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화 (1/170)

<1>

별조차 떠나 버린 멸망한 세계.

세상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영혼들이 잡아먹히고 빈 캔처럼 버려진 이 땅에서.

한 인간이 여덟 왕을 마주했다.

“특이점이여. 준비는 끝났다.”

성좌에게 멸망한 여덟 종족의 왕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신성존재에 대한 복수를 위해 죽어서도 영혼으로 남아 성진을 돕고 있었다.

“필멸자의 몸으로 신성존재를 쓰러뜨린 그대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좌들은 세상을 파괴하고 영혼을 먹어치우고 있다.”

“놈들을 끝장내기 위해선 천상으로 직접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천상으로의 길을 열기 위해선 가동 중인 탑이 필요하다.”

“무수한 차원을 돌아 우리는 침략이 진행 중인 탑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곳은 바로 지구.”

“특이점 그대의 고향이다.”

그 말에 청동망치를 쥔 성진의 손에 태산을 무너뜨릴 힘이 가해졌다.

왕들의 대전사로서 받은 청동망치는 성진의 거력을 담고 부르르 떨었다.

성진의 힘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이 무기는 그가 성좌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게 해준 1등 공신이었다.

“그대의 세상마저 우리와 같은 운명을 걷도록 둘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남은 힘을 합쳐 그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탑의 끝까지 올라라.”

“그곳에서 탑을 파괴하고 천상으로의 길을 열어라.”

“천상의 성좌들을 끌어내려 단죄하라.”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바람이다.”

그와 동시에 차원이동진이 발동하며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성진은 휘몰아치는 마력 속에서 답했다.

“걱정 마라.”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그는 성좌들에게 멸망 당한 아홉 번째 왕이 될 생각 따윈 없었다.

“그 바람은 이뤄질 거다.”

성좌의 손아귀에 떨어지고도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던 위대한 여덟 종족.

그들이 남긴 의지는 한 인간에게로 이어졌다.

* * *

태평양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은 콘크리트 인공섬.

세계정부의 군사기지로 이용되고 있는 이 섬에선 오늘 수만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거룩하신 천상의 성좌님들께서 탑을 내려주신 지 30주년.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참석해 주신 불과 광채의 사도 리처드 카이만님의 개회사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금발의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탑에 도전한 수많은 플레이어 중 성좌의 선택을 받은 12인의 사도.

인류를 대표하는 12명의 플레이어 중 하나인 리처드 카이만이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반갑습니다. 리처드 카이만입니다.”

남태수는 사도의 인사말을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태평양 한복판에 탑이 나타난 지 30년.

탑은 스마트폰과 같이 현대사회에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나온 탑의 기술과 자원은 탑을 오른 적 없는 일반인들의 삶마저 바꿔 버렸다.

더 이상 탑이 위험한 것도 옛말.

기존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나온 장비로 무장하고, 스킬북을 통해 스펙을 갖추면 안정적인 등반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일단 플레이어로서의 힘을 손에 넣으면 초인이 되어 무병장수는 기본.

마법도 쓰고 칼도 휘두르며 말 그대로 날아다닐 수 있었다.

탑은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돈을 내서라도 들어가고 싶은 곳이 되어버린 것.

세계정부는 탑의 출입을 통제하고 기부금을 받아 도전자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물론 세계정부는 돈으로만 도전자를 선별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군인들을 들여보내기 위한 자리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청약을 받아 도전자를 추첨했다.

전 세계적인 계층 이동 사다리 복권.

전 재산을 영끌해 청약에 들이부은 남태수가 확인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린 것도 이 시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오늘부로 나도 플레이어가 되는 거야……!’

하필 자신의 입장 회차가 30주년과 겹쳐 버린 탓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식순상 그들이 탑에 입장할 차례가 온다.

‘탑에 들어가면 준비해 온 대로 공략을 시작한다.’

탑 내부 스테이지들의 내용과 공략법은 이미 상당수 알려진 상태였다.

물론 사람마다 적성과 재능이 다르고, 플레이어로서의 직업군과 스킬트리가 갈리니 자신에게 맞는 방법은 자기가 찾아야 했다.

청약이 당첨된 후, 남태수는 기초체력 훈련은 물론 사격이나 서바이벌 생존법 등을 공부하며 철저히 준비를 마쳤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청약이 되었다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탑에서는 한 층을 오를 때마다 1레벨씩 오른다.

그리고 도전의 기회는 한 번뿐.

100층에서 떨어진 플레이어는 평생 100레벨.

200층에서 떨어진 플레이어는 평생 200레벨로 살아야 했다.

‘기회가 왔을 때 한 층이라도 더 높이 올라야 해.’

기회는 한 번뿐이니 준비가 철저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그럼 1,201회차 도전자들의 입탑을 거행하겠습니다!”

남태수는 같은 회차 동기들과 함께 하늘 위에 떠 있는 탑의 아래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탑의 도전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포탈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탈의 앞에는 앞서 보았던 사도 리처드 카이만이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 있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성좌의 선택을 받는 분들이 나오기를 바라겠습니다.”

리처드 카이만은 도전자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며 덕담을 전했다.

청약 당첨자로 가장 뒤에 있던 남태수는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 섰다.

“당신이 마지막이군요. 부디 목표했던 것보다 높은 층까지 오르시길 바라겠습니다.”

남태수는 감격하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사도 같은 사람과 악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이제 자신도 플레이어가 된다는 것이 실감나 더욱 감격스러웠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태수는 기운차게 답했으나 리처드의 눈은 그가 아니라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던 리처드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니 사람들의 고개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물에 젖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다음 순간, 경호원이 하늘을 날았다.

‘옷자락을 잡아채서 던졌어?’

멀리서 보고 있던 남태수는 전체적인 움직임을 전부 볼 수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빠른 몸놀림.

그 모습은 입탑 준비를 위해 만나보았던 유도 선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체중도 싣지 않고 선 채로 잡아 던졌음에도 사람이 수십 미터를 날았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 출신인 경호원은 그렇게 던져지고도 멀쩡히 착지했다.

그 직후 군사기지답게 경비를 서던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파직!

“으악!”

“뭐, 뭐야?”

갑작스러운 사건의 발생에 기념식을 촬영하던 카메라맨들이 보도정신을 발휘해 그 모습을 촬영하려 했으나. 어느새 나타난 불티가 수십 대가 넘는 카메라들의 회로를 불태우고 지나갔다.

“세계정부의 행사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전 세계에 생중계할 순 없지.”

불길이 사방을 휘감았다.

마력의 불길이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 상대의 도주를 차단한다.

불과 광채의 사도.

리처드의 권능이 불꽃의 링을 만들어냈다.

불꽃의 링 속에 남겨진 것은 시전자인 리처드와 의문의 습격자.

그리고 하필 악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남태수였다.

‘조졌다.’

남태수는 최대한 습격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슬금슬금 리처드의 뒤로 물러났다.

리처드는 그런 남태수의 존재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목적은 나인가? 사도를 상대로 습격이라. 실력에 꽤나 자신 있나 보지?”

“너 따위에게는 관심 없다.”

“너 따위?”

그 말에 리처드의 표정이 돌변했다.

“감히 불과 광채의 사도이신 이 몸에게 너 따위?”

리처드는 자신의 성좌가 모욕당하자 무서울 정도로 격렬하게 분노했다.

반면 정체불명의 습격자는 담담히 한 단어에 반응했다.

“사도?”

이어진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성좌의 개였군.”

푸욱!

남성의 주먹이 리처드의 가슴을 관통한다.

터져 나간 가슴팍에서는 피와 살점이 아닌 불꽃이 튀었다.

“커억……!”

“그래도 분신체 따위에는 관심 없다.”

구멍에서 흘러나온 불꽃은 이내 전신으로 번졌다.

리처드 카이만은 시체를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불꽃으로 화해 사라졌다.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기겁했다.

‘분신체라고? 아니 그거야 어찌 됐든!’

리처드가 사라진 뒤에도 주변을 휘감은 불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도조차 일격에 보내 버린 정체불명의 습격자와 단둘이 남게 된 남태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 숨도 못 쉬고 굳어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남태수를 남겨두고 탑의 포탈을 향해 걸어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허억! 허억!”

남태수는 습격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잠시.

주인을 잃고 통제가 사라진 불길이 천천히 내부에 있는 남태수를 조여오고 있었다.

불길이 만들어내는 뜨거운 열풍에 숨을 몰아쉬던 남태수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휘, 휩쓸리기 전에 구조해 주겠지?”

그러나 바깥에선 사도의 힘으로 만들어진 불길을 제압하지 못해 난리가 난 상태였다.

“에이 설마……?”

남태수는 계속 버텨보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인인 그의 몸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사방을 휘감은 불길 덕분에 도망칠 곳은 없다.

있다고 하면 습격자가 들어갔던 포탈뿐.

“아니, 저길 들어가려고 온 거긴 하지만!”

지금 들어가면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칠 텐데 어떻게 될 줄 알고 들어간단 말인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 건 똑같았으니까.

화르륵!

“으악! 들어가요! 들어갈게요!”

당장의 열기가 주는 고통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남자에 대한 두려움보다 커지자 그는 황급히 포탈로 뛰어들었다.

[탑에 입장하셨습니다.]

[플레이어 자격이 주어집니다.]

[1레벨 플레이어 남태수.]

[자신을 증명하십시오.]

처음 탑에 들어온 도전자에게 보인다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남태수는 1레벨 플레이어로 거듭났다.

시스템의 가호 아래 들어서자 그의 눈에도 플레이어의 ID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신에 앞서 탑에 들어섰던 바로 그 습격자.

‘잠깐. 그러고 보니 플레이어가 아니었어?’

탑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나 한 번뿐.

이미 플레이어로서의 힘을 얻고 나왔다면 다신 포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는 사도라도 마찬가지.

즉, 방금 리처드를 쓰러뜨리고 탑에 들어온 이 습격자는 플레이어도 아니면서 그런 힘을 발휘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고작 1레벨.

주성진이라는 남자는 탑의 시스템 없이도 초인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도전자여, 네가 탑에 오를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라.

탑의 첫 번째 스테이지.

시험의 장.

도전자의 실력을 시험하는 수호거상.

1층에 등장하는 이 거대 골렘은 도전자의 기량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내린다.

당연히 1층의 플레이어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몇 초를 버티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스테이지.

앞서 탑에 들어갔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성진이 소란을 벌이는 동안 시험을 다 보고 2층으로 올라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증명하면 되지?”

-나를 쓰러뜨려 보아라. 전력을 다해도 쉽진 않겠지만…….

“그거 간단하군.”

이기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기에 1분만 버텨도 10층까지 직행할 수 있는 그 석상은,

퍼억!

어느새 도약한 주성진의 주먹에 산산조각 나 비산했다.

“미친.”

탑을 부수기 위해 돌아온 남자 주성진.

그가 처음으로 부순 것은 남태수의 인생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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