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안경 (30/129)


30화. 안경
2022.09.12.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그런 주제에 잔뜩 얽히고설켜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근거를 갖췄다.

살짝만 건드려도 균형이 무너지는 악랄한 인과의 더미처럼.

그래서 감히 손댈 수 없는 괴물은 무심하게 굴러가며 수많은 삶을 저미고 으깬다.

아무 가책도 없이, 참으로 뻔뻔하게.

시온은 지금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딱 그런 꼴이라 생각했다.


“선생님!”

“저기 좀 말려 주세요!”

시온이 어린 제자와 함께 언덕에서 막 내려왔을 때였다.

마을 입구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싶더니, 사람들이 그를 보자마자 애타게 말했다.

그들이 가리킨 곳은 마을의 광장이었다.

그곳에서 짙은 남색 제복을 입은 바옌의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무어라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덜컥 겁이 난 듯, 아이가 시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아이는 자신의 염려가 현실이 되어 찾아온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을 으깨러 온 세상을 한없이 불안한 눈으로 더듬고 있었다.

제자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자신의 허리춤을 내려다보던 시온은 한숨을 삼키며 아이를 떼어 내 마을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곤 곧장 바옌의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시온의 물음에 병사들이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시온을 본 후엔 오히려 당황해서 주춤댔다.

이 마을 사람들에겐 이제 익숙하지만, 사실 시온 라우렐은 이 목가적인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에겐 굳이 과시할 필요 없는 우월한 품격이 있었고, 그건 싸구려 셔츠나 투박한 안경을 걸친다고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바옌의 병사들은 시온의 귀족적인 분위기를 단번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병사들의 침묵이 길어지자 시온이 재차 물었다.

힘을 빼도 고압적인 목소리가 그들을 한층 더 긴장시켰다.

바옌에게 소속된 이 말단들은 전원 평민이어서 이 귀공자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까까지 기고만장하던 병사들이 곤혹스러움에 입을 닫자, 반대로 억눌려 있던 마을 사람들이 소리쳤다.


“우리더러 당장 마을을 비우래요! 겨울나고 아무것도 없는데, 밖에서 굶어 죽으라는 소리잖아요!”

“맞소! 아무 대책 없이 무작정 떠나라고만 하면 대체 어쩌라는 거요!”

사람들이 원성을 쏟아 내자 병사들의 눈빛이 도로 험악해졌다.

하지만 차마 일갈하지 못하고 시온의 눈치를 보더니, 돌연 어딘가를 향해 바로 서며 어깨를 바짝 세웠다.

단조로운 말굽 소리와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다음 일이었다.


“무슨 소란이지?”

퍽 우아한 목소리였다. 나긋함 속에 언짢음이 가득 담긴 점이 특히나 귀족적이었다.

이 붐비는 광장에 말을 타고 들어오는 남자는 손에 채찍을 말아 쥐고 저 병사들처럼 남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와 가슴, 소매에 맺힌 견장과 훈장, 그리고 자수 등은 저 말단들과 그를 명확히 구분 지었다.

그는 누가 봐도 귀족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사이 병사 하나가 말 위의 남자를 조사단장이라 부르며 상황을 전했다.


“이주 명령에 불복하는 자가 있다고.”

보고를 들은 조사단장이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더니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무지한들 이 상황에 설명이 필요한가? 저주로 죽을 뻔한 건 너희다.”

경멸 섞인 질책에 마을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조사단장은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듯 채찍의 손잡이로 제 손바닥을 내리치더니, 주민 하나를 지목했다.


“너, 말해라. 뭐가 문제지?”

허락인지 명령인지 모를 요구에, 지목된 자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주가 심각해 이주하라는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그렇지만 저희 대부분은 당장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착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원을…….”

“정 갈 곳이 없다면 지주에게 몸을 의탁하면 되지 않나?”

“농노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저주로 죽는 것보단 낫지.”

마을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수십 년 동안 일궈 온 터를 버리고 떠나는 것도 서러운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노예가 되라니.

입은 있지만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황망함에 눈시울을 붉혔고, 발언을 허락받은 사람은 억울함을 삼키며 읍소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마을에 남게 해 주십시오. 그믐이 오더라도 저희가 감당하겠습니다.”

“네까짓 게 무슨 감당을 하겠다는 거냐? 저주가 널 먹어 치우고 다른 도시를 덮치면, 그 피해를 다 책임질 테냐?”

하지만 조사단장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 완고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말하던 자는 그만 말문이 막혔고, 보다 못한 시온이 대신 입을 열었다.


“조사단이면 조사 임무에 먼저 충실하십시오.”

그 읊조림이 광장에 새로운 찬물을 끼얹었다.


“문제를 들춰도 모자랄 판에 덮는 데 급급해서는 앞으로도 무능하다는 평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귀하는 누구지?”

무능이라는 말에 조사단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실은 그도 아까부터 시온을 주목하고 있었다. 다만 말단 병사들처럼 시온의 정체를 두고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조사단장에게 이 브릭 자작령은 제 앞마당이나 다름없었고, 그래서 자신이 모르는 저 남자가 유력한 인물일 리는 없다고 믿었다.

조사단장의 그런 믿음은 그를 더 거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온이 아무 대답도 없이 그를 무시할 때, 조사단장의 입 끝은 결국 험하게 일그러졌다.


“조사보단 처벌이 더 필요해 보이는군.”

조사단장은 다른 경고도 없이 곧장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시온의 목을 노리며 날아온 채찍은 그의 손에 너무 쉽게 붙잡혔다.

조사단장이 당황해서 팔을 당겼지만, 시온에게 잡힌 채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걸 능멸로 느낀 조사단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면 시온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적당히 쌀쌀맞았다.

하지만 지금 심기가 더 불편한 쪽은 조사단장이 아니라 시온이었다.

저자는 까맣게 모르겠지만, 덕분에 기분 나쁜 일이 잔뜩 떠올랐다.

시온은 손에 쥔 걸 그대로 끌어당겨 진창에 처박으면 이 텁텁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싶었다.

하지만 뒤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애써 참았다. 저게 나중에 엄한 분풀이를 하면 기분만 더 잡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온은 잡고 있던 채찍을 순순히 놔줬다. 물론 배려 없이.

그 바람에 혼자 힘 겨루기하던 조사단장은 크게 휘청였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가 다급히 균형을 잡았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허둥대고서 수치심으로 얼굴을 일그러졌다.


“이놈이……!”

그 성마른 사내는 결국 으드득 이를 물며 칼을 빼 들었다.


“본보기가 필요한 건 잘 알았다. 네 사지를 저며서 거리마다 뿌려 주마.”

바옌 공작은 저런 인물이 자신의 깃발을 달고 다니는 걸 과연 알까?

안 그래도 감정이 곱지 않은데, 시온은 그 노공작이 한층 더 싫어졌다.

시온이 칼끝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자, 조사단장은 더더욱 악에 받쳤다.

참다못한 그가 칼을 치켜들며 말고삐를 휘어잡을 때였다.


“저, 무슨 일이 있나요?”

어디선가 들려온 가냘픈 목소리가 칼부림 직전의 긴장을 툭 끊어 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각기 다른 기분을 만끽했다.

마을 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고, 병사들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거만하던 조사단장의 얼굴엔 낭패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시온 라우렐의 안 그래도 어지러운 심기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아무런 대답이 없자,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아리따운 아가씨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집사와 함께 나타난 그 아가씨, 이비는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더니 조사단장의 칼을 보고 너무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비가 심약한 귀부인들이 하듯 당장 기절할 것처럼 굴자, 조사단장은 황급히 칼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마지못해 웃어 보이는데, 정작 이비는 그를 뒤로한 채 시온을 보고 소리쳤다.


“어머,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한참 찾았어요!”

이비가 시온을 아는 척하자 안 그래도 억지스러운 조사단장의 미소가 더 경직되었다.

하지만 이비는 그 심정을 까맣게 모르는 것처럼 보란 듯이 시온의 옆에 섰다. 그러곤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조사단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무구한 눈빛에 말 위에서 버티던 조사단장은 하는 수 없이 등자를 밟고 내려왔다. 그러곤 이비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저는 바옌 군 직속 브릭 자작령 관할 조사단 단장 오르키 브릭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결한 탑의 이비 아리아테 님.”

“브릭 자작님의 영토에 찬란한 아침의 가호가 함께하길.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만남을 기뻐하기엔 주변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여요.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비는 인사를 받는 와중에도 주변 상황을 캐물었고, 조사단장은 덕분에 입장이 한층 더 불편해졌다.

그는 브릭 자작령을 지배하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지만, 평민인 이비 아리아테에겐 깍듯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가 속한 티엔다와 마냐냐 탑의 권위가 그토록 지고하기 때문이었다.


“임무 중이었습니다. 감사하지만 아리아테 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이비가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리자 조사단장은 애써 웃었다. 그러곤 병사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조사단장이 말에 오르기 전에 시온을 향해 으르렁댔다.


“넌 조만간 다시 볼 거다, 안경.”

그건 시온이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호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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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의 개입으로 마찰을 피했지만, 시온은 이비가 그리 고맙지 않았다.


“감사 인사는 괜찮아요. 지켜 드리기로 했으니까요.”

이비가 냉큼 이렇게 말하며 얄밉게 생글댔기 때문이었다.

바옌의 조사단이 돌아가고, 마을 사람들도 상심한 얼굴로 흩어졌다.

그래서 시온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비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왜 따라옵니까?”

“집까지 모셔다드리려고요. 안경 혼자는 위험하잖아요.”

이비는 안경이라고 말하며 꺄륵 웃었고, 약 올리는 게 명백한 저 태도에 시온은 일부러 보폭을 넓히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이비가 오히려 더 가까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상상도 못 했어요. 설마 백작님을 안경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안경은 차라리 고상하죠.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에 비하면.”

“마음에 드시면 저도 그렇게 부를까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돌연 시온을 앞질렀다. 그러더니 시온을 막아서고 그의 턱 밑에서 귀엽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안경은 왜 쓰시는 거예요? 눈이 나쁘세요? 아니면 선생님처럼 보이려고?”

그 바람에 걸음을 멈춘 시온은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었다.

이비는 마치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갸웃대더니 이내 티 없이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세요.”

이비의 목소리는 무척 달콤했고, 그래서 시온은 싫어하는 사람에게 비위도 좋다며 빈정대려다 참았다.

그러자 이비 아리아테는 한술 더 떠 자신의 집사까지 가세시켰다.


“그렇죠, 집사?”

이비의 물음에, 옆에서 과묵하게 따르던 그의 집사도 이비처럼 고개를 내밀며 시온을 쳐다봤다.

그 바람에 시온은 꽤 당황했다.

같은 행동이라도 작고 가녀린 이비가 하는 것과 그의 건장한 집사가 하는 건 그 느낌이 매우 달랐다.

때문에 시온은 상당히 거북해졌지만 일단 참았다. 이비가 쳐다볼 때 가만히 있던 터라 그의 집사가 들이댔다고 곧장 피하기가 뭐한 탓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견디다가, 그 둘의 시선이 지나치다 싶을 때쯤 그들을 밀어냈다.


“그만 비키시죠.”

“네, 선생님.”

정말 무슨 수작인지, 이비는 금세 도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더 따라오지 않고 그 길목에서 시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 왔으니까 여기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오늘은 저녁은 스튜예요. 그럼 즐거운 저녁 되세요. 저는 내일 다시 찾아뵐게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깔끔하게 돌아섰다.

그러곤 미심쩍어하는 시온을 뒤로한 채, 목소리를 낮춰 디에스에게 물었다.


“봤어요?”

“봤습니다.”

“맞나요?”

“네.”

이비의 물음에 디에스는 단호히 답했다.

그러곤 일전에 이비의 저주도 알아본 금색 눈으로 확신하며 말했다.


“백작도 노체의 저주에 걸린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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