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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온 세상과 동떨어진 (117/129)


117화. 온 세상과 동떨어진
2023.07.13.


이비는 이미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른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느낄 때마다 사로잡히듯 생각하고는 했다.

왜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까, 라고.

10년 전, 비스의 비좁은 골목길에선 몰이가 한창이었다.

바옌의 병사들이 뒷골목의 퇴로를 막고 진입하자 골목의 틈새마다 숨어 있던 빈자들이 속속들이 붙잡혀 나왔다.

그 비렁뱅이와 고아들은 대부분 무력하게 병사들을 따라갔다. 도망치다 붙들린 이도 많았다. 감히 저항하다가 호된 매를 맞는 사람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저 뒷골목에 숨어 살던 이들 중 군대가 올 걸 미리 알고 피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이비뿐이었다.

이비는 광장의 첨탑, 그 높고 거대한 시계 뒷면에 숨어 평소보다 더 난장판인 뒷골목을 내려다보았다.


‘또 이렇게 됐어.’

또 혼자 살아남았다.

이비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괴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비는 이 도시에 군대가 들어왔을 때부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달 성녀님이 이 도시에 다녀간 후, 성의 높은 분들이 뒷골목을 찾아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관리들에게 아첨하고 골목에선 거드럭대던 건달들이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바로 어제 낯선 상인들이 빈 짐마차를 여러 대씩 끌고 나타났으니까.

그래서 이비는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비의 경고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그 결과가 저거다.

구빈원이나 보육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끌려가 결국 노예로 전락하는 것. 소외당하다 못해 자유마저 빼앗기는 것.

그건 거리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었고, 그래서 이비는 뻔히 다가오는 비극을 피하지 못하는 저들이 그저 답답했다.


‘대체 왜 모르는 거야…….’

하늘이 밝아 오면 달은 사라진다.

바람이 불면 밤이슬은 마르고, 고양이가 나무를 타면 새는 날아오른다.

모든 일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연속되고, 벌어지기 전에 명백한 조짐을 보인다.

그러니 곧 있을 일을 짐작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인지 사람들은 한 치 앞을 못 본다.

그래서 단지 영리하다는 이유로 또 혼자가 된 이비는 울적한 기분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만 해도 이비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홀로 위험을 피하는 일이 반복되자 자만도 왜곡도 없이 깨달았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대개의 사람은 거짓말에 속고 순간의 눈치로 상대의 본심을 읽지 못한다.

태어난 순간은커녕 며칠 전의 일도 기억 못해 어딘가 기록을 남긴다.

직접 보고도 모르는 것이 많아 타인에게 묻고 대충 끄덕인다.

특별히 아둔한 몇 사람만이 아니라, 배운 것이 없는 천민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소위 귀족들조차 그 뚜렷한 한계를 감추기 위해 시종을 거느리며 똑똑한 척 품위를 유지했다.

이비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래서 이비는 진즉에 깨달았다.

자신이 비천한 대신 유능하게 태어났다는 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이대로 버티면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는 것도.

이비는 축사에 떨어진 독수리 새끼였다.

비록 지금은 어리고 연약해 닭장을 장악한 가축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고난 자태가 드러날 것이다.

볼품없는 솜털 사이로 단단한 깃이 자라면 날개를 펼치는 것만으로 제압할 것이다. 자신을 겁 없이 쪼아 대던 것들을.

이건 단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합리적인 관측이었다. 어쩌면 예정된 미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비는 이걸 특별히 자랑스러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고독을 느끼며 궁금해할 뿐이었다.

왜 너와 내가 이렇게나 다른지를.

온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가 하필이면 나인 것도.

겉으로도 혼자인데 속으로도 혼자인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


‘추워.’

이비는 더 웅크리며 제 마른 다리를 끌어안았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댈 곳 하나 없지만 이비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단지 살아남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이 광활한 세계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럼 뭘 해야 할까.

이비는 그 답도 쉽게 찾아냈다.

우선은 증명해야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이비의 영혼에 달라붙은 추위와 의문을 멈출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
.
.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길이 유독 험해서 헤매고 또 헤매길 평생.

여전히 달리고 있는 이비 아리아테는 새까만 밤에 깔린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타고 있던 마차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그 바람에 어딘가 머리를 부딪혔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 안락한 의식불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목을 조이는 다정한 손길이 이비를 다급히 깨웠기 때문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짙게 깔린 어둠과 흐르는 피로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이비는 제 목을 조르는 게 누군지 곧장 깨달았다.

이비는 이 손의 온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손은 이비를 망가트리지 않고 죽이려는 듯 천천히 기도를 압박해 왔다.

정신을 차린 이비는 반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자 목을 조이는 손이 놀란 듯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부드러운 한탄이 되돌아왔다.


“왜 깼어요, 괴롭게.”

마치 자다 일어나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아프지 않게 할게요.”

그 친절한 광인이 다시 숨을 조이며 사과했다. 이어진 변명엔 미련마저 담겨 있었다.


“나도 아쉬워요. 더 천천히 죽이고 싶지만, 반칙패가 나와서 여유를 부릴 틈이 없거든요. 너한테 여유라니 가당치도 않고요.”

그는 확실히 진심이었고, 이비에게 그를 뿌리칠 완력은 없었다.

대신 어떻게든 활로를 여는 그야말로 반칙 같은 능력이 있어서, 이비는 혼미한 정신을 다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곤 유비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둘이 되는 건 아예 다른 일이야. 그러려면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혼자 남아야 해. 그건 영원한 단절이야.

―이 세상 모든 것과 자신을 끊어 낸 거야. 그건 죽음보다 비참한 일이야.

그사이 죽음이 한층 더 가까워졌지만, 또 한 번 필요한 기억을 찾았다.


―신께서 그걸 바라시니까.

―원래는 조용히 죽이려고 했어요. 그다음 시체나 훔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망가져서 쓸모없어지면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요.

엔테가 투기장에서 한 말을 곱씹는 사이, 기어이 당도한 죽음이 숨결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비는 흔들리지 않고 연결했다. 침착하게, 또한 치열하게.

이윽고 몇 가지 단서가 선으로 이어졌을 때, 이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말했다.


“죽이지 않아도 돼.”

자신이 찾아낸 이 순간의 정답을.


“내가, 널…….”

이비가 한 글자씩 꺼낸 말이 문장을 이루자, 엔테가 움찔하며 멈췄다.

그는 놀란 얼굴로 의심하듯, 혹은 망설이듯 이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비는 한 번 더 속삭였다.

그 순간 엔테의 손에서 힘이 풀렸고, 이비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비는 숨을 몰아쉬며 굳어 선 엔테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그에게서 살의가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억지로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았다.

성녀 발탁식을 엿새 앞둔 날의 자정, 이비가 납치되던 때의 일이었다.

***

그렇게 또 살아남은 이비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인생…….’

자정에 졸도한 이비는 아침까지 꿀잠을 자고 아주 상쾌하게 깨어났다.

그 상태로 여기가 어딘지 헤아리기도 전에 생각했다.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냐고.’

라우렐 놈을 피해 도망치다가 엔테 놈에게 붙잡히다니.

마냐냐 님, 마냐냐 님. 이거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호수 밑바닥에서 쿨쿨 잠만 자는 커다란 용 님, 대답 좀 해 보세요.

이비 아리아테의 인생에서 시련은 언제쯤 추방될까요?

네? 하늘은 이겨 낼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요?

이 용이 미쳤나 봐, 정말.

그건 살아남은 인간들이 자기 자랑하려고 만든 말이잖아요.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이러기예요?

시온 라우렐 진짜 죽어 버려!

이비는 곱게 누워 영혼에 축적된 울분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사원?’

이비의 주위에 가득한 것은 햇살을 담뿍 받는 새하얀 대리석 기둥과 우거진 녹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꽤 중요한 곳인지, 기둥도 바닥도 무척이나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장엄하다기보다는 어딘지 숙연했다. 기둥마다 이끼와 넝쿨이 덮여 있어 방치된 세월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 설마 북부인가?’

이비가 알기로 이런 유적이 있는 곳은 비스의 북부뿐이다.

이비는 티엔다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허공을 보고 흠칫 얼어붙었다.

새하얗고 반투명한 조각들이 허공에서 끄덕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노체의 저주……? 그믐도 아닌데, 아니, 한낮인데 어떻게?’

먼지처럼 떠다니는 그 뼛조각들은 모로 보나 노체의 저주였다.

저주와 갑자기 맞닥트린 이비는 놀라서 숨을 멈췄다. 그 상태로 숨거나 도망칠 곳을 급히 찾았다.


“깼으면 나오세요.”

그때 마침 사원 밖에서 청년의 미성이 들려왔다.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그래서 이비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말세다, 진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놈이 안전을 입에 담다니.

엔테의 목소리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비는 애써 마음을 다스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보니 이비가 누워 있던 곳은 사원 한가운데 놓인 단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모시는 곳 같았다.

이비는 천이 도톰하게 깔린 단을 살펴보고, 자신의 이마에 붕대가 감긴 것까지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기둥 너머로 엔테를 발견했다.

그는 사원 밖의 녹음을 밟고 서 있었다.

무거운 망토와 신발을 벗은 그는 이비의 생각보다 더 희고 가늘었다.

모르고 본다면 그저 예쁘고 가녀린 소년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토록 무방비한 모습으로 두 손을 허공에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리는 햇살을 손에 담아 가려는 것도 같고, 춤을 추다가 영영 멈춰 버린 것도 같고, 신의 계시를 구하는 것도 같았다.

이비는 그 기이한 모습을 의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러다 또 한 번 놀랐다.

자세히 보니 빛 때문에 더 투명해진 노체의 저주가 엔테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위험한 놈과 위험한 것이 한데 얽힌 광경에 이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엔테가 맴도는 저주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여긴 달이 묻힌 곳이에요.”

“……달이 묻힌 곳이라니?”

“노체가 죽고 먹힌 곳이요. 여기는 노체의 무덤이에요.”

이비가 애써 태연히 되묻자 엔테는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움직여 사원의 입구를 가리켰다.

이비는 주저하며 그 시선을 쫓아갔다.

그러곤 또 한 번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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