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긍지 혹은 성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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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긍지 혹은 성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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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긍지 혹은 성깔
2022.09.15.
“아마 그건 성격이 나빠지는 저주일 거예요.”
“진심이세요?”
“아뇨, 그냥 지적해 봤어요. 그 사람 성격 나쁜 거.”
디에스의 물음에 이비는 실없이 대답하며 웃었다.
마치 볕 좋은 자리에 앉은 고양이처럼,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백작과 헤어진 후, 이비와 디에스는 그들이 머물기로 한 집에 돌아왔다.
마을을 구해 주고 다시 찾아와 준 성녀 후보님께 마을 사람들이 기꺼이 마련해 준 공간이었다.
이비는 그 아늑한 집의 소파에 몸을 늘어트리며 재잘댔다.
“생각해 보면 백작은 내 저주도 쉽게 이해했어요. 저주라는 게 그리 흔한 게 아닌데, 보통은 더 의심할 텐데.”
이비는 백작에게 자신의 저주를 폭로했을 때, 그가 허튼소리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던 걸 떠올렸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덧붙였다.
“시온 라우렐에게 저주라니, 왜 사자가 목에 방울을 달고 있을까요?”
이비는 오늘 디에스의 조력자, 유비아를 통해 아주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비의 관심을 독점한 건 본인의 일이 아니라 시온 라우렐의 저주에 대한 것이었다.
“이상하죠, 그 사람이라면 저주에 걸렸어도 진즉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 혹시 일부러 방치하는 거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저주를 풀 수 있는데 방치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가령, 합의된 저주라거나.”
합의된 저주라니. 오늘따라 지독히 안 어울리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전혀 얼토당토않은 표현은 아니어서, 디에스도 이비의 생각을 쉽게 알아챘다.
“아마네세르의 감시 임무 같은?”
디에스의 말에 이비는 웃으며 끄덕였다.
아직 정황에 불과하지만, 이비는 여러 가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라우렐 백작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공허함.
시온 라우렐이 떠안고 있는 저주.
그리고 살아 있는 재앙 아마네세르.
“목줄이었던 거예요. 라우렐 백작이 경계에서 도망치지 않게 붙들어 맬.”
“아직 단정 짓기는 이릅니다.”
“물론 그렇지만, 마냐냐 탑에도 지하가 있는데 라우렐 대공 성이라고 무결할까요?”
디에스의 조심스러운 만류에도 이비는 확신을 지우지 않았다. 스스로 보고 겪은 게 있는 탓이었다.
마냐냐 탑이 언제나 지고하게 빛나는 건 은밀한 지하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음습한 구역에서 탑을 떠받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대신하니, 수면 위로 솟구친 탑은 언제나 희고 찬란하다.
이비는 라우렐 대공가 역시 이런 기만에서 자유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하면 백작이 티엔다에 냉담한 것도 이해가 되죠.”
라우렐 대공의 극진함에도 불구하고 백작이 티엔다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
이비는 그게 어쩌면 자신이 탑주에게 치를 떠는 것과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비는 자신과 모든 게 정 반대라고 생각한 백작에게 아주 미미하게나마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진 그래도 잘 맞아떨어지는데, 백작의 지금 상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주에 걸리긴 했는데 역대 라우렐 백작들처럼 무감한 상태는 또 아니니까…….”
이비가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중얼댔다.
그러면서 디에스에겐 혹시 저주가 풀려도 여전히 흔적이 남는 건가요, 저주가 풀린 후 또 다른 저주에 걸릴 수도 있는 건가요, 등등 저주에 대한 걸 연신 물어보았다.
백작에 대해 고민하는 이비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아니, 진지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심취해 있었다. 마치 개다래나무를 깨문 고양이처럼.
원체 영리한 이비는 평소에도 이런저런 화제를 모아 남들이 간과한 조각을 맞추고 행간을 읽는 걸 즐겼다.
디에스는 그 모습이 괴팍한 천재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괴팍하다는 말에 이비가 난동을 부리는 것도, 천재라는 말에 이비가 우쭐대는 것도 그리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비가 저렇게 골몰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지금 이비에겐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주제가 있었다.
디에스는 이비가 혹시 그걸 까먹었나 싶어 넌지시 말했다.
“저도 백작의 저주가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지금 우리한테 더 급한 문제는 이비 님 본인의 저주 쪽입니다.”
“맞아요, 제일 급한 건 그거죠.”
다행히 이비는 디에스의 말에 곧장 동의했다.
그러더니 아주 말짱한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친구 하나 만들려고요. 저주에 걸린 내 사정을 다 알고, 티엔다 사교계에 출입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으로.”
“설마 백작을…….”
다행히 이비는 딴 데 정신이 팔린 게 아니었다.
디에스가 반신반의하며 되묻자 이비는 오히려 뭘 새삼 놀라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애당초 이비가 이 마을에 다시 온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유비아를 만나려고, 다른 하나는 백작과 손을 잡으려고.
이비는 잔머리 못지않게 절약 정신도 뛰어났다. 그래서 모처럼 얽히게 된 백작님을 그냥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기왕 서로의 약점을 들켰는데, 이대로 놓아주기엔 백작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비아를 통해 자신에게 저주를 건 여자의 존재를 알게 되며 이비는 백작이 더더욱 필요해졌다.
그 여자를 찾으려면 다시 티엔다 사교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저주를 짊어진 채 그 위선과 기만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러니 옆에서 도와줄 든든한 친구가 하나 필요한데, 그러기에 백작보다 이상적인 인물은 없었다.
이미 이비의 저주에 대해 알고, 이비와 엮일 대로 엮여 있으며, 이비에게 집착한다고 소문까지 잔뜩 난 젊고 잘생긴 대귀족.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티엔다의 가시밭길도 더는 두렵지 않으리.
물론 그의 못된 성격과 성녀 자리를 향한 집착은 그 전에 잘 정리해 놔야겠지만 말이다.
백작을 손에 넣겠다는 이비의 야심에 디에스가 놀라서 중얼댔다.
“의외네요. 백작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 아니에요, 싫어하는 거 맞아요.”
이비는 이번에도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 자식 때문에 마음고생한 게 얼만데 당연히 좋아할 리 없다.
게다가 과거의 앙금은 논외로 치더라도 시온 라우렐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이비가 싫어하는 점만 모아 둔 사람이었다.
고압적인 태도에 곱지 않은 말투, 냉랭한 표정, 거기에 둥근 면을 찾아볼 수 없게 뾰족뾰족 모난 성격까지.
이렇듯 백작의 모든 것은 이비의 이상형과 정확히 대척점을 이뤘고, 이비는 그런 그가 지금도 꽤 싫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비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호불호쯤은 잠시 접어 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싫은 것과 별개로 친해질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잖아요.”
이비가 의연히 말하며 웃었다.
그때 이비의 두 눈엔 백작을 꼬드길 의지가 가득했고, 디에스는 이 야심 찬 아가씨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친해지는 것과 이용하는 것 쪽이 더 별개로 보입니다만…….”
디에스는 아가씨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집사지만, 이번만은 그의 포부를 온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어깨너머 보기에도 백작의 됨됨이가 서쪽 산맥의 야생마들처럼 지독했기 때문이다.
서쪽 산맥의 야생마들은 인간을 태울 바엔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긍지 혹은 성깔을 지닌 놈들이다.
그리고 디에스의 눈엔 시온 라우렐이 딱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는 오만할 자격을 모두 갖춘 자였고, 또 그걸 스스로 알았다.
그런 고고한 자는 절대 자신을 꺾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꺾여 본 적이 없어 굽히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작이 이 마을을 좋아하는지, 선생 노릇에 진심인지, 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따위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애틋한 관계든 그의 자존심보단 한참이나 덜 중요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비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이 역시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이비가 이걸 모를 리도 없고, 또 혼자 이것저것 꿰맞추며 잔머리를 굴리는 중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디에스가 이비의 작고 심오한 머릿속을 새삼 궁금해할 때였다.
쾅쾅쾅!
이미 밤에 가까운 시간인데, 밖에서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큰일!”
그리고 이어진 것은 마르소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이비가 눈을 크게 뜨자, 디에스가 곧장 현관으로 나가 부인을 데려왔다.
그 자그마한 여인은 이비를 보더니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이비야, 이걸 어쩌면 좋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에요?”
“바옌 병사들이 선생님을 끌고 갔어!”
마르소 부인의 절박한 외침에 잠깐 심각했던 이비의 얼굴은 도로 평안해졌다.
“그것참 큰일이네요.”
조사단 여러분께. 몹시 큰일.
이비의 눈이 흐려졌지만, 마르소 부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마을 광장에서 면이 잔뜩 상한 조사단장님이 병사들을 시켜 괘씸한 안경을 체포해간 모양이다.
마르소 부인이 설명하느라 숨도 돌리지 못해 땀 범벅으로 힘겨워하자 디에스가 손수건을 건넸다.
하지만 부인은 땀을 닦는 대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더니 선생님이 크게 다치거나 못 돌아올 수도 있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비도 마냥 가볍게 있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백작을 대신해 마르소 부인을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제가 찾아올게요.”
.
.
.
이 마을에 찾아온 조사단의 수는 오십 명가량이다.
그 정도면 마을에 체류하는 것도 가능한데, 조사단장은 굳이 병사들을 다그쳐 마을 밖에 진을 쳤다.
평민들의 축사 같은 집보다 자신의 막사가 훨씬 더 고품격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이 밤중에 안경을 찾아 호밀밭을 지나는 신세였다.
“어쩐지 조용하네요.”
앞장서 걸어가던 디에스가 말했다.
불을 환하게 밝힌 조사단의 진영은 호밀밭 너머 지척에 있었다.
그러니 인기척이 느껴져야 정상인데, 반대로 이비와 디에스의 발소리를 듣고 저쪽에서 경계해 와야 마땅한데, 조사단의 막사는 모두 잠들기라도 한 듯 고요했다.
수상한 느낌에 두 사람은 호밀밭을 빠르게 헤쳤다. 그로써 도착한 조사단의 병영은 입구부터 무척 화려했다.
봉제 인형처럼 널브러진 다수의 병사로 말이다.
디에스가 쓰러진 병사의 상태를 살피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절했네요. 누구 짓인지 말 안 해도 알겠군요.”
“역시 화났었나 봐요. 안경이라고 불려서.”
이비도 전멸한 병사들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역시 이비의 예상이 맞았다.
마르소 부인이 고한 큰일은 조사단 여러분의 큰일이었다.
이비와 디에스는 쓰러진 병사들을 뒤로한 채 병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의 풍경도 입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막사 안팎으로 병사들이 고이 누워있는데, 싸우거나 저항한 흔적 따윈 없었다. 아무래도 전원이 단번에 제압당한 모양이었다.
이비와 디에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둘러보다 백작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그리고 이비는 곧 마주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막사에서, 조사단장을 발 받침으로 사용 중인 시온 라우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