏 판단하는 수밖에.

16549674477382.jpg‘이번에 아이샤의 멍청한 소리가 좀 과했나 봐. 알렉산드로스의 눈에도 안 좋게 보일 만큼.’

그래,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 외의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내 머릿속에는 원작의 장면들이 너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16549674477382.jpg‘……밥이나 먹자.’

만찬장의 분위기는 어느새 싸늘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자신이 제일 아끼던 황비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꾸중했으니. 누구도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는지 알렉산드로스가 픽 웃었다.

16549674477386.jpg“뭣들 하고 있나? 어서들 들지. 이렇게 많은 인원을 불렀건만 나와 술 동무를 해줄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인가?”

16549674477406.jpg“제, 제가 함께 들겠습니다.”

16549674477406.jpg“저도 함께 들겠습니다. 여기 브랜디 한 잔 더!”

16549674477406.jpg“제가 술을 아주 잘해서 친우들 사이에서 별명이 술고래랍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대처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16549674477382.jpg‘분위기를 혼자서 들었다 놨다가 하네.’

  *** 그 이후로 만찬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로벨리아의 의도적인 패악질을 제외하면 말이다.

16549674477382.jpg“콩소메 수프가 식었잖아! 다시 데워와.”

16549674477382.jpg“양고기 요리는 내 앞에서 전부 치워버려. 이 끔찍한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오려 하니까.”

16549674477382.jpg“도미 요리는 잔가시가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발라내고, 소고기는 미디엄 레어로 다시 굽고, 카프레제 샐러드의 토마토는 전부 껍질을 벗겨서 내오도록 해. 토마토 껍질은 소화하지 못하는 체질이라서 말이지.”

로벨리아의 주문은 지독히도 까탈스럽기 그지없었다. 여느 귀족들이나 한두 가지 까다로운 취향이 있기는 마련이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덕분에 궁인들과 황궁 요리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만찬장과 부엌을 몇 번이고 오가야만 했다. 반면 아이샤는 자신은 가리는 것이 없고, 뭐든지 잘 먹는다고 했다. 귀족들은 로벨리아의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16549674477406.jpg“황후 폐하께서 원래는 현숙하기 그지없으셨는데 최근 이상해지신 것 같습니다.”

16549674477406.jpg“정말입니다. 그리도 자비롭고 정숙하셨거늘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변모하셨단 말입니까?”

16549674477406.jpg“언제나 제국민들을 생각하는 어진 황후이셨는데, 이거 참…….”

귀족들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들 중 빙의 전의 로벨리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모셨던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온갖 까탈을 다 떨면서 주문한 대신, 로벨리아는 자신이 주문한 요리는 다 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을뿐더러, 그녀는 원래 뭐든 잘 먹는 편이었다. 악녀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까탈을 떨긴 했지만 역시 타고난 식성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반면 아이샤는 몇 수저를 뜨는가 싶더니 곧 포크를 내려놓았다.

16549674507124.jpg“배가 부르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앞접시에는 먹지 않은 요리가 잔뜩 남아 있었다. 비록 오늘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를 유난히 싸고돌긴 했으나 가신들은 그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변덕이 워낙 심하다 보니, 오늘의 일 역시 그러한 변덕의 일환이라고 여겼다. 그만큼이나 알렉산드로스가 평소 로벨리아를 홀대하고 아이샤의 편의를 보아준 기간이 길었던 것이다.

16549674477406.jpg“과연 황비 전하는 가냘프고 정숙한 여성 그 자체이십니다.”

16549674477406.jpg“저도 적게 먹는 여성이 좋더군요. 지켜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않습니까?”

가신들은 아이샤를 향해 노골적인 아부를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벨리아는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었다.

16549674477382.jpg‘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지. 악녀 짓도 식후경.’

그녀는 밥을 중시하는 한국인답게 콩 한 알도 남기지 않고 접시를 싹싹 비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언제나처럼 정량의 식사를 한 그는 디저트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와인잔이 입술에 닿기 전에 멈추었다.

16549674477382.jpg“…….”

와인잔의 바로 위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 만찬회 이후로는 한동안 특별한 일이 없었다. 내 앞으로 한 장의 초대장이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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