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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벼랑 끝의 이비 (42/129)


42화. 벼랑 끝의 이비
2022.10.24.


어린 이비는 바닥에서 삐걱 대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발뒤꿈치를 들고 최선을 다해 살금살금 걸었다.

위험천만한 마룻바닥 구간을 지나 도톰한 카펫에 안착했지만,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이비는 오히려 조심하며 햇살로 가득 찬 방을 살그머니 가로질렀다.

창가 쪽 안락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검은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감춘 점성술사였다.

그는 아까까지만 해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 한쪽은 배 위에, 다른 한쪽은 다리 옆에 놓인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창문 틈으로 살랑대는 바람이 그의 무릎에 놓인 책을 마음대로 훔쳐 읽고 책장을 넘겼지만, 그는 바람이 하는 걸 마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잠든 거 맞지?

후드 사이로 보이는 점성술사의 입술이 평온히 닫혀 있었다.

그래서 어린 이비는 그가 잠든 걸 확신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러곤 사냥감을 노리는 고양잇과의 맹수처럼 사뭇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한 걸음, 두 걸음. 신중하게 거리를 좁힌 이비는 숨까지 참고 점성술사에게 손을 뻗었다.

이비의 작은 손이 점성술사의 어깨를 지나 비로소 그의 후드에 닿으려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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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다정한 손길이 이비의 손목을 휘감았다.

어느새 깨어난 점성술사가 이비를 부드럽게 제지했다. 그러자 이비는 나쁜 짓을 하려다 걸린 주제에 도리어 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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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거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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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잠깐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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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발소리 들렸어요?”

점성술사가 그저 웃자 이비는 에잇, 분을 내며 그의 안락의자를 마구 흔들었다.

이비의 횡포에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데도 점성술사는 손으로 제 후드를 붙잡고 실없이 웃기만 했다.

이로써 점성술사의 얼굴을 훔쳐보려던 이비의 시도는 네 번째 실패를 맞았다.

물론 이 네 번은 이번 달 들어 새로 센 것이고, 그간의 전적을 통틀어 말하려면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펴도 모자랐다.

이렇게나 실패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또 이렇게나 도전당했으면 화를 낼 만도 한데 이비와 점성술사는 한결같았다.

이비는 굴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노렸으며, 점성술사는 그런 이비를 혼내는 대신 무르게 웃었다.

점성술사를 괴롭히느라 지친 이비가 옆에 놓인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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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같이 산 지 2년이 다 됐는데 아직 얼굴도 안 보여 주는 건요. 언제까지 내외할 건데요?”

퍽 반항적인 목소리였지만 점성술사는 이 와중에도 웃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를 스산하게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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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마요, 이거 엄청 심각한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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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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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무슨 일이 생겨서 아저씨랑 헤어지게 되면 어떡해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내가 아저씨를 찾을 방법이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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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찾으면 되니까.”

점성술사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러자 힘껏 세워 둔 이비의 눈썹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화를 내던 이비는 그 말에 저항 없이 기뻐졌고, 그래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다가 뒤늦게 아차 싶어 도로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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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문제가 더 심각하죠. 내가 아저씨를 못 알아보면 어떡해요. ……웃지 말고 들어!”

이비가 다시 심각하게 말했지만 점성술사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비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중이었다.

점성술사는 이비가 정말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웃다가, 뒤늦게 달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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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걱정하지 마. 너도 분명 알아볼 거야.”

점성술사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다정했다.

그래서 이비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슴이 묵직하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뭐가 간지럽게 피어나는 것 같기도 해서, 멍하니 있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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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사가 왜 우냐고 물었지만 이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껏 세상은 이비에게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작은 연민은커녕 냉혹한 함정으로 가득해 하루를 살기 위해 하루 치의 기적을 바라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너무 미웠던 세상인데 당신을 만나서 이 세상마저 좋아졌다.

이비는 그게 너무 슬퍼서, 또 다행이라서 입술을 깨문 채 울었다.

다정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한참이나 울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은 너무 밉고 그리운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이비는 도로 차갑게 식은 세상을 이전보다 더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비는 달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멈추면 발밑이 무너져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비는 달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스스로를 채근하며 어떻게든 내달렸다.

그런데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희미한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언제까지 달려야 해? 나는 이제껏 쉬지 않고 달렸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달리고만 있는 거야?

괴로워. 하지만 견뎌야 해. 왜?

아, 맞아. 나는 성녀님이 될 거야.

그럼 그땐 쉴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둠 저편이 밝아왔다. 빛이 보였다. 드디어 이 길고 긴 어둠이 끝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비가 그 빛 가운데로 몸을 던지기 직전, 발밑이 쑥 꺼졌다.

정신 차려 보니 사방이 검고 질척한 늪이었다. 무겁고 끈적한 늪이 이비의 몸을 옭아맸고, 그 사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던 빛이 도로 멀어졌다.

안 돼, 기다려!

이비는 허우적대며 늪을 헤쳤다. 하지만 힘이 다 빠진 팔다리가 납덩어리처럼 무거워 좀처럼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던 이비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섭고 냉정한 어느 백작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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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안 어울립니다. 당신에게 성녀는, 전혀.

억장을 때리는 말에 이비는 이를 악물었다.

알아! 안 어울리는 거 나도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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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를 차지해 봤자 도리어 이용만 당할 뿐.

이용당하는 게 뭐 어때서, 이용이라도 당해야 사람 취급받는 신세인 걸 나더러 뭐 어쩌라고!

이비는 이를 악물며 그 악마 같은 목소리를 떨쳤다.

그러자 뒤이어 간드러진 목소리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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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되겠다고? 재미있네. 좋아요, 해 봐요.

탑주의 나긋한 조롱에 화를 내던 이비는 차라리 안심했다.

네, 해 볼게요.

내게 흥미를 거두지 말고 지켜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나는 이 무대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는 내게 이 밖은 나락이니까요.

분명 늪을 헤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비는 예쁜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 선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없었다. 다만 그들의 옷차림과 몸짓으로 그들이 귀족인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이비가 말하자 사람들이 화를 내며 돌아섰다.

이비는 그제야 자신이 저주에 걸린 걸 깨달았고, 그걸 깨닫는 순간 몸이 다시 바닥으로 쑥 가라앉았다.

그리고 귓가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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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날 만나러 온 거예요?

희고 거대한 뱀이 어느새 이비를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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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요, 잘 먹을게요.

그것이 입을 열었고, 이번엔 결국 삼켜졌다.

새하얀 침묵이 이비를 덮었다.

이비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이 보였다. 이비가 계속 달려야 하는 길인데 이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길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로 외줄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더 버텨 본들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일밖에 상상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성녀가 되려고 한 거짓말쟁이는 이제 거짓말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무덤 앞에 섰다.

결국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이비는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토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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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성녀님이 되면 되잖아.

그리고 이비는 꿈에서 깼다.

.
.
.

이비는 숨을 크게 마시며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이비는 그 고풍스러운 천장 장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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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리오 투하네 집이라서 그랬구나.’

악몽의 원인을 깨달은 이비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자 짙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른 새벽, 이비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아직 남아 있던 잠기운을 부드럽게 덜어갔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니 비로소 어둑한 하늘 아래 흐드러지게 핀 등꽃이 보였다.

이곳은 투하 가문의 별장, 오늘은 봄을 대표하는 등꽃제의 둘째 날이다.

봄은 마냐냐의 계절이다. 더러움을 정화하는 자애로운 마냐냐는 만물을 어루만지는 봄과도 닮았다.

그래서 대대로 성녀를 배출해 온 투하 가문도 봄을 각별히 여겨 정원을 이토록 아름답게 가꾸고 축제를 연다.

그리고 등꽃제의 둘째 날인 오늘은 현 성녀인 로블레 투하도 축제에 참여할 예정이다.

이비는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오늘의 일정을 되뇌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쁜 꽃밭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생각들도 머릿속을 떠다니기만 했다.

그래서 이비는 왜 이럴까 생각하다가, 자신의 마음이 잔뜩 꼬인 실타래처럼 엉망인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직 이른 새벽인데 이비의 기분은 이미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간밤에 꾼 뒤숭숭한 꿈 때문이기도 하고, 전날 몬트라 후작의 일 때문이기도 했다.

남이 보는 앞에선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이비는 어제 몬트라 후작의 행동이 심히 불쾌했다.

그리고 라우렐 백작이 그 일을 두고 화를 낼 때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백작과 후작의 행동은 아주 다르지만, 정작 이비는 그들에게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고 느꼈다.

한쪽은 다른 사람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이비를 장난감 취급했고, 다른 한쪽은 대신 화를 내며 이비를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어린애로 대했다.

둘 다 참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그 남자들에게 상냥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속도 없이.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두 번째 기회가 온다고 해도, 아마 이비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이비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이니까. 그건 조금 비굴해도 결과적으로는 영리하고 안전한 선택이 될 테니까.

귀족 세계의 평민 출신 성녀 후보라는 건 늑대 소굴에 사는 유일한 양과 같다.

그러니 늑대의 변덕에 휘말리지 않게 몸을 사릴 수밖에.

더럽고 치사하지만 이게 가장 유익한 선택이라고 되뇌며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그래서 이비는 늘 그랬듯 다시 힘껏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비는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려,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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