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진 (45/129)


45화.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진
2022.11.03.


이비가 카셀 몬트라의 꿍꿍이를 알기 위해 비밀통로에 막 발을 들였을 때였다.


“후작이 이비 아리아테 대신 리오 투하를 지지하겠다고 합니다.”

같은 시각, 시온은 자신의 방에서 이비 보다 먼저 이비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투하 공에겐 로블레 투하를 설득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규율을 어기고 질서를 해치는 자를 성녀로 추대하는 건 옳지 않으니, 정통성과 자질을 갖춘 리오 투하를 함께 지지해 달라고 말입니다.”

모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 분 전, 모렌은 시온의 명령으로 카셀의 방에 다녀왔다.

이때 각하께선 두 가지를 지시했다.

하나는 카셀이 감시자의 제복을 한 번만 더 등한시하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를 거라고 친절히 전달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비가 카셀의 방에 방문할 때까지 대기하다가 카셀 몬트라가 허튼 짓거리를 못 하게 막으라는 것이었다.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모렌은 이 지시를 받고 굉장히 들떴다.

쌀쌀맞은 우리 각하가 달라지셨다.

부하의 체면을 손수 챙기다니, 한 소녀를 이토록 살뜰히 보살피다니.

우리 각하께 마음이 생겼나 봐,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봐, 하며 모렌은 혼자 들떠서 카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카셀 몬트라를 보는 순간 모렌의 즐거움은 순식간에 메말랐다. 그자의 한결같은 쓰레기다움 때문이었다.

카셀은 모렌이 라우렐의 명령으로 여기 온 걸 알자마자 대단히 친절하게 행동했다. 위협에 가까운 경고를 받았지만, 백작님의 말씀이라면 그마저도 황송하다는 투였다.

이것만으로도 기가 차고 아니꼬운데, 뒤이어 투하 가의 사람들이 방문하며 모렌은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카셀은 투하 공을 향해 야비하게 웃더니, 역시 성녀는 투하의 딸들에게 어울린다며 입을 털어 댔다. 그러면서 이비 대신 현 성녀의 동생을 차기 성녀로 지지하겠다고 대뜸 지껄였다.

그 말에 투하 가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떤 건 당연하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반가워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 앞에서 카셀은 저가 대단한 은혜를 베푼 양 거만을 떨었다.

그래 놓고 당사자인 이비 아리아테가 방문했을 때는 오히려 입을 처닫았다.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어린 아가씨를 희롱하며 저들끼리 낄낄댔다.

그걸 다 지켜본 모렌은 기껏 좋았던 기분이 몹시 저조해졌다.

물론 차기 성녀를 선택하는 건 대귀족의 고유 권한이다. 또 그가 이비 아리아테를 지지하지 않기로 한 이유엔 모렌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카셀의 태도는 지나치게 저급했다. 인간이 염치가 있다면 이비 아리아테를 그딴 식으로 가지고 놀지는 말아야 했다.


“후작이 이비 아리아테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귀에 들어갈 텐데, 나중에 알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

모렌은 시온이 격노하길 바라며 카셀의 작태를 세세히 보고했다.

그러나 시온은 모렌이 기대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끝인가?”

“네, 이상입니다.”

“그럼 나가서 대기하도록.”

시온은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었고, 그래서 모렌은 몇 마디 덧붙이려다가 결국 입을 닫고 돌아섰다.

그리고 시온은 모렌을 내쫓자마자 천장 쪽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위에서 삐걱 하고 작은 소리가 울렸다. 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모렌이 보고를 거의 마쳤을 무렵이었다.

평소라면 그저 위층의 소음이라 생각하고 넘길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시온은 이 바로 위에 비밀통로가 나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소리를 듣자마자 모렌을 내보냈다.


‘이비 아리아테인가?’

혹여나 이비가 자신을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가 위에서 작은 기별이라도 보내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째선지 위에서 나던 삐걱대는 소리, 그러니까 무릎으로 기는 소리가 멈추고도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숨어들었을 가능성을 떠올렸고, 더 지체하지 않고 비밀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그러자 천장에서 한 소녀가 덜컥 떨어졌다. 뜻밖에도 그건 이비가 맞았다.

시온은 이비를 보고 곧장 팔을 뻗어 받았다. 그러곤 제 품으로 떨어진 이비를 향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안 내려오고 거기서…….”

아니, 물으려다가 이비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이비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넋이 반쯤 나가서 시온을 쳐다보지도, 그에게 안긴 상황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짐짓 당황했다.

평소의 이비라면 그의 팔에 안착하자마자 자신이 왜 천장에서 떨어져야 했는지 냉큼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비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궁지에 몰린 작은 동물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얕은 호흡만 이어 갔다.

시온은 이비와 이비가 떨어진 천장을 번갈아 보다가, 상황을 깨닫고 나직이 물었다.


“몬트라 후작 쪽을 염탐하러 온 겁니까?”

“네, 어쩐지 후작의 분위기가 이상해서요.”

이비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시온은 이게 이비의 의지가 아니라 저주가 끄집어낸 대답인 걸 확신했다.

한숨을 삼킨 시온은 이비를 안고 소파로 걸어갔다. 이비는 그 와중에도 얌전히 안겨만 있었다.

시온은 이비를 소파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러곤 옆에 앉지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은 채, 소파에 팔을 짚고 이비의 안색을 살폈다.

그제야 이비가 눈을 들어 시온을 바라보았다. 이비는 멍한 얼굴로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미 아시는군요.”

“조금 전 부관에게 들었습니다.”

시온은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이비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시온은 자신의 대답이 안 그래도 너덜너덜한 이비의 마음을 또 한 번 짓밟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비의 두 눈이 위태롭게 떨리는 것은 알아채고 물었다.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

이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곤 오히려 자기가 한 말에 놀란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도 안 괜찮아.”

이비는 말하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결국 이비를 벼랑 아래로 떠밀었다.

이비가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며 중얼댔다. 아니, 신음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괜찮지 않았어.

이비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연이어 들이마신 숨이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비는 숨을 내쉬지 못하고 연신 들이키기만 했다. 시온은 이비가 숨을 잘 못 쉬는 걸 알고 이비의 어깨를 잡았다.


“손대지 마…….”

하지만 이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몸을 앞으로 기울여 참견을 거부했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희미한 호흡이 더 흐려졌고, 결국 시온은 덧없이 저항하는 이비를 일으켜 세웠다.

그와 함께 미약하게 버둥대던 이비가 축 늘어졌다.

이비는 앞에 놓인 시온의 어깨에 이마를 떨어트렸고, 시온은 이비의 뺨을 잠시 들어 올렸다가 곧장 자신의 부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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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렌이 신속하게 군의관을 불러왔다.

그리고 감시자의 제복을 입은 군의관은 총사령관의 침대에 누운 소녀를 정중히 살펴보았다.

한참 후 그가 신중히 내놓은 결론은 과로로 인한 탈진이었다. 아직 젊고 건강한 숙녀여서 며칠만 잘 쉬면 나을 거라고도 했다.

그래서 시온의 분노는 애꿎은 곳으로 번졌다.


‘집사라는 인간이 이런 것도 안 챙기고 뭘 한 거야?’

종일 붙어 다녔으면서 애가 쓰러질 때까지 방치하다니.

시온은 이비의 거슬리는 집사를 떠올리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비는 여전히 시온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근대는 숨소리로 보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시온은 침대 옆에 앉아 이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과로라니, 딱히 놀랍지는 않다.

근래 이비 아리아테의 삶은 매우 다사다난했다.

저주에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시온과 대차게 얽혔고 티엔다와 비스를 바쁘게 오갔다.

징계를 받을 뻔도 했고, 마냐냐의 가호도 연이어 사용하기도 했고, 등꽃제에 참여해서는 내리 긴장 상태였다.

이 와중에 배신까지 당했으니, 진력이 다해 쓰러질 만도 하다.

군의관은 며칠 쉬면 된다고 했지만, 시온은 이 상황이 영 답답했다.

이게 연민인지 가책인지 아니면 깊은 곳에 처박아 둔 그 남자의 유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전부 다일지도 모른다.

원인이야 어쨌든 시온은 심기가 심히 불편했다.

시온은 이비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이비에게 성녀가 되는 것만 포기하면 뭐든 다 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비는 시온이 아니라 진창을 택했고, 시온은 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골치가 아파 왔다.

물론 이건 시온의 불찰이다.

저주가 걸림돌 역할을 했다고는 하나, 시온은 제안에 앞서 이비를 충분히 설득하지 않았다.

본인에게 걸린 은폐의 저주로 상황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했고, 이비에게 걸린 폭로의 저주로 이비가 바보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결과로 납득시키려고 밀어붙였다.

만약 설득이 어려우면 신뢰라도 쌓아야 했는데 그는 이마저도 피했다.

이비 아리아테는 단지 청산해야 할 빚이라고 수백 번 되뇌면서, 이렇게 선을 긋지 않으면 순식간에 잠식될 것 같아서 일부러 거리를 뒀다.

덕분에 상황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비 아리아테가 눈앞에서 넘어지고 다치는 걸 머저리처럼 구경만 하는 신세라니.

그 남자가 마구 닦달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온은 기분이 바닥을 치는 걸 느끼며, 곤히 잠든 이비를 얼마간 더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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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가 깨어난 건 밤이 다 되어서였다.

눈을 뜬 이비는 커다란 침실에 혼자였고 주변은 어두웠다.

이비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습니까?”

백작의 목소리였다. 이비가 작게 대답하자 백작이 다시 말했다.


“식사하려면 나오십시오. 피곤하면 더 자도 되고.”

여전히 못되게 정중한 말투였다.

이비는 입맛도 없고 더 자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문가에 서 있던 백작과, 그의 등 뒤로 넓은 응접실이 보였다.

응접실엔 백작밖에 없었다. 원래는 시온이 침실을 쓰고 감시자들이 이 응접실에서 호위를 서지만, 이비가 침실을 차지하는 바람에 다들 한 칸씩 밖으로 밀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비는 우선 백작이 가리키는 대로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엔 작은 화로와 그 위에서 따끈하게 데워지는 수프와 빵 따위가 있었다.


“과로였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당신이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다행이네요.”

시온의 설명에 이비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 모습이 아직 덜 깬 것 같기도 하고, 쓰러지기 직전의 충격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시온이 이비의 안색을 살피는데, 이비는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연회는 시작했나요?”

“네, 두 시간쯤 전에.”

두 시간 전이면 당장 준비해도 늦겠구나.

이비가 허탈하게 생각하는데, 문득 카셀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대신 이따 안 예쁘면 이비를 혼내야지.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또 한 번 이비를 덮쳤다.


“흑…….”

거칠게 밀려드는 감정에 이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숨죽여 신음했다.

그 소리를 들은 시온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래서 설마 하며 쳐다보는데, 이비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흐윽…….”

이비가 어깨를 떠는 걸 보고 시온은 곧장 테이블을 돌아 이비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비가 손대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아무것도 못 하고 도로 굳어버렸다.

그가 주춤대는 사이 이비의 어깨가 더 서럽게 흔들렸다.

시온은 곤혹스러워하다가, 보다 못해 결국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이비에게 닿기 직전, 이비의 흐느낌이 돌연 음산해졌다.


“흑, 흐흐흑, 후후훗…….”

‘……뭐지?’

이비가 우는 줄 알고 당황했던 시온은, 그 소리가 웃음소리로 들리기 시작하자 어쩐지 오싹해졌다.


 
이비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더니 돌연 상쾌한 목소리로 시온을 불렀다.


“백작님.”

다시 고개를 든 이비의 얼굴은 물기 하나 없이 말끔했다. 더군다나 입가엔 미소도 예쁘게 걸려 있었다.

시온이 이비의 상태를 따라가지 못해 굳어 있자, 이비가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종이와 펜을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 예쁜 것과 고운 것은 겉으로 드러낸 미소와 목소리뿐, 그때 이비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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