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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34화 (134/170)

<134>

미미엘은 지천사 케루빔으로, 성좌의 혈족에 해당하는 고위 천사였다.

그러나 미미엘은 산달폰 이상으로 혈족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미미엘의 주인은 성좌의 이름과 천상의 위계를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가 그들을 적대했으니까.

제 주인이 적들에게 가담한 마당에 대접을 바라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탑의 영혼들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탑과 함께 버려졌다.

천상으로 데려갔다간 제 주인에게 그 정보를 일러바치리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비탄의 성좌여 어째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의 통곡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원간계면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무작위 좌표에 버려진 그는 자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썩어야 했다.

[그럴 순 없다.]

그는 가만히 탑과 함께 죽어가는 대신 탈출을 시도했다.

자신을 버린 무명왕에게 돌아가든, 천상에 재차 충성을 받치든, 아니면 제3세계라도 찾아서 그곳에 틀어박히든.

뭐가 됐든 이 땅에서 홀로 썩는 것보단 나았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차원까지 몇백, 몇만 광년이 떨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천사의 능력이라면 언젠가 닿을 수 있었다.

미미엘은 차원의 미아가 되는 것을 각오하고 탈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것은 가장 장대한 무인도 탈출이 될 예정이었다.

[수면 상태로 일정한 방향을 향해 계속 가속하면 어디든 도달할 테지.]

이 탈출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는 것보단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는 편이 낫다.]

미미엘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한한 우주공간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는 태아처럼 몸을 말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보이저 호처럼 우주를 떠돌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클리어 룸에 침입자 발생.]

[등록된 관리자를 소환합니다.]

미미엘이 마침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다시 탑에 소환되었음을 깨달았다.

[플레이어?]

눈앞에 보이는 것은 ID를 부여받지 않은 비인가 플레이어와 NPC 하나.

놈들이 탑의 300층에 침입했기에, 탑의 시스템은 남아 있던 마력을 총동원해 미미엘을 다시 이곳에 소환한 것이었다.

탈출을 위해 감내한 그 모든 인내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사라졌음을 깨달았을 때.

[이, 이 쓰레기 놈들이!!!]

분노의 파괴광선이 미미엘의 양손에서 뿜어졌다.

그 모습에 성진은 곧장 워해머를 내 대응했다.

성진의 육체는 밥 먹고 쉬면 낫지만, 무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무기는 소모품이었고, 아껴 써야 할 대상이었다.

요정향에서 가져온 이 워해머는 그가 정말로 위험할 때만 사용하던 것.

실제로 그간 성진과 함께하며 온갖 몬스터의 머리를 부수고 피를 뒤집어쓴 워해머는 자체적인 카르마를 품고 있었다.

[헬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파괴광선의 여파만으로도 사람 따윈 단숨에 익혀 버릴 열풍이 불었다.

[NPC 따위를 지키면서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그때부터 천사의 공격은 헬가에게 집중되었다.

성진은 필사적으로 헬가를 지키려 들었으나 미미엘은 고위 천사로서의 능력이 대부분 전투에 집중된 존재였다.

먼저 무기가 부서졌다.

성진은 무기를 소모품으로 사용하며 눈에 보일 때마다 챙겨두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무기는 파괴광선 한번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막고, 막고, 또 막았다.

그러던 중 발사된 파괴광선이 헬가를 향하자 성진은 몸을 던져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아아…….”

성진의 가슴을 관통한 파괴광선은 그 뒤에 있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헬가가 서 있었다.

비스듬히 내리꽂힌 파괴광선은 성진과 마찬가지로 헬가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비해 너무 커 보이는 상처.

똑같은 공격을 받았음에도 결과는 달랐다.

눈앞에서 생명이 꺼져갔다.

“으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내지른 주먹이 미미엘의 방어막에 막혔다.

[그냥 죽도록 두진 않겠다. 충분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슨 짓이었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마!]

미미엘은 심장이 통째로 날아가고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는 성진을 마무리하는 대신 고문하려 했다.

그에게는 분노를 풀어낼 대상이 필요했다.

또한 어디서 튀어나온지 알 수 없는 이 인간을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없었다.

반면 성진은 눈앞의 적에도 불구하고 잿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헬가……?”

또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

1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롭게 만난 인연 또한 그를 혼자 두고 먼저 사라져 버렸다.

어떤 죽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도 충격적일 수 있었다.

“이 개…… 컥!”

미쳐 날뛰려는 성진의 목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이 날아와 꽂혔다.

이어서 생성된 똑같은 창들이 양쪽 팔다리를 모두 관통해 땅에 꿰어 버렸다.

사슬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성진은 그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일단 네 입에서 죽여 달라는 말부터 나오게 해보지.]

고통이 시작되었다.

미미엘은 성진이 죽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그를 치료하며 괴롭혔다.

손톱을 뽑고,

발톱을 뽑고,

뽑을 게 없어지자 손가락에 발톱을 박고, 발가락에 손톱을 박은 다음에 다시 뽑았다.

그러는 동안 미미엘은 헬가의 영혼을 붙잡고 그 기억을 살펴보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은 계속 먹잇감으로 쓰이고 있었나? 잘 됐군. 이년이 겪었던 것을 똑같이 겪게 해주마.]

미미엘은 헬가의 기억에 가득 담겨 있던 고통을 성진에게 재현했다.

불타기도 하고, 씹어 먹히기도 하고, 녹아내리기도 했다.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시간의 흐름마저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 어떤 육체의 고통보다도 성진의 영혼을 괴롭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헬가가 이곳에서 홀로 이런 일들을 당하고 있었다고?’

자신을 만나기까지 헬가는 도대체 몇 년이나 이곳에 있었을까.

그만한 일들을 겪고도 어떻게 자신을 보고 평범하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고통받은 아이를 자신은 왜 구해주지 못했을까.

왜 나는 더 힘을 쌓지 않았나.

어째서 헬가와 함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300층의 문을 열었나.

어떻게 어린아이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는 저딴 놈에게 주먹 한번 먹일 수 없나.

뿜어내지 못한 분노가 영혼에 쌓여갔다.

육체의 고통 따위보다 더 큰 분노가 영혼을 잠식했다.

고통이 분노에 파묻히고 나자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러자 성진은 천사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보인다.’

그가 어떻게 마법을 발동해 자신을 고문하는지.

그가 어떻게 카르마를 활용해 헬가의 기억을 읽어내는지.

성진을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한 미미엘은 굳이 그의 능력을 숨기지 않았다.

덕분에 성진은 고문당하는 과정에서 천사가 사용하는 모든 능력을 볼 수 있었다.

모두 보고,

모두 배웠다.

[벌써 그렇게 빌빌대면 안 되지. 좀 더 비명을 질러보라고!]

미미엘이 다음 고문을 위해 그를 회복시킨 직후, 성진의 입에서 비명 대신 파괴광선이 발사됐다.

몸을 구속하던 마법을 모두 자신의 마력으로 흡수한다.

방어막을 만들고 있을 때는 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성진은 가진 마력을 쏟아 부어 파괴광선을 유지하는 한편, 검기를 가다듬었다.

검이 없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진작부터 손톱 같은 곳에서도 검기를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손톱이 떨어진 지금은 오히려 검기가 몸에서 떨어지는 것을 더 쉽게 이미지 할 수 있었다.

‘방어막은 손바닥에서부터 3cm…….’

방어막 안쪽에서부터 검기를 형성한다.

내 마력을 침투시킬 순 없으니, 상대의 마력을 이용해서.

‘상대가 완성한 마법을 분해해 내 마력으로 삼았으니, 상대의 마력 그 자체도 내 마력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압도적인 실력차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고문당하는 와중에 몇 번 본 게 전부고,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 성진이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딴 건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뿐.

‘이론상 가능한 일이라면, 해내면 된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방어막 안쪽에서, 미미엘은 심장을 관통당했다.

“컥!”

방어막이 사라졌다.

미미엘은 파괴광선을 피해 회피했고, 성진은 그 뒤를 쫓았다.

무기는 이미 모두 빼앗겼다.

남은 건 몸뚱이뿐.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육체야말로 성진이 가지고 있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젠 네가 죽을 차례다.”

성진의 주먹이 미미엘의 턱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튕겨나간 미미엘은 300층의 벽을 뚫고 299층까지 날아갔다.

아래턱이 날아간 놈은 그 와중에도 성진을 노려보며 상처를 재생해냈다.

[이…….]

“아직 안 끝났다.”

하지만 미미엘이 태세를 가다듬는 것보다 성진이 그를 따라잡는 것이 더 빨랐다.

콰아아아아앙!!!

아까보다 더 강해진 일격.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성진의 공격은 미미엘을 즉사시키지 못했다.

단번에 죽이지 못하니 놈은 계속해서 상처를 재생하며 공격을 받아냈다.

‘그렇다면 재생속도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의 대미지를 가한다.’

성진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추가타를 가했다.

부족한 마력 대신 카르마가 타올랐다.

패배의 카르마로 미미엘을 상대할 때 성진은 모든 능력이 약화되는 효과를 받고 있었다.

‘약화된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몸을 움직이면 돼!’

미미엘이 파괴광선을 발사하려는 것을 본 성진은 그보다 먼저 파괴광선을 발사했다.

그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속도를 높이자 성진은 그보다 더 빠르게 뒤를 쫓았다.

성진은 단순히 상대의 능력을 보고 배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더 빠르고 강력하게 사용했다.

[어, 어떻게……?]

상대가 더 유리한 것은 체력과 마력의 우위뿐.

죽기 전에 죽인다.

성진은 전력을 다해 미미엘을 몰아쳤다.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머리통을 두들겨 뇌를 흔들어놓는 것.

250층.

“내가.”

200층.

“죽어도.”

150층.

“네놈은.”

100층.

“이곳에서.”

50층.

“죽이고.”

1층.

“가겠다!”

화산이 폭발하듯 비산하는 고철들과 함께 성진과 미미엘은 밤하늘로 떠올랐다.

끝없이 이어진 밤하늘.

미미엘은 물러설 공간이 생기자 무작위 공간이동을 반복하고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인간 주제에!]

300개의 벽을 깨부수고 나오는 와중에도 미미엘의 육체는 이빨 몇 개 빠진 정도에 그친 모습이었다.

끊임없는 연타로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긴 했지만, 실제로 성진의 육체와 영혼은 지쳐 있는 상태였다.

절대적인 힘의 부족.

마력이든 카르마든 상대를 끝장낼 절대적인 한방이 부족했다.

[죽어라!!!]

수많은 고철덩이가 미미엘의 통제를 받아 성진을 향해 쏘아졌다.

성진은 그 속에서 워해머 하나를 붙잡고 전력을 담아 휘둘렀다.

나라 하나를 통째로 뒤덮을 폭격과 도시 하나를 통째로 쓸어 버릴 일격.

두 사람의 전투에 고철행성을 이루고 있던 고철들이 이리저리 터져 나갔다.

파괴광선이 빗발치고 인공태양이 떨어져 내린다.

그에 맞서 성진은 고철더미 속 무기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했다.

창을 던져 인공태양의 핵을 꿰뚫고, 방패로 파괴광선을 빗겨냈다.

끝없이 공격이 이어졌으나 성진은 그 모든 것을 때려 부수며 계속해서 미미엘에게 따라붙었다.

[꺼져라! 내게 다가오지 마!]

강력한 한방도, 까다로운 함정도, 물량 세례도, 단순한 장벽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성진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수백 시간을 이어진 전투.

이미 행성을 이루고 있던 고철이 대부분 날아가고, 그 안에 파묻혀 있던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기나긴 싸움에도 불구하고 미미엘은 모든 대미지를 회복해냈다.

반면 성진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린 상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돼.’

그가 보고 배운 그 어떤 기술로도 미미엘을 죽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보고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기술을 뛰어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 한다.’

그는 이미 한계였다.

기회는 한 번뿐.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성진은 천사를 쓰러뜨릴 가장 완벽한 일격을 상상했다.

그리고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성진의 카르마가 빛이 되었다.

검기성강.

별을 가르는 빛이 우주를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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