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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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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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유비아
2022.09.01.
“안녕, 물주.”
소년의 목소리는 빈정거림 없이 단조로웠다.
그래서 이비도 물주라는 표현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조력의 대가로 거액을 요구한 어린이가 누군가 했더니, 초면에도 물주라 부를 수 있는 너였구나.
“반가워요, 이비 아리아테예요.”
“나는 유비아. 존대는 안 좋아해.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이비의 인사에 소년, 유비아가 덤덤히 대꾸했다.
유비아의 태도는 딱히 예의 바르지도 무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유비아를 보며 작고 하얀 토끼를 떠올렸다.
유비아는 뽀얗고 동그란 얼굴에 세모꼴 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긴 백발을 양 갈래로 묶고, 알록달록한 모직 판초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전반적으로 무척 앙증맞았다.
그 와중에 두 손으로 찻잔을 꼭 쥐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깜찍한데, 정작 얼굴은 무표정에 어조도 단조롭다.
그래서 이비는 유비아의 이런 태도가 자기가 귀여운 줄 모르는 토끼의 무심함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비의 이런 첫인상을 증명하듯, 유비아가 노파처럼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디에스에게 얘기 들었어.”
“아, 저주에 관한 얘기 말이죠?”
“아니, 잔머리가 굉장하다는 얘기.”
유비아의 말에 이비는 방긋 웃으며 옆에 앉은 집사를 노려봤다. 그러자 디에스는 적극적으로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비는 이 인간을 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탑주에게 디에스가 매일 찻잔과 사랑한다고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누가 그 아가씨에 그 집사 아니랄까 봐 이비와 디에스는 서로가 없는 곳에서 상대의 명예를 공평하게 깎아 먹고 있었다.
결국 이비는 세상이 돌고 돈다는 보편적 진리 앞에서 집사를 용서했고, 그 사이 유비아가 여전한 토끼 얼굴로 말을 이었다.
“드디어 만났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 미안해.”
“괜찮아, 나는 기다리는 거 잘해.”
이비의 사과에 유비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걸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갈래머리가 귀여웠다.
이비의 판단대로 유비아는 특별히 살갑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그저 수더분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이비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디에스가 소개했으니 물론 안전한 사람이겠지만, 그럼에도 이비의 뇌리엔 비스의 악마라 불리는 밤의 일족에게 편견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유비아의 이런 얌전한 모습이 적잖이 어색했다. 얌전한 밤의 일족이라니, 이비에게 그건 ‘딱딱한 물’이나 ‘말랑한 돌’처럼 상식에 반하는 표현이었다.
이비의 이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유비아가 까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밤의 일족을 보는 건 처음이야?”
“응, 처음이야.”
“신기해?”
“응, 신기해.”
연이어 솔직히 대답한 이비는 저주를 잠깐 원망했다. 그러곤 서둘러 덧붙였다.
“신기하다고 해서 미안해. 나쁜 뜻은 아니었어. 그냥 생각하던 거랑 좀 다르다는 뜻인데…….”
“변명 안 해도 돼. 저주 때문에 그런 거 알아.”
유비아가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고, 그 천연한 대꾸가 이비의 양심을 건드렸다.
유비아는 외모도 성격도 눈에 파묻힌 토끼처럼 보송보송한 소년이었다.
결국 자신의 뿌리 깊은 편견이 부끄러워진 이비는 겸허히 반성했다.
“밤의 일족은 전부 위험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구나.”
“응, 그런 거 맞아. 나 빼고 대부분 미친놈이야. 그러니까 경계 풀면 안 돼.”
하지만 유비아는 이비의 반성을 가차 없이 패대기쳤고, 그로써 이비는 유비아를 포함한 밤의 일족이 대체 어떤 족속인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 유비아는 본론을 꺼냈다.
“편지에도 썼지만, 너에게 저주를 건 뱀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어. 그런데 누군지는 모르겠어서 와 달라고 한 거야.”
그래서 이비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끄덕였다.
“옆에 다른 밤의 일족이 있어서 헷갈린다고…….”
“응. 뱀도 추적당할 걸 알았나 봐. 그래서 다른 일족 옆에 숨은 거야.”
유비아의 추측에 이비는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가능하면 바보인 편이 좋은데. 애석하게도 이비가 잡아야 하는 뱀은 상당히 교활한 모양이다.
“지금 뱀 옆에는 밤의 일족이 두 명 더 있어. 그래서 셋 중 누가 뱀인지 알아내야 해.”
“내가 뭘 하면 돼?”
“내가 네 저주를 살펴보게 허락해 주면 돼.”
유비아는 여전히 귀엽고 목소리도 단조로웠다.
하지만 이비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살펴보게 허락해 달라는 표현이 어떤 침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뱀을 찾으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이비는 대답을 미루며 확인차 되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유비아가 머뭇댔다.
“저주를 푸는 거 급해?”
“응, 급해.”
“왜?”
“이대로는 성녀가 될 수 없어.”
이비의 반사적인 대답에 유비아가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더니 정말 때 묻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솔직한 성녀님이 되면 되잖아.”
“음…….”
유비아의 무결한 발언에 이비는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이비가 영혼으로 아파하는 걸 느꼈는지, 유비아가 다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뱀을 찾는다고 저주가 바로 풀리진 않아. 디에스가 얘기 안 했어? 저주를 풀려면 매개를 부수거나 널 저주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했어…….”
“네, 했죠.”
이비가 마지못해 끄덕이자 디에스도 슬쩍 거들었다.
이비는 그런 집사가 괜히 얄미워 째려봤고, 디에스는 모르는 척 찻주전자를 들어 유비아의 빈 찻잔을 채워 주었다.
“그러니까 뱀을 잡는 건 널 저주한 사람이나 매개를 찾는 중간 과정이야.”
“중간 과정…….”
치고는 너무 길지 않나요? 저주에 걸린 지 벌써 3주나 지났는데, 이제 성녀 발탁까지 한 달 반밖에 안 남았는데……!
이비는 이렇게 한탄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자 유비아가 그 기색마저 읽은 듯 말했다.
“정 급하면 네가 바로 찾아도 돼. 널 저주한 사람. 혹시 찾아봤어?”
“아니, 아직…….”
“급하다며.”
“윽…….”
유비아는 담담하게 이비의 아픈 구석만 건드렸다. 아무래도 이 소년은 이비의 천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이비도 물론 찾고야 싶었다. 이따위 저주를 걸어 주신 그 누군가를.
그런데 친애하는 백작님 덕분에 경황이 없어서 저주에 대한 건 여태 뒷전이었다.
이비가 구차한 변명을 삼키자, 유비아는 무언가 생각하듯 까만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그러더니 다시 이비를 보며 말했다.
“특별히 의심 가는 사람이 없구나.”
이번에도 정곡이어서, 이비는 유비아가 자신을 지나치게 잘 꿰뚫어 본다고 인정했다.
말마따나 지금 이비는 특별히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이비가 타인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 착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여서, 이미 이비는 네놈 모두가 용의자라는 마음으로 티엔다 귀족들의 명부를 샅샅이 살펴본 바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다들 적당히 의심스러울 뿐, 확신을 주는 인물이 없었다.
밤의 일족을 만나는 도박까지 하면서 이비 아리아테를 저주할 사람.
그게 가능한 사람은 로히카 세드로인데 탑주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 그러고 싶어 할 사람은 리오 투하인데 걔한텐 그럴 깜냥이 없다.
그렇다고 이비가 저주에 걸린 이후 특별히 의심스러운 행보를 보인 사람도 없으니, 이비는 그저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비가 침묵으로 긍정하자 유비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는 아무한테나 걸 수 없어. 만약 의뢰만으로 저주가 성립되면 길 가는 사람 열 명 중 두세 명은 이미 저주를 달고 있을 거야. 저주를 걸려면 그 전에 연결되어야 해.”
연결이라니.
이비는 머리가 꽤 좋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유비아의 말이 종종 난해했다.
사실 그게 정상이기도 했다.
박쥐가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어둠 속을 보듯, 밤의 일족에게도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감각이 있다.
그러니 거기서 비롯된 표현을 이비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이비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자, 유비아도 한층 심각한 토끼가 되어 운을 뗐다.
“혹시 노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반역한 용. 저주의 근원.”
“……그거 말고. 노체의 원래 모습.”
유비아의 물음에 이비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퍼트린 해악 때문인지, 노체의 원형에 대해선 티엔다에도 비스에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그저 신의 가호를 받은 네 마리의 용 중 하나이니 원래는 선한 역할이 있었겠지,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런 추측에도 불구하고, 유비아의 이어진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노체는 생명을 돌보는 용이었어.”
“생명?”
이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생명을 돌보는 노체라니, 상식에 반하는 표현이 또 등장했다.
이비의 머릿속엔 지난 그믐,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직 생생했다.
뼈마디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 저주, 가축을 먹고 일어선 용의 주검, 그리고 마을을 덮친 싸늘한 안개까지.
노체의 저주는 오직 생명을 꺼트리기 위해 그믐마다 인간들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 노체가 과거엔 생명을 돌봤다니, 사실이라면 이 무슨 지독한 배반인지.
이비는 유비아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비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생명은 연결이야. 살아 있는 것 중에 혼자 존재하는 건 없어. 이어받고 이어지고 흘려보내는 걸 반복해야 해. 그래서 저주도 연결되어야 성립해. 모든 걸 연결하는 게 노체의 본질이라서.”
“그 연결이라는 게, 안면이나 친분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아냐, 연결은 허락이 필요해. 허락의 증표가 저주의 매개야. 그리고 매개가 될 수 있는 건 네가 직접 넘겨준 너의 물건뿐이야.”
유비아의 말을 찬찬히 이해하던 이비는 그의 마지막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선물한 물건으로도 저주를 걸 수 있어?”
“아니야, 달라. 선물은 받은 사람 거지 준 사람 게 아니잖아.”
이비는 자신이 주고받은 자잘한 선물들을 떠올리며 물었다가, 유비아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그런 걸로 저주가 성립된다면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진즉에 금지되었을 것이다.
그럼 선물도 아닌데 자신의 물건을 넘겨줄 일이 뭐가 있지?
정말 흔치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이비는 유비아가 왜 갑자기 연결 운운하는지 이해가 됐다.
이비는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찾으려고 다급히 머릿속을 뒤졌다. 하지만 곧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바로 생각나진 않을 거야. 아마 티 안 나게 받아 갔을 테니까.”
그러자 유비아가 침착한 목소리로 이비의 조급함을 덜어 주었다.
“저주는 연결되어 있어. 그래서 네 저주를 살펴보면 나는 뱀을 느낄 수 있어. 그리고 너에게 저주를 건 사람도.”
유비아는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 이비에게 물었다.
“내가 볼 수 있게 허락해 줄 거야?”
“허락할게.”
이비는 더 주저하지 않았다.
유비아의 차분한 설명에 신뢰가 생기기도 했고, 뭘 살펴보겠다는 건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비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두 손을 펼쳤다.
그 소년은 손도 귀여웠다.
“잡아, 너한테도 보여 줄게.”
그래서 이비는 망설이지 않고 그 위에 자신의 두 손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