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2021.01.31.
그의 말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표정 관리 하는 것조차 잊고 넋 나간 얼굴을 하고 말았다. 그가 나를 질책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이 이런 것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군. 이래서야 장갑도 소용이 없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그의 뜻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손에 붙들린 내 손을 향해 시선을 끌어내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내 손은 엉망이었다. 남의 뺨에 피가 비치도록 때렸으니 내 손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붉게 부어오른 데다가 마디마다 멍이 들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까지 생긴 내 손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위에 착용한 검은색 레이스 장갑은 너덜너덜해져 이제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손이 황실의 위신보다 중요할까? 게다가 빌헬름 후작은 귀족 중에서도 대단한 위세와 권력을 가진 인물이니 후작과의 관계 역시 중요할 터였다. 나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주변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로스의 반응에 심히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던 아까와 달리 이제 주변 사람들은 당혹감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런데도 알렉산드로스는 남의 시선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여전히 비참한 몰골로 쓰러진 빌헬름 후작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시종을 불러 이렇게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황후의 손을 치료할 궁의를 부르도록.”
“예.”
‘이 인간, 미친 거 아니야?’
이런 상황을 만든 당사자인 내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손이 좀 다친 나와 생식기에 돌이킬 수 없는 상해를 입은 빌헬름 후작 중에 누가 더 중환자인지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스는 빌헬름 후작의 부상보다 내 손의 찰과상에만 관심이 있는 듯이 굴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빌헬름 후작 역시 궁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실신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알렉산드로스는 시원한 태도로 대답하며 시종에게 궁의를 한 명 더 부를 것을 지시했다. 손을 치료받는 동안 나는 완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결국 내가 공적인 자리에서 돌발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질책하지 않았잖아.’
알렉산드로스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믿기 어렵지만, 지금 그가 한 행위는…… 나를 극도로 싸고도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나는 곁눈질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눈치야.’
주변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필사적이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가 나를 싸고돈다는 것 정도는 모두 눈치챘겠지.’
그 증거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 몸에 빙의된 뒤로 이제까지 내가 느낀 것 중 가장 놀라고 화가 났던 건, 다른 사람들이 로벨리아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무리 정략에 의한 결혼이라고 해도 로벨리아는 엄연히 황후이자 황실의 안주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로벨리아를 대하는 태도는 도저히 황후를 대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물론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으나 그것뿐이었다. 아무도 로벨리아에게 관심이 없는 거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사교계의 인기는 권력에 비례하기 마련인데 로벨리아에게는 초대장도 거의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관심을 받는 쪽은 아이샤였다. 어딜 가든 주목받았으며, 모두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연회장에 있는 모두의 관심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난 느낄 수 있었다. 수백 개의 바늘 같은 시선에는 너무나 뚜렷한 호기심과 의심의 기색이 묻어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황후를 싸고도시는 이유가 뭐지?’
‘두 사람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황제 폐하께서는 오로지 황비만을 애호하시던 것이 아니었나?’
‘황후가 황제 폐하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라고 하는 모두의 마음속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황제에게 밉보일 짓 밖에는 안 했는데……!’
나를 제법 다시 봤다는 시선, 동경과 선망과 질시의 눈초리! 그건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평판이 나빠지고, 나와 황제의 관계가 최대한 안 좋게 보여야 이혼할 가능성이 커지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너무 기가 막혔던 나는 상황을 이렇게 만든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원망마저 들었다. 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궁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의 찰과상일 뿐으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약과 치료 수단을 가리지 않고 황후에게 최선의 치료를 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도무지 그 속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때, 그의 금빛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아마 내 시선을 느낀 것이리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상당히 치명적이라서, 내가 그에게 화가 나지만 않았어도 심장이 덜걱였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애써 외면한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심장은 덜걱이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마치 다친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하는 듯한 그 미소에 몇 명의 귀족들이 감탄을 흘렸다.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나 극진히 보살펴주시다니…….”
“두 분 폐하께서 이리 금실이 좋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곧이어 내 손을 살피던 의원이 치료를 마쳤다. 빌헬름 후작은 실려 갔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들어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황후도 치료를 받았으니, 이만 만찬회를 진행하도록 하지.”
멀리까지 울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한 뒤, 그는 나를 돌아보더니 눈을 찡긋했다. 꼭 나의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지, 로벨리아. 석찬이 늦어져 많이 시장하겠군.”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은 어찌나 큰지 내 어깨가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귀족들이 감탄을 토했다. 어쩌면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관계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다. 문득 내 시선이 저 멀리 있는 아이샤에게 닿았다. 아이샤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초조한 듯한 모습이었다.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꼭 알렉산드로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듯한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곧 모두가 자리에 앉았고 만찬회가 시작되었다. 최상석에는 나와 알렉산드로스, 아이샤가 있었고 그 옆으로 귀족들이 둘씩 마주 본 채 줄지어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몰랐지만, 분위기상 작위가 아닌 정계의 영향력 순서대로 자리가 지정되는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불참한 빌헬름 후작은 최상석에 상당히 가까운 자리였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마음껏 들도록. 지금 이 자리는 공식 업무가 아닌 궁내 인사들 간의 소소한 교류의 장이니, 너무 부담 가지지 말도록 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소소한 자리인 듯 말했지만,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화려한 만찬회였다. 나는 눈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화려한 상차림에 혀를 내둘렀다. 이곳에 온 뒤로 몇 번이나 궁중음식을 먹어봤건만 만찬회에서 내오는 요리의 가짓수는 차원이 달랐다.
‘매주 금요일 있는 행사도 이 정도인데 연례행사는 얼마나 대단할까?’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며 윤기를 줄줄 흘리고 있는 요리들을 마주하니 상당히 허기가 졌다. 아까의 소동으로 시간이 다소 늦기도 했고, 또 빌헬름 후작의 뺨을 치며 힘을 썼더니 더더욱 그런 것 같았다.
‘일단 먹자. 패악을 떠는 것도 밥을 잘 챙겨 먹고 기운이 넘쳐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맛있어 보이는 요리들을 앞접시에 담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나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황후는 특별히 충분히 들도록. 아까 힘을 그렇게나 썼지 않나.”
“…….”
이 자식 역시 시비 거는 거 아니야?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다. 나는 아이샤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샤가 갑자기 말을 건넬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드레스가 정말 아름다워요, 황후 폐하!”
끼어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대화에 잠깐의 틈이 생기자 아이샤는 그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진녹색이 꼭 황후 폐하의 눈동자 색 같아서 정말 잘 어울리셔요. 게다가 허리가 잘록해 보이는 디자인도요.”
아이샤의 속이 훤히 드러나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홀짝이던 황금빛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역시 여주인공은 여주인공인 건지. 내 살갑지 않은 태도에도 아이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맑게 웃었다.
“샬롯 앤 콜린스 부티크에서 새로 맞추신 거죠? 거기서만 14벌을 맞추셨다고 들었어요.”
아하, 뭔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아무래도 내가 자기 드레스 디자인을 빼앗은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역시 그곳의 디자인은 화려해서 폐하께 무척 잘 어울리네요. 저는 그런 화려한 스타일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역시 저한테는 훨씬 수수한 디자인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결국 이거였군. 내가 수도에서 제일 비싼 브랜드인 샬롯 앤 콜린스의 드레스를 한 번에 14벌이나 맞추었다는 사실과 비교하여 자신이 얼마나 수수하고 검소한지 어필하려는 시도였다.
‘이곳의 수석 디자이너를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고 동네방네 자랑했으면서, 이제 와서?’
뻔히 보이는 얕은수가 같잖아 보였다. 그러나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 효과적인 전략일 것이다.
‘실제로 원작 초반에 아이샤가 얼마나 검소하고 청빈한지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왔지. 그때마다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아이샤에게 반했고 말이야.’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초반에 등장한 무도회 장면에서 한 귀부인이 자신이 입은 담비 털 코트를 자랑했다. 귀부인은 그 코트가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이며 그것을 사기 위해 남편을 얼마나 졸라야 했는지에 대해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그러자 아이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렇게 비싼 것은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너무 사치스럽지 않나요?’
그러자 주변이 찬물이라도 들이부은 듯 싸늘해졌다.
‘이 토끼털 숄도 평범한 집토끼 털로 만든 거예요. 황제 폐하께서는 제게 좀 더 비싼 걸 마음껏 사라고 하셨지만…… 제게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요. 저는 모피는 토끼와 다람쥐 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대부분의 여성 귀족들은 족제비, 밍크, 여우 등의 값진 모피를 입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여성인 아이샤가 자신에게 토끼와 다람쥐 털 외의 모피는 과분하다고 했다. 결국 자기 외의 다른 여성들은 분에 넘치게 사치스럽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성들은 모두 무안해했지만, 귀족 남성들은 아이샤에게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훌륭한 성품과 검소함을 겸비한 황비 전하다우십니다.’
‘검소함은 여인의 중요한 덕목이죠, 암.’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 아이샤의 검소함과 순수함에 감탄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났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다른 여자들은 뭐가 돼?’
내 눈에 아이샤는 배려심과 눈치가 심각하게 없어 보였다. 소설을 읽을 때는 아이샤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머릿속이 많이 청순한 건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였어.’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아이샤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대화를 듣는 귀는 많았다. 우리는 최상석에 앉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였으니까. 이 대화를 들은 남자들은 검소하다며 아이샤에게 찬사의 말을 던지겠지만, 사실 그건 나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곳 남자들의 관심과 호감을 사고 싶었다면 애초부터 악역 컨셉 같은 건 잡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곧 내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알렉산드로스의 가신들은 어쩐 일인지 아이샤의 말을 환영하지도, 과장되게 찬사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쩔쩔매는 듯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왜들 저러는 거지?’
이때만 해도 나는 직전의 국정 회의에서 알렉산드로스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작과 다르게 아이샤의 검소 어필을 환영하지 않는 가신들의 반응이 의아할 수밖에. 이 어색한 반응이 의아스러웠던 건 아이샤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신의 검소함을 어필하면 주변의 남자들이 칭찬해주는 것에 익숙했을 테니까. 그때였다.
“드레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렉산드로스였다.
“로벨리아, 어째서 내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지 않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