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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작고 가련한 동물은 (46/129)


46화. 작고 가련한 동물은
2022.11.07.


이때만 해도 카셀은 기분이 좋았다.


“백작님께선 역시 안 나오실 모양이네.”

라우렐 백작이 저녁 연회에 불참하며 등나무 밑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 그분도 노골적이야. 안 그래?”

카셀은 기분 좋은 얼굴로 와인 잔을 기울였다.

계속 이비를 지켜보던 그 백작님은 이비가 연회장에 나오지 않자 어김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카셀은 그 무시무시한 백작님의 지고지순함이 내심 웃겼다.

그리고 그 백작을 쥐락펴락하는 게 제 귀여운 강아지라는 점도 상당히 즐거웠다.


“그나저나 이비는 어딜 갔을까? 예쁘게 하고 온다더니.”

“들었겠지, 지금쯤이면.”

카셀이 이비를 찾자, 옆에서 퉁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카셀은 오늘 오전부터 리오를 성녀로 추대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니 이비도 아마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 이비를 찾는 카셀의 뻔뻔함에 친구가 질린 듯 대꾸했지만, 카셀은 반성 없이 키득댔다.


“설마 혼자 우는 건 아니겠지? 괜히 마음 아프게.”

카셀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며 남아 있던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카셀은 이비를 꽤 좋아했다.

티엔다의 콧대 높은 영애들과 달리 작고 가련한 동물 같아서, 볼 때마다 장난을 치고 싶게 만드는 아이였다.

그래서 카셀은 이비 때문에 꽤 들떠 있었다.

마냥 순종적인 그 애가 자기가 버림받은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너무 궁금했다.

아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상한 티를 내며 날 피해 다니겠지? 그럼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것도 재미있겠다.

의외로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찾아와 먼저 보챌지도 모르겠다. 그럼 주제 파악을 할 수 있게 하나하나 잘 일러 줘야지.

어느 쪽이든 너무 귀여울 것 같아서, 카셀은 다른 성녀를 지지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더 만족스러워졌다.

카셀이 그렇게 한껏 기분을 내고 있을 때였다.


“카셀!”

갑자기 고성이 울리더니 웬 남자가 카셀에게 달려들었다. 카셀의 친구들이 막지 않았다면 당장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너 솔직히 말해.”

그렇게 윽박지르는 남자는 카셀의 외가 쪽 사촌 동생이었다.

그 녀석이 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말했다.


“내 약혼을 깬 거, 네 짓이야?”

사촌의 물음에 늘 싱글벙글 휘어 있던 카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지?’

사촌의 말대로 카셀은 그의 사랑을 몰래 지르밟은 적이 있다.

기껏 하나 있는 사촌이 한미한 집안의 딸내미와 결혼한다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카셀은 기왕이면 든든한 친척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작년 일이고 뒤처리도 깨끗이 해 놨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릴 듣고 저러지?

카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대답하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래서 카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꽤 취했네. 뭣들 합니까? 내 사촌이 더 실수하기 전에 어서 방으로 모셔요.”

카셀은 시치미를 떼며 고갯짓했고, 곧 사람들이 그의 사촌을 질질 끌고 갔다.


‘말이 어디서 샜지?’

그리고 카셀은 고개를 갸웃댈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그 시답잖은 소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세 여인이 찾아왔다.


“카셀, 잠시 얘기 좀 해요.”

그들은 더 이상 카셀 몬트라에게 말을 걸 리 없는, 아주 잔혹하게 결별한 옛 연인들이었다.

카셀은 적잖이 놀라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셋이 같이 다니는 조합이었어?”

“적어도 못 볼 사이는 아니었죠.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나눠 보니 우리가 큰 오해를 하고 있더군요.”

“어떤 오해인지는 굳이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데, 후작님께서 해명해 주시겠어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세 여자가 냉랭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카셀은 뭘 해명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걸 따지러 온 거지?’

이 영애를 만나는 동안 저 영애를 함께 만난 걸 알았나?

저 영애를 꼬시려고 그 영애가 바람피웠다고 거짓말한 걸 들켰나?

그 영애가 들러붙을 것 같아서 이 영애에게 다시 만나자고 한 게 걸렸나?

카셀은 자신의 옛 여인들이 뭘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얼굴로 친구들을 쳐다봤지만, 뭐든 얻어먹으려고 카셀에게 충성하는 그들도 이번만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글쎄, 옛날 일이라 기억이 잘…….”

결국 카셀이 웃으며 얼버무리자, 그의 얼굴로 와인이 쏟아졌다.

촤악, 청량한 소리와 함께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자 카셀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사이 그에게 술을 끼얹은 여인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짓씹었다.


“사람을 셋이나 농락해 놓고 기억 안 난다니, 그런 기억력으로 대 몬트라 후작 가의 가업을 잘도 이끄시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세 여인은 냉랭히 돌아섰다.

카셀은 제 앞머리를 타고 붉은 술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걸 가만히 보다가, 옆에서 손수건을 건네는 손길에 억지로 웃었다.


“하, 오늘 무슨 날인가?”

카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늘어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친구들도 그의 굴욕을 외면하며 일부러 웃음을 터트렸다.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해야지.”

“숙녀 셋에게 매도당하다니,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에요.”

카셀은 무리와 낄낄대며 무안한 기분을 겨우 떨쳤다.

하지만 이미 이목이 쏠린 탓에 여기 더 머물기는 불편해 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홀에서 다시 먹고 마시며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카셀의 손에 모처럼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였다.


“후작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 찾아온 사람은 베르데 자작이었다.

그는 카셀과 사업으로 연결된 인물이었고, 카셀은 잠시 카드를 내려놓고 친구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따로 날을 잡아서 할 이야기지만,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경우 없이 굴었습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무섭게 구십니까?”

카셀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평소 베르데 자작은 온화한 노인이었다.


“후작님께서 서쪽 산맥의 야생마들을 잡아서 길들여 보겠다고 하여 제 영토에 있는 산을 빌려 드렸지요. 혹시 그때 그 인근 주민들을 야생마 포획에 강제로 동원하셨습니까?”

제길. 카셀은 몰래 욕지기를 삼켰다. 그러곤 최대한 선량한 얼굴로 되물었다.


“강제 동원이라니, 금시초문인데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이상한 소문이 들려 원인을 찾는 중이었는데, 금시초문이시라니 그 말이 사실이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시켜 확인할 테니 곧 결과가 나오겠지요.”

베르데 자작의 목소리는 끝까지 정중했다. 하지만 덧붙인 내용은 살벌했다.


“의혹이 풀릴 때까지 제 영토에서 하시던 일은 모두 보류하겠습니다.”

“아니, 자작.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무슨 소릴 들었기에 가문의 연까지 끊을 것처럼 구십니까? 너무 흥분하신 것 같은데 다시 날을 잡아 이야기하시지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카셀이 베르데 자작을 황급히 붙들었다.

그러자 돌아서던 베르데 자작이 걸음을 멈추고 참 딱하다는 듯 말했다.


“선대 후작님과의 의리를 생각해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그간 노인들이 후작님의 행보에 토를 달지 않은 건 몰라서가 아니라 참고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몬트라 후작 가는 티엔다비스의 재상입니다. 바옌이 군대를 통솔해 밑 대륙을 보호하는 것처럼 몬트라는 대륙의 살림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형편을 살피기는커녕 그깟 야생마가 뭐라고 남의 영토에서까지 폭정을 휘두르십니까?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차라리 상인이 되십시오.”

자작의 질타에 카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노인의 훈계가 뼈아파서가 아니라,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방금 그가 겪은 일은 전부 언젠가 터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연이어 몰아치는 건 이상하다.

카셀은 허랑방탕할 뿐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인 걸 확신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 와.”

카드를 치던 자리로 돌아온 카셀이 살벌하게 으르렁댔다.


“인간들이 왜 나한테 난리를 치는지 알아 오라고.”

카셀의 다그침에 그의 친구 서넛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동안 카셀은 카드를 집어던지고 와인만 연거푸 들이켰다. 하지만 조금도 취하지 못했다.

그사이 손님이 셋이나 더 다녀갔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카셀의 과오를 들추며 화를 냈다.

이로써 카셀을 찾아온 사람은 도합 여섯. 하지만 대귀족에게 직접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으니, 아마 불만이 생겼는데 조용히 삭이고 있는 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카셀은 시간이 지날수록 취하기는커녕 점점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옥의 입구에 선 기분으로 기다리길 한참, 카셀의 친구들이 하인 한 명을 데려왔다.


“이게 뭐야?”

“저, 전달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래서 거기 적힌 성함대로 전해드린 게 다입니다.”

카셀은 하인이 내민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편지처럼 곱게 접힌 그 종이 뒷면엔 받는 사람의 이름만 정갈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취인과 관련된 카셀의 만행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또한 이를 확인하려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지도 친절히 안내되어 있었다.

마치 카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보고 적은 듯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카셀은 본능적으로 제 친구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급히 고개를 저었고, 카셀은 다시 하인을 닦달했다.


“이거 누가 시켰어?”

“이비 아리아테 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이비?”

하인의 고발에 카셀의 분노는 오히려 사라졌다. 조금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 무지한 계집애가 이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카셀은 미심쩍어하며 손에 쥔 쪽지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단정한 필체를 알아보았다.

마치 그린 듯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그 글씨는 이비 아리아테의 글씨였다.

카셀은 그 종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있는 힘껏 술병을 던져 깨트렸다. 그러곤 테이블을 뒤집고 의자도 두어 개 집어던졌다.

와장창, 콰당탕, 우지끈.

품위를 지키기 위해 소리는 지르지 않고 점잖게 난장을 쳤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듯,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때 그의 친구들은 겁먹은 병아리처럼 구석에 서서 카셀의 횡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인은 이미 달아난 후였다.

카셀은 답답한 셔츠를 풀어헤치며 손을 까딱였다. 그 손짓에 눈치 빠른 친구가 구겨진 종이를 주워 카셀에게 건넸다.

카셀은 아리아테의 글씨가 새겨진 종이를 다시 물끄러미 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얘 진짜 웃기네.”

“정말 아리아테 짓일까?”

“이용당했겠지, 그 백치 같은 게.”

꼴에 앙심이라도 품었나, 그 틈에 접근한 놈에게 홀랑 넘어가 내 뒤통수를 쳤다. 이 머저리가 겁도 없이.

카셀은 의심조차 하지 않고 이렇게 단정 지었다. 그러곤 송곳니를 드러내며 잔인하게 웃었다.

화가 나서 돌아버릴 지경이지만, 이 한 입 거리 계집애 때문에 노발대발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카셀은 억지로 화를 눌러 담고, 여느 때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비를 만나러 가야겠네.”

만나서, 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걸 실컷 혼내 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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