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차원간계면의 하늘은 완전한 공허였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그 광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에는 성진의 검강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별빛을 닮은 잔상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은하수와도 같이 삭막한 어둠 속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성진은 마냥 그 아름다움에 기뻐할 수 없었다.
“헬가.”
고철행성이 모두 날아가는 싸움 속에서 헬가의 시신은 탑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버린 상태였다.
성진은 그 작은 몸뚱이를 안아들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은 아직 혼자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어……?”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지난 10년.
탑에서 홀로 살아남은 성진의 카르마는 검강의 발현과 천사를 쓰러뜨린 것으로 신화의 영역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그의 영혼은 태생적 한계를 초월했고, 이제 첫발을 뗀 1단계라 해도 초월자는 초월자였다.
성진은 영혼을 다루는 기술을 하나도 배우지 않은 상태로도 영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진은 자신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는 헬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꿈을 꾸는 건가?”
아니다.
영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성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르마는 조작되거나 오해하는 일 없이 항상 그 본질을 나타냈으니까.
“하지만 그 모습은…….”
헬가의 영혼은 탑에서 뻗어 나온 사슬에 묶여 있었다.
성진은 반사적으로 사슬을 향해 손을 가져가 그것을 잡아 뜯으려 했다.
그러나 1단계 초월자의 힘으로는 성좌들의 신성이 집약된 탑의 시스템을 거스를 수 없었다.
순수한 힘만으로 이를 파괴하려면 신성존재 수준의 힘이 있어야 했다.
“힘으로 안 된다면 방법을 찾으면 돼.”
성진은 사슬을 되짚어 그것이 튀어나온 곳을 향해갔다.
300층의 문 너머.
탑의 꼭대기를 향해.
버려진 탑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한 것이 아니다.
성진은 이미 그 사실을 몬스터의 리젠이나 햇빛 등의 환경제어 마법이 유지되는 것을 통해 알고 있었다.
탑의 꼭대기.
이곳의 최고 관리자인 미미엘의 방이었던 그곳은 플라네타리움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진은 그곳에서 탑의 기능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스템은 비활성화되어 있지만 몇 가지는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마력을 통해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공허 속에선 마력이 제 혼자 솟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차원의 부유물들이 중력에 이끌려 모여드는 과정에서, 탑은 미미한 양이나마 마력을 계속 충당할 수 있었다.
“마력의 유입을 끊어 버리면 정지하나? 아냐, 이 보조발전 시스템이라면 마력이 부족해진 순간 보유하고 있는 영혼을 태워서 마력을 보충하려 들 거야.”
성진은 마력의 흐름만을 보고도 탑의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헬가의 영혼을 NPC로 리젠시키는 건?”
어차피 주인 없는 탑.
당장 영혼이 묶여 있는 것을 풀어주진 못해도 사슬이 이어진 말뚝 채로 들고 갈 수 있다면 되는 일이 아닌가?
방대한 시스템을 더듬어 기능을 하나씩 찾아보던 성진은 이내 리젠 시스템이 멈춰버렸음을 깨달았다.
미미엘과의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탑은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몬스터 관리를 포기하고 모든 마력을 그쪽에 돌리고 있었다.
“그딴 건 수리할 필요 없어!”
분노한 성진은 주먹을 내리치며 정지를 지시하려 했지만 그의 명령은 통하지 않았다.
시스템을 파악하는 것과 별개로, 성진에게는 그것을 조작할 권한이 없었다.
탑의 시스템은 천사만이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방법이,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러는 사이 성진은 한창 미미엘과 싸우던 중에 탑이 어떠한 명령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구조신호?”
그것은 일종의 구조신호였다.
탑이 전 우주의 천사들에게 보내는 구조신호.
“……!”
이미 천상에서 버려진 마당에도, 탑은 원래의 기능에 충실했다.
탑에 당장 확인해야 할 이상현상이 발생하자 천상에 신호를 보낸 것.
천상이 이에 반응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반응한다면?
곧 천사들이 몰려오리라.
“하핫 시발…….”
고작 천사 하나를 상대로도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도 헬가를 지키지 못했다.
그런 천사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다면?
“헬가?”
헬가의 영혼은 사슬에 묶인 와중에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봤다.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탑의 기능들을 생각하면 이걸 만든 놈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놈들이 몰려오면 그때는 정말로 헬가의 영혼조차 지킬 수 없으리라.
그러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진은 그로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탑의 제어권 확보에 나섰다.
어차피 초월을 이룬 그의 육체는 밥 좀 굶는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몰라.”
지금 당장에라도 천사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기한 내에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간 성진은 한 번이라도 본 것은 완벽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따라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본 적도 없는 검강조차 발현해냈다.
그러나 신성마법만은.
신성존재의 권능에서 비롯된 그것만은 방법을 안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왜!”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한 끝에 결국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차원의 틈이 열리고 그곳에서 천사들이 쏟아져 내렸다.
수백,
수천,
수만,
셀 수 없을 만큼의 숫자를 뱉어내고도 그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탑의 꼭대기에 선 성진은 홀로 그들을 마주했다.
[인간, 네게서 천사 살해의 카르마가 보인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금부터 네놈을 죽이고 그 영혼을 뜯어 확인해보겠다.]
[이에 동의하는가?]
성진은 대답 대신 그들을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
“누가 그딴 거에 동의하겠냐? 엿이나 처먹어라.”
검강이 빛을 발했다.
성진의 검강은 꽤 많은 천사를 지워 버렸다.
그러나 차원의 틈에서는 성진이 죽인 것보다 많은 천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분전해도 이 상황을 뒤집을 순 없었다.
점차 검강의 빛이 천사들이 발하는 후광에 뒤덮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빛이 꺼져갈 즈음.
또 다른 차원의 틈이 열렸다.
[이건 또 무슨 함정인가 경계했거늘. 천상이 이리 헐레벌떡 움직인 것을 보니 놈들도 예상치 못한 일임이 분명하구나.]
무수한 천사들이 쏟아진 차원의 틈과 달리, 이번에 열린 틈에서 나온 것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는 그곳에 있던 모든 천사를 합한 것보다 컸다.
영혼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육체마저도.
똬리를 틀면 별조차 품을 수 있을 듯한 거대한 흑룡.
공허의 어둠 속에서 흑룡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여가 명하노니, 죽어라.]
사룡왕이 가라사대 말은 저주가 되었다.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한 천사는 죽었다.
무수히 많아 보이던 천사의 반이 그리 죽었다.
[죽은 자들은 일어나 죽지 못한 자들을 도와라.]
그러자 살아남은 천사들과 같은 수의 군대가 생겨났다.
천사와 천사가 뒤엉켜 죽어 나가는 하늘에서 사룡왕은 성진을 내려다보았다.
[…… 어머나.]
그러곤 그 영혼에 서린 카르마를 보고는 굉장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말을 잃었다.
그녀는 따로 영혼을 떼어내 살펴보지 않고도 성진이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여의 것이 되거라.]
성진이 피투성이가 된 중지를 들어 올릴 것도 없이, 사룡왕은 그래야 할 이유를 덧붙였다.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마.]
“……소원?”
[네가 원한다면 그곳에 묻힌 모두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너와 함께 있는 그 영혼을 되살리는 것도. 뭐든지 들어주마.]
“그렇다면…….”
[단, 소원은 한 가지만 들어줄 것이다.]
사룡왕은 선을 그었다.
그녀는 성진이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상관없었다.
성진이 이대로 지구로 돌려보내달라고 하면, 사룡왕은 기꺼이 그러리라.
곧 그들이 떠난 이곳을 조사하기 위해 천사들이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천사들은 이곳에서 지구로 이어지는 차원이동이 일어났음을 알아내리라.
성진의 고향이 어디가 되었든 그들은 성진을 추적할 테고, 그곳은 천상의 침략을 막지 못해 멸망하게 될 것이 뻔했다.
지구가 멸망하면 사룡왕은 갈 곳이 없어진 성진이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헬가의 부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사룡왕의 힘으로 언데드가 되어 되살아나면, 헬가는 사룡왕에게 종속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성진 또한 그녀를 떠날 수 없게 되리라.
어느 쪽을 고르든 사룡왕은 성진의 몸과 마음 둘 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태고적부터 살아온 이 고대의 용은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룡왕에게 인간을 속여 일방적으로 유리한 거래를 하는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손에 들어오는 것을 일단 꼭 붙잡고 보는 아기와도 같은 행동.
그녀는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할 뿐이었다.
“그만한 힘이 있으면 둘 다 이뤄주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텐데.”
[하나의 소원에는 하나의 대가만이 있을 뿐이니라.]
“그럼 다른 대가를 내놓으면 다른 소원도 이뤄줄 테냐?”
[그럴 수 있다면.]
신처럼 강대한 저 존재에게 성진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바치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가 빌 수 있는 소원은 하나뿐이라는 것.
잠깐의 침묵 끝에 성진은 결정을 내렸다.
[결정했느냐?]
“그래.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 이 소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말이지.”
성진은 자신이 고민해낸 답을 풀어냈다.
“천사는 분명 강하지만 저런 탑을 만들만한 존재는 아냐. 그렇다면 놈들의 주인은 따로 있겠지.”
미미엘을 보고 의심했고, 이번에 몰려온 천사들을 보고 확신했다.
천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
천사를 부리고, 탑을 만들어내고, 그의 인생을 이딴 곳에 처박아 버린 존재는 따로 있었다.
“그놈들을 모두 죽여줘. 그럼 네 것이 되어주지.”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가를 받아갈 수도 없었다.
[케흐흑! 케하하하하핫!]
천상의 모든 성좌를 절멸시켜라.
성좌가 남아 있는 이상 사룡왕은 성진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힘으로 강제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카르마 법칙에 따라 성진이 스스로 사룡왕의 것이 되지 않으면 그녀는 성진의 영혼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사룡왕이 성좌처럼 인간의 영혼에서 카르마만 쥐어짜낼 것이 아니라면, 그 소원을 들어줘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요구하는구나! 네놈의 영혼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대가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면 그냥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룡왕이지 상대가 사룡왕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부족한가?”
[아니.]
세상의 반을 지배하고 있는 천상의 성좌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대가로 성진을 얻는다.
[충분하니라.]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건 덤이다. 나머지 두 소원도 들어주마. 앞선 소원이 끝난 다음에 말이다.]
사룡왕은 그렇게 말하며 버려진 탑을 회수하는 한편, 헬가의 시신을 언데드로 되살려 그 몸에 깃들었다.
“뭐하는 짓이지?”
[언젠가 계약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귀중한 몸이 아닌가?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지.]
이 세상에 자신의 몸으로 쓰이고 있는 것보다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은 없다.
그 힘을 직접 경험한 성진은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 그러면 성좌를 쓰러뜨려 달란 네 부탁 말인데.”
사룡왕은 은근슬쩍 성진의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대왔지만, 성진은 차마 헬가의 몸을 쳐낼 수 없었다.
“네놈도 협조해주었으면 하느니라.”
“그놈들을 쳐 죽이기 위한 거라면 얼마든지.”
“후훗, 네놈도 우선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알아두는 게 낫겠지. 마침 적당한 곳이 하나 있구나.”
“적당한 곳?”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니라.”
사룡왕은 그렇게 말하며 성진을 차원의 틈으로 밀어 넣었다.
도착한 곳은 전장.
천상의 침략이 한창 진행 중인 차원이었다.
[일단은 살아남아 보거라.]
그것이 특이점에 관한 전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