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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개인지 이리인지 (104/129)


104화. 개인지 이리인지
2023.05.29.



“큰 의미는 없어. 그냥 네가 눈에 띈 거야.”

차가운 얼굴을 한 여자는 남의 인생에 함부로 발을 들여 놓고 그냥이라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주웠어도 끝까지 돌봐 줄 테니까.”

그래서 시온은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은커녕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비 아리아테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선한지 악한지.

상냥한지 잔혹한지, 혹은 진심인지 장난인지.

그리고 아름다운지 가증스러운지조차도.

시온은 무엇도 알아내지 못한 채, 수치스러울 만큼 초라한 심경으로 그 여자의 폭력적인 자비와 마주해야 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있나?”

말문이 막힌 시온에게 이비가 무심히 물었다.


“없다면 고민해 봐.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을 나이잖아, 열일곱 살인 시온 라우렐 군.”

마치 후견인처럼, 혹은 누나처럼 굴면서도 그 여자의 얼굴은 여상히 차가웠다.

그래서 시온은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여자에게 구원받은 기분 따윈 느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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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시온은 안팎으로 얌전해졌다.

하지만 그건 폐허에 찾아온 고요에 가까웠다.

저주가 풀리며 시온 라우렐의 세상은 꼼꼼히 파탄 났다.

하지만 가련한 꼭두각시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몸부림쳤고, 이비 아리아테는 그 너덜 대는 남자의 한 조각 정체성마저 친히 부숴 주었다.

너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는 한마디로 말이다.

그 말은 언제나 특별하던 자의 긍지와 자존심, 그리고 존재 이유마저 산산이 깨부쉈다.

덕분에 자신이 특별하지 않은 걸 알아 버린 자는 지독히 허망해졌지만, 그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허공에 대고 물을 이유는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시온은 괴로워하는 대신 멍하니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시온의 모습은 저주에 걸렸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따금 으르렁댄다는 점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나직이 윽박지르는 시온의 눈동자에 새파란 살기가 맺혔다.

하지만 그 여자는 표정의 변화도 목소리의 고저도 없이 대답했다.


“휴식과 취미.”

그 여자, 이비 아리아테는 그렇게 말하며 빗질을 계속했다. 시온의 긴 머리카락에 대고.


“처음 봤을 때부터 빗겨 보고 싶었어.”

여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중얼대며 길이가 제각각인 시온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빗었다.

별안간 머리를 맡기게 된 시온은 소파에 앉은 채 으득 이를 갈았다.

벗어나고 싶은데 반항할 수가 없었다. 저주를 푸는 대가로 목줄을 걸었다더니, 저 여자가 명령하면 시온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지금도 ‘얌전히 있어’라는 말에 꼼짝도 못 하는 신세였다.

여자는 시온의 등 뒤에서 그의 머리를 차분히 빗겨 댔고, 시온은 장모종의 대형견이 된 기분을 참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인내는 더 가혹한 현실로 되돌아왔다.


“예쁘네.”

이비 아리아테는 곱게 빗은 시온의 머리카락을 친히 땋아 리본까지 달아 주었다.

저 싸늘한 여자의 소지품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이 순간을 위해 따로 준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한 귀엽고 하늘하늘한 리본이었다.


“이거 오늘 저녁까지 풀지 마.”

심지어 여자는 이렇게 가혹한 말을 남긴 채 돌아섰다.

결국 시온은 여자가 떠나고 혼자 남은 후에도 그 예쁜 모습을 몇 시간 동안 견뎌야 했다.

대신 밤이 되자 자신의 긴 머리를 썩둑 잘라 버렸다.

그건 명백한 거부이자 저항이었고, 받아들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선 도전 내지 위협이 될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비 아리아테는 그의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을 보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너 정말 귀여운 구석이 하나도 없구나.”

다만 이렇게 말하며 시온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귀여워해 주는 게 주인의 아량이겠지.”

여자는 시온의 베인 머리카락을 손수 다듬더니, 그 짧은 머리도 꾸역꾸역 묶어 버렸다. 시온이 질색하다 못해 혐오감을 드러내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여자는 쭉 그런 식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나?”

“혼자 있는 게 지루하지 않나 본데, 원래 성격인가?”

“내일 몬트라 후작 가에서 마차 한 대 분량의 기록물을 가져올 거야. 네가 저주에 걸린 사이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으면 읽어 봐.”

여자는 항상 바빠 보였지만 매일 시온을 찾아왔다. 그러곤 차가운 얼굴로 쓸데없이 말을 걸었다.

그 여자가 없으면 시온은 완벽히 고독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그 여자가 고맙기보다는 거슬렸다.

시온은 여자가 자길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우월감과 만족감을 채우는 중이거나.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쁜 여자라고 단정 지으며 외면했다.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 자기가 모르는 사이 뒤집힌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폐위된 왕의 마지막 아집이었다.

그는 왕자로 태어났고, 태어난 순간부터 위대한 역할을 부여받았었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날 빼고도 잘만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그에겐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 그래서 살아갈 의미를 직접 찾아야 한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걸 뒤늦게 이해했지만 여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외면하기로 했다.

우직하다면 우직하고 비겁하다면 비겁한 태도지만, 폐위된 시온은 이렇게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비 아리아테는 그를 잊지 않고 매일 찾아왔다.

여기에 한 여자의 방문이 더해져, 시온의 완고함은 다시 틀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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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 탑에 들어오고 달이 한 번 차고 기울었다.

그즈음, 이비 아리아테 외엔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그의 방에 독버섯 같은 여자가 찾아왔다.


“오랜만이네요, 백작.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시온에게 인사를 건넨 여자는 무채색을 이루는 이비와 달리 화사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마가 그의 쇄골 밑에 닿는 이비보다 키는 한 뼘 더 컸고, 어깨도 반 뼘은 더 넓었다.

이비에겐 체취가 거의 없지만 그 여자는 몇 걸음 밖에서도 독한 향기를 풍겼다.

이비 아리아테는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데, 그 여자는 잘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형태만 천진할 뿐 순수함이라곤 없었다.

군림하는 자의 눈을 가진 여자였다. 동시에 시온이 익히 아는 여자이기도 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로히카 세드로. 마냐냐 탑의 영원한 주인이었다.


“어라, 저주가 풀린 게 맞나?”

시온이 로히카를 보고도 반응하지 않자, 발랄하게 인사했던 로히카가 고개를 갸웃대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시온에게로 손을 뻗었다.

로히카의 손이 시온의 얼굴로 곧장 다가왔다. 시온은 그 손이 자신의 턱에 닿기 전에 쳐냈고, 그에게 뿌리쳐진 로히카는 더 진하게 웃었다.


“이상하네, 내가 기억하는 백작은 아주 정중했는데.”

그 백작에겐 함부로 손을 뻗는 자가 없었으니까.

시온은 이 말을 목 안에 삼키며 로히카를 노려봤다. 그러자 로히카가 애교스럽게 두 손을 들고 물러났다.


“아, 눈빛을 보니 깨어 있는 게 맞네요. 실례했어요, 백작.”

로히카가 순순히 물러났고, 그 사이 시온은 문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비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이 여자 혼자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시온은 로히카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불쾌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채 유지되던 그의 심기가 날카롭게 일그러진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이비 아리아테 외의 존재가 여기 발을 들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게 하필 과거부터 알고 지낸 저 여자라는 것이었다.


“깨어난 소감이 어때요? 세상이 낯설지는 않아요? 아하하, 아무래도 백작은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서운해라.”

원래 시온은 로히카에게 특별한 악감정 따위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묻는 로히카에게 날을 세우는 건 아직 제 처지를 수치스러워하는 시온의 문제였다.


“아무렴 그렇게 불청객 보듯이 하진 말아 줄래요? 엄밀히 말하면 불청객은 백작이잖아. 내 탑에 백작을 들인 게 얼마나 큰 선처인지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후 생긴 혐오감은 명백히 로히카 세드로의 탓이다.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쓸모가 다해 퇴물이 된 라우렐 백작, 하지만 아무도 저주를 풀어 주자는 얘긴 안 했지. 별수 있나? 무서운걸.”

로히카가 명랑하게 말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허락도 없이 시온의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그 애가 이것저것 줍는 걸 좋아하니 다행이죠. 라우렐 백작 정도 되는 걸 주워다 기를 능력이 있는 것도 무척 다행이고.”

로히카의 발언과 접근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시온의 귀에 ‘그 애’라는 말이 박히 듯 들어왔다. 그건 분명 이비 아리아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우리 이비가 기르고 싶다기에 특별히 집에 들여 준 건데 이렇게나 버릇이 없어서야. 말 안 듣는 개를 키우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야?”

로히카가 진하게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러더니 악랄하게 지껄였다.


“물론 이해는 해요. 백작도 한때는 고고했으니까. 이 멍멍이 꼴이 괴롭긴 할 거야, 나라면 혀 깨물고 죽었을지도.”

그 맥락 없는 멸시에 시온은 잠시 생각했다.

로히카 세드로도 이비 아리아테처럼 나를 굴복시키는 게 가능할까?

그럴 확률이 높다. 여기 혼자 들어와서 쓸데없이 도발하는 걸 보면.

하지만 상관없을 것 같다.

입을 열기 전에 턱을 부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화풀이.

해 볼까.


“안타까우니까 내가 좋은 걸 알려 줄게요.”

시온이 로히카에게 손을 뻗을지 말지 조용히 궁리할 때였다.

시온을 즐겁게 모욕하던 로히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비가 널 지배하는 저주, 풀고 싶지?”

시온은 저도 모르게 로히카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로히카가 가늘게 웃었다.


“그거, 이비를 죽이면 돼.”

여자의 목소리가 낮고 달콤했다. 그게 진심인지 농담인지는 좀처럼 구별되지 않았다. 이 탑의 여자들에겐 속내를 새카맣게 숨기는 지독한 습성이 있었다.


“어렵지 않을 거야. 명령하기 전에 목을 조르면.”

로히카가 시온의 손을 잡더니 그 손을 친히 이끌어 자신의 목에 걸었다.


“자, 이렇게.”

시온의 손에 들어온 로히카의 목은 생각보다 가늘었다. 그렇다면 이비 아리아테의 목은 더 연약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너는 꼬리치는 개도 못 되잖아. 그럼 차라리 물어뜯어 버려.”

한 여자의 목을 손에 쥐고 다른 여자의 목을 가늠하는 시온에게, 로히카가 그것을 꺾으라 종용했다.

시온은 이 수상한 짓거리에 신물을 느끼고 손을 떼려 했다. 그런데 로히카가 억센 힘으로 그를 붙잡고 묘하게 웃었다.


“언제까지 꼭두각시로 살 거야, 한 번쯤은 제 앞길을 스스로 정해야지. 기껏 아비의 성까지 쳐들어가서 아무것도 못 한 거 부끄럽지 않아? 이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아.”

듣다 못한 시온이 손끝을 움켜쥐었다.

손안에서 무언가가 우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에게 인간의 뼈와 근육은 덧없게 느껴질 정도로 물렀다. 마음만 먹으면 손끝으로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먹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이제 특별하지 않은 시온 라우렐이니까.

목이 졸린 로히카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징그러운 속삭임도 마찬가지였다.


“응, 잘하네.”

로히카의 칭찬에, 시온은 환멸을 느끼며 로히카의 목을 뿌리쳤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자가 목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이 일순 가여워 보였으나 착각이었다.

금세 호흡을 가라앉히고 일어난 로히카는, 처음 시온을 찾아왔을 때보다 더 해맑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자, 그럼 난 분명히 알려 줬어요.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

그때 로히카의 음성은 아이에게 당부하듯 자상했다.

그런 목소리로 로히카가 시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개인지 이리인지 알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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