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비 아리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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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이비 아리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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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이비 아리아테니까
2023.07.17.
“노체가 죽고 먹힌 곳이요.”
엔테가 흩날리는 꽃잎을 가지고 놀 듯 제게 몰려든 저주를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는 노체의 무덤이에요. 그래서 노체도 여기선 약해져요. 봐요, 날 갉아 먹으려고 몰려와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엔테의 나른한 목소리에 이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겉보기엔 햇살과 함께 내리는 무언가를 경건히 떠받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방인을 추방하려고 몰려든 저주와 그것의 무력함을 비웃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 모습이 오싹하고도 섬뜩했지만, 이비는 침착하게 두려움을 감췄다.
지난밤, 엔테는 정말 이비를 죽이려고 했다. 그가 멈춘 건 이비가 속삭인 말 한마디 때문인데, 이건 잠깐의 유예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비는 좀 더 살기 위해 지금부터 누군가를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왜 여기로 온 거지?”
이비는 작정한 듯 허리를 펴고 차갑게 중얼댔다.
그 고압적인 목소리에 저주를 바라보던 엔테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왠지 놀란 얼굴로 이비를 보더니, 이내 온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방해받지 않으려고요. 그리고 여기에 준비해 놨어요.”
엔테는 하녀인 척할 때처럼 공손한 태도로 사원 저편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자그마하게 덧붙였다.
“당신을 모실 곳이요.”
이비는 대꾸 없이 엔테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그가 사용한 호칭을 되뇌었다.
투기장에서 정체를 드러낸 후 엔테가 이비에게 사용한 호칭은 줄곧 ‘너’였다. 심지어 어제까지도 그는 너너거리며 존대 같지도 않은 존대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다.
이비는 이 호칭 변화에 주목하며 엔테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웬 유리 상자가 놓여 있었다. 크기는 옷장만 했고, 안에는 옅은 색상의 꽃이 가득했다.
그래서 언뜻 작은 온실이나 선물 상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린 꽃잎 위에 펼쳐진 하얀 드레스를 발견한 순간, 이비의 온건한 착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 안에 놓인 드레스는 성녀의 예복이었다.
사람 크기의 상자와 하얀 꽃. 그리고 그 안에 펼쳐진 예복.
엔테가 당신을 모실 곳이라며 가리킨 것은 이비를 위해 마련한 관과 수의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소름이 쭉 끼쳤다. 차가운 뱀이 발목을 타고 오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비는 애써 견디며 냉정히 읊조렸다.
“직접 준비했어?”
“부족하지만, 네.”
그러자 엔테는 또 한 번 얌전히 대답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와중이지만, 이비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이비의 예상이 맞다면 엔테가 말한 그의 신은 이비도 그럭저럭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엇비슷하게 따라 하면, 적어도 저 미친 유리 관에 당장 눕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이비는 내친김에 로히카처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무감한 시선으로 허락도 없이 제작된 관을 바라보았다.
“제법 공을 들였네.”
그러곤 이깟 관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허세를 부렸다.
이때만 해도 이비의 얼굴엔 무거운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치 여제처럼, 성녀처럼, 혹은 신처럼.
이 엄숙한 가식은 늘 그렇듯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좀 봐줄 법도 한데, 근래에 이비의 가식은 성공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하늘이 무심한 탓이고, 엔테가 은근히 칭찬을 바란 탓이기도 했다.
“마음에 드세요?”
“너 같으면 마음에 들겠냐, 이…….”
어쨌든 이비에겐 불가항력이었다.
게다가 울분과 긴장이 누적된 탓에 이비의 진심은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
“……야! 완전 소름 끼쳐!”
결국 이비는 차마 기록할 수 없는 말을 길고 상세히 내질렀고, 수줍게 웃던 엔테는 곧 종족이 바뀌고 모친상을 치른 사람이 되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
후련하게 저지른 이비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냉혹한 언니의 가면을 벗고 엔테를 힐끗 쳐다봤다.
이런 폭언은 처음인지, 조금 전만 해도 해사하던 엔테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색해져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넌 자업자득이잖니…….’
이비는 소심하게 궁시렁대며 엔테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그는 광폭하게 돌변하지 않았다. 다만 안 어울리게 눈치를 보다가 소심히 되물을 뿐이었다.
“그렇게 별로인가요? 직접 누워 보면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결국 이비는 그를 신체 일부와 정조 관념마저 상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로써 엔테가 완전히 시무룩해지자, 이비는 자신의 저열한 입담을 반성하면서도 슬그머니 마음을 놓았다.
대뜸 욕을 했는데도 엔테는 여전히 이비를 죽일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비는 본전도 못 찾는 흉내를 그만두고 그냥 뻔뻔하게 투덜댔다.
“솔직히 괜찮을 리가 없잖아, 대뜸 살해당하게 생긴 것도 억울한데 이 와중에 장례식까지 변태처럼 준비하면 고마워할 줄 알았어?”
이비의 핀잔에 엔테가 입을 고이 다물었다. 그게 마치 혼나는 어린애 같아, 이비는 내친김에 혀를 차며 되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날 못 죽여서 안달이야?”
“그건 신의…….”
“그러니까 그 신 말이야. 대체 뭘 그렇게 피하고 싶어 하는 거냐고.”
변명하다 말을 가로채인 엔테가 이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왠지 놀란 눈이라, 이비는 그가 의심하는 걸 먼저 말해 버렸다.
“나잖아, 날 죽이라고 한 너의 신.”
이비의 단정에 엔테의 눈이 커졌다.
역시 그의 눈동자 색은 카셀 몬트라가 주운 꼬마와 똑같은 보랏빛이었다.
그 꼬마처럼 여린 듯 살벌한 엔테가 놀란 눈으로 이비를 쳐다보더니, 이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꽤나 반가운 목소리로.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그 물음에 대한 이비의 답은 명료했다.
“나는 이비 아리아테니까.”
동시에 퍽 가관이어서, 이비도 조금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사실이자 진심이기에 꿋꿋이 이겨 내기로 했다.
.
.
.
막 씻고 나온 이비는 묘한 기분으로 눈앞의 식탁을 바라보았다.
세월에 파묻혀 군데군데 부식된 대리석 식탁 위에 세련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부풀리지 않고 구운 빵과 몇 종류의 치즈, 기름과 향신료로 볶은 곡물, 말린 무화과, 그리고 향이 짙은 백포도주까지.
모두 엔테가 능숙한 손길로 완성한 것이다.
고급스럽긴 한데, 이비의 눈엔 좀 텁텁해 보였다. 그래서 엔테가 이렇게 말했을 땐 내심 놀랐다.
“이거 좋아하셨어요. 지금도 좋아하세요?”
“아니, 지금은 이렇게 안 먹어. ……나 술 자주 마셨어?”
“음, 가볍게 곁들이는 정도셨어요.”
엔테의 부드럽고 정중한 대답에 이비는 감명 깊게 끄덕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자고 덤비던 놈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묻다니, 머리가 살짝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엔테가 이비를 향해 달콤하게 웃었다.
“……왜 웃어?”
“같은 옷인데 분위기가 달라서요.”
그 말에 이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샘에서 몸을 씻으면서 더러워진 옷도 갈아입었다.
물론 엔테가 마련해 준 새 옷은 유리 관에 안치되어 있던 성녀의 예복이었다.
정말 악취미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이비는 일단 어울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비가 식사를 시작하자 엔테가 자연스럽게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래서 이비도 아무렇지 않게 운을 뗄 수 있었다.
“네가 아는 나는 어떤 사람이야?”
“이미 아시잖아요. 아까, 많이 놀랐어요. 잠깐이지만 표정이랑 목소리가 정말 당신 같아서요.”
엔테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생각난 듯 쓸쓸히 덧붙였다.
“……그 뒤에 그런 욕을 하실 줄은 몰랐지만요.”
그 흐린 얼굴에 이비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엔테가 다시 애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야말로 궁금해요. 정말 어떻게 알아채신 거예요?”
“시간을 건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어. 그런데 너는 나를 죽이러 넘어왔고, 그게 신의 뜻이라고 했잖아.”
이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애꿎은 와인 잔을 빙빙 돌렸다.
“그 정도면 신의 뜻을 철저히 따라야 정상인데, 네가 다른 사람은 벌레처럼 죽이면서 나한테만 이상한 기회를 주니까. 당연히 수상하잖아.”
엔테는 문득 투기장에서 이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왜 날 죽이겠다는 거야?
―신께서 그걸 바라시니까.
―그렇다면 신앙심이 형편없네. 그럼 당장 죽이지 왜 안 죽이고 장난질이야?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한 도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비는 이때 이미 낌새를 챈 거였다.
엔테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비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시간대의 나는 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확신하세요?”
“권력까지 잡은 내가 이런 시도를 허락할 리 없으니까.”
이비의 단언에 엔테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그때 엔테의 두 눈에 담긴 건 말 그대로 신앙심이었다. 어딘지 과도한, 그리고 적잖이 일그러진.
이비는 그의 눈빛을 살피며 조심히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대체 나는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그 말에 엔테의 눈썹이 조금 내려앉았다. 그는 할 말을 고르듯 위를 보더니, 이내 담백하게 실토했다.
“그게 가장 나은 길이니까요.”
“내가 그렇게 말했어?”
“음, 직접 말씀하신 건 아니에요.”
“그럼 가장 낫다는 건 누구에게 해당하는 말이야? 적어도 죽어야 하는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이비가 연이어 묻자 엔테의 미소가 한층 곤란해졌다. 그래서 이비는 한숨을 쉬듯 중얼댔다.
“제대로 안 가르쳐 줬구나.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 말에 엔테의 시선이 먼 곳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비는 그 여자가 상당히 몹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고 살짝 미친 밤의 일족.
어느 시간대의 이비는 그 애한테 명령했다. 시간을 거슬러 네가 따르는 나를 죽이라고. 심지어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너무 잔인하잖아.’
이비는 자기 자신에게 살짝 질렸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하던 부분이었다.
점성술사는 그 여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 티엔다의 모든 걸 움직이는 사람. 그런데 별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또 유비아가 잠시 보여 준 그 여자는 얼음장같이 싸늘하고 안개처럼 희미한, 꺼림칙한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과거의 자신인 이비를 이렇게 인식했다. 대수롭지 않은 것, 관심 없는 것, 거슬리는 것이라고.
이비는 이것들로 그 여자를 나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는구나.’
기분이 좀 복잡하지만, 이비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도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어제 숨이 간당간당 넘어가던 찰나 판단했다.
엔테, 이 뱀인지 양인지 모를 녀석을 설득하기로 말이다.
“전에 신앙심이 형편없다고 했던 거 취소할게. 이유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 심했어.”
“마음 쓰지 마세요. 정말 심한 말은 아까 들었는걸요.”
그런데 이 녀석, 순종적인 척하면서 은근히 할 말은 다 한다.
이비는 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을 어떻게 구슬릴까 고민하다가 뼈아픈 지난날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할 말을 골라 봤자 이놈의 저주 때문에 본전도 못 찾을 거다.
그래서 이비는 속으로 시온 라우렐 죽으라는 말을 힘껏 외친 후, 엔테에게 정면으로 물었다.
“너, 사실 날 죽이고 싶지 않지?”
그러자 엔테도 가감 없이 대답했다.
“아뇨, 딱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