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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뚝 떨어지는 (43/129)


43화. 뚝 떨어지는
2022.10.27.


티엔다비스에서 성녀는 희망의 상징이자 신의 은총을 증명하는 존재이다.

첫 성녀의 등장은 약 300년 전.

반역의 용 노체가 티엔다비스를 반쯤 저며 놓아, 사람들이 비탄에 빠져 있을 때였다.

신의 가호가 정교하게 맞물리던 시절의 티엔다비스는 낙원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세계였다.

광활한 대지는 새벽의 보호를 받고, 아침마다 창공에서 맑은 물이 흘러 땅을 적셨다. 황혼이 내리면 대기가 세상을 어루만졌고, 또 밤에는 생명이 고요히 움텄다.

수몰을 피해 새롭게 창조된 세상은 그리도 완벽했다.

더욱이 그때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고대의 지식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롯이 남아, 비스 곳곳에서는 나라가 세워지고 문화가 꽃피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노체의 변절로 끝나고 말았다.

세상은 망가진 시계처럼 멈춘 채 용들이 쏟아 낸 독기에 서서히 허물어졌다.

땅은 붉게 타 녹아내렸고 바람엔 독이 실렸으며, 물은 마르고, 풀은 시들었다. 겨우 재건된 나라와 문명 역시 모조리 무너졌다.

그렇게 악마로 돌변한 신의 사자가 멸망을 일으켰을 때, 나약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건 끝없이 낙담하는 것뿐이었다.

희망이 그치고 믿음이 사라졌다.

그로써 혼란과 절망만 가득하던 그때, 한 소녀가 나타났다.

마냐냐의 빛깔을 그대로 따온 듯한 물빛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그 소녀가 허물어지던 비스를 향해 마냐냐의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붕괴가 멈추고 독기가 정화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또 한 번 구원받았고, 사람들은 그 소녀를 성녀로 추대하며 마냐냐의 현신이라 찬양했다.

이후 초대 성녀는 사람들에게 탑을 세우고 잠든 마냐냐를 대신해 물을 정화할 것을 당부했다.

그 뜻을 이어 세워진 것이 바로 티엔다에 우뚝 선 마냐냐 탑이었다.

이후 탑을 통해 많은 성녀가 등장했다.

비록 초대 성녀처럼 물빛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이제껏 없었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역할을 다했다.

이처럼 성녀는 절망뿐이던 세상에 나타난 희망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은총이었고, 그래서 성녀에겐 무엇보다도 선하고 고귀한 자질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현 성녀인 로블레 투하는 마치 그린 것처럼 이상적인 성녀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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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로블레 투하를 의심하는 겁니까?”

시온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래서 이비는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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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금으로선 조건에 맞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젊은 여자고, 내 물건을 가지고 있고, 날 저주할 동기도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비는 이렇게 말하며 며칠 전, 유비아를 통해 본 장면을 떠올렸다.

유비아의 도움으로 잠깐 동안 자신의 저주를 살펴보게 된 이비는, 누가 저주를 걸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보게 되었다.

그건 젊고 냉랭한 여자였다.

이비는 그 여자를 보고 로블레 투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로블레 투하는 이비가 본 형상과 성별과 연령대가 같고, 다른 사람이 엎드릴 만큼 고귀한 신분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어렴풋이 보인 드레스의 실루엣이 마냐냐 탑의 예복과도 유사했다.

게다가 아주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이비는 로블레 투하에게 자신의 물건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로블레 투하가 정말 저주를 건 범인인지 확인해야 했고, 그래서 시온을 꼬드겨 등꽃제에 참여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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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블레 투하에겐 차기 성녀를 고를 권한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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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성녀잖아요.”

시온이 미심쩍다는 듯 말하자, 이비가 뭐 그런 당연한 얘길 하냐는 듯 대꾸했다.

희망의 상징인 성녀는 고결한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반드시 착해야 하고, 순결해야 하고, 얌전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

동시에 언쟁하면 안 되고, 질투해도 안 되고, 놀기 좋아하거나 방탕해도 안 되며, 이것저것 계산하며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된다.

이처럼 성녀에겐 엄격한 상이 있기에 성녀들은 항상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혼인과 연애를 금했다.

성녀인 로블레 투하가 대부분 칩거하며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성녀는 반드시 성녀다워야 한다는 이 불문율 때문에 로블레 투하는 이비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마냐냐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평민 소녀를 자신의 후계로 고르는 게 가장 성녀다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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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블레 투하는 저보다 자기 동생이 성녀가 되기를 바랄 거예요. 성녀는 대대로 투하 가문의 몫이기도 하고, 그 둘은 굉장히 의좋은 자매라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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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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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니까 백작님께서 이걸 확인해 주셔야 해요. 이건 백작님만 가능한 일이에요.”

이비가 두 손을 꼭 모아 턱밑에 대고 말했다.

그 모습이 일순 순수해 보였지만, 시온은 더 이상 속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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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로블레 투하 앞에서 당신의 저주에 대해 말해 보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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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만약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제 저주에 대해 이미 안다는 뜻이니까요.”

이비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말했고, 시온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귀여운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저건 책사다. 말간 눈으로 상대를 방심시키는 책략가고, 남의 뒤통수를 즐겨 때리는 모사의 달인이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이비 아리아테는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는 시온의 저주를 이용해 상대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려 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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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협조 범위에 저주까지 들어갈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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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이비의 실없는 대답에 시온이 비웃음에 가까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이비는 야무지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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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말도 있잖아요. 모든 단점은 쓰기에 따라 장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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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과연 맞는 비유일지…….”

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재차 웃었다.

그래서 이비는 백작님이 근래 좀 자주 웃는다 싶었다.

물론 평범한 웃음이 아니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비웃음이지만, 마냥 냉랭하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대단한 발전이었다.

이비가 살그머니 눈치를 살피는데 시온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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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만찬 전까지 다른 예정은 없습니까?”

대부분의 축제나 연회는 둘째 날이 되면 오후 늦게 시작된다.

첫날부터 술과 도박으로 새벽을 지새우는 귀족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 오후까지는 그 시간 맨정신인 자들끼리 모이거나, 아니면 각자 친밀한 이들과 소소하게 차를 마신다.

시온은 혹시 이비도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지, 그래서 자신이 같이 있어 줘야 하는지 이비에게 먼저 물었다.

그에 이비는 명랑하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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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땐 괜찮아요. 후작님을 뵈러 갈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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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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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제 쓰러지고 아직 요양 중이라고 하셔서 문안을 다녀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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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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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문안이요.”

시온이 단어만 찍어서 두 번이나 되물었다. 그래서 이비는 조금 무안해졌다.

이비는 문제 될 것 있냐는 표정으로 시온을 쳐다봤고, 시온은 그런 이비를 마주 쳐다보다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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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의 행실이 있는데 그렇게 바로 찾아가면 보기 안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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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하지만 아픈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성녀의 의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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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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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겠어요?”

가식에 실패한 이비가 불만스레 입을 앙다물었다.

시온이 그 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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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길 가겠다니 비위가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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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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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슨 표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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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걸 이제 알았나? 라는 표정이요.”

이비의 당찬 대답에 시온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비는 조금도 웃지 않고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아무래도 저 백작님은 이비의 말뜻을 전혀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이비는 백작이 자신의 비위를 왜 이토록 과소평가하는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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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비위가 좋으니까 너하고도 이러고 있지.’

이렇게 대놓고 말해 주면 좀 알아들으려나?

설마 백작은 자기가 카셀 몬트라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기가 한 짓을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나?

아니야, 나한텐 네가 더 나쁜 놈이야. 네가 한 짓에 비하면 후작이 한 짓은 애교잖아.

이비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입술을 꼭 붙였다. 그러곤 웃는 척 온순한 표정으로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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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백작이 그렇게 무딘 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예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실은 이미 어제, 흐드러지게 핀 등꽃 아래서 명백히 드러났다.

어제 이비는 작은 초식동물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할 일을 찾아 돌아다녔다.

반면 백작은 거대한 사자처럼 앉아 그 공간을 제압하고 지배했다.

그 위세를 빌려 쓴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이비는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이비에게 어려운 일들이 백작에겐 너무 쉽다.

그래서 이비와 백작은 살아가는 방식조차 다르다.

토끼는 토끼의 방식으로, 사자는 사자의 방식으로, 까마귀는 까마귀의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어째선지 사람만 이렇게 서로 너무 달라 누군 제왕이 되고 누군 귀족이 되며 또 누구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천민 소녀로 존재한다.

이로써 같은 사람이라는 말도 순식간에 무색해진다.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백작은 무뎌도 괜찮고 이비는 늘 예민해야 한다.

이것도 정말 지치는 일이지만 어쩌겠어. 견뎌야지.

이비는 심호흡하며 답답한 마음을 떨쳤다. 그러곤 대리석으로 장식된 복도로 걸음을 예쁘게 내디뎠다.

카셀 몬트라는 더 좋은 방이 있는 별장의 동관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쓰는 방은 이 별장에서 두 번째로 좋은 방일 것이다. 그 첫 번째 방의 주인은 이미 따로 계시니까.

동관으로 넘어가 보니 복도부터 이미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몬트라 후작의 사람들이었다.

이비가 그들에게 인사하고 카셀의 방으로 향하는데, 돌연 방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중엔 이비가 익히 아는 인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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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막 방에서 나온 리오 투하가 이비를 보고 멈칫하며 중얼댔다.

리오는 여느 때처럼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축제를 주관하는 집안의 따님이면 더 화려하게 꾸밀 법도 한데 그 완고한 성격 탓인지, 성녀를 향한 갈망 때문인지 리오의 옷차림은 오늘도 단정하다.

물론 단정한 건 겉모습뿐, 이비는 저 아가씨가 얼마나 왈왈대며 짖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오가 살짝 인상을 쓴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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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님을 만나러 온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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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투하 양.”

이비의 대답에 리오의 표정이 더 굳었다.

그래서 이비는 일단 공격에 대비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죠? 징계가 무산됐다고 당신 잘못까지 없던 일이 된다고 착각하지 말아욧!

리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실감 나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비의 예상과 달리 리오는 살짝 인상을 쓴 채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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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왔으니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오래 머물진 않는 게 좋겠네요.”

리오는 쌀쌀맞게 말하고 이비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래서 이비는 쟤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다.

이비도 리오를 뒤로한 채 카셀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멀끔한 모습으로 침대에 앉은 카셀과 그 주위에 둘러선 유력한 귀족들이 보였다.

갑자기 쓰러져 남의 집안 축제에 병상을 깔고 앉았으면서, 카셀은 꽤 유쾌한 모습으로 제 친구들과 시시덕대며 어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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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침 왔네. 어서 와, 이리 와!”

카셀이 이비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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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이라니, 내 얘기 중이었나?’

그래서 이비는 뭘까 싶어 방의 분위기를 살폈다.

카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능글대며 웃는 낯이었다.

그런데 그 주위에 선 귀족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들은 모두 이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의미심장하게 웃는 자도 있고 연민 어린 눈을 한 자도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영문도 모른 채 심장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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