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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제왕에겐 사실 목줄이 있다 (26/129)


26화. 제왕에겐 사실 목줄이 있다
2022.08.29.


새벽을 깨우는 아마네세르는 뛰어난 지혜와 통찰을 지닌 용이었다.

그는 바다가 한없이 토해 내는 태풍을 예견하고 그것이 티엔다비스를 덮치지 못하게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

그의 숨결은 태풍조차 소멸시킬 만큼 강력하고, 그의 날개는 신의 장막처럼 광활하며, 그의 예리한 두 눈은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 언제나 창공과 바다를 꿰뚫어 보았다.

티엔다비스의 평화는 그 위대한 존재의 보호 아래 유지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미쳐 버렸을 때, 그건 오히려 가장 끔찍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각하, 정신이 드십니까?”

부사령관의 음성에 소년이 눈을 떴다.

늘 그렇듯 초점 없이 공허한 눈이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그 소년의 이름은 시온 라우렐.

아마네세르와 이제 겨우 일곱 번째 전투를 치른 이번 대의 라우렐 백작이었다.

이번에 그는 이십 일 만에 아마네세르를 잠재웠다.

저번 교전보다 이틀 더 길었다.

아마네세르의 숨결에 휩쓸린 백작이 반나절 동안 정신을 잃은 탓이었다.

그 사이 아마네세르는 경계의 끝 타르데스의 전당 앞까지 밀고 들어왔고, 그로써 감시자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마네세르를 이 임계점에 묶어 두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고 교전에 임했다.

깨어난 백작이 아마네세르를 다시 경계로 내몰아 간신히 궤멸은 막았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후였다.

부사령관은 비통한 심정으로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하지만 정작 총사령관은 건조하게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대답한 시온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모두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무력해서 부하들이 죽었어,

아마네세르가 두려워,

이러다 나도 곧 죽는 게 아닐까, 같은 당연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든 것처럼 흐릿했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꼈다.

매번 재앙에 맞서는 것도, 온몸이 부서지고 깨지는 것도,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가는 것도.

모두 의문을 품을 필요 없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괜찮았다.

이렇게 싸우다 죽더라도, 또 다른 백작이 곧장 뒤를 이어도,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잊혀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라우렐 백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아마네세르와 열여섯 번째 교전을 치르던 날.

시온의 그 희미한 세상은 갑작스레 종말을 맞았다.


“네게 부탁이 있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한 남자에 의해서.


“너에게도 분명 중요한 일이야.”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시온을 깨웠다.

그러곤 혼란스러워하는 소년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시온은 그의 도움으로 눈을 뜬 후에야 그동안 자신이 잠들어 있었던 걸 깨달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어난 시온을 덮친 건, 안도도 슬픔도 아닌 그간 갇혀 있던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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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정신을 차린 지 어언 6년, 자신을 구해 준 남자에게 빚을 갚고자 했으나 장렬히 실패한 시온 라우렐은 잔잔한 패배감 속에서 자신의 앞날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비 아리아테의 징계를 막은 후, 그는 다시 비스로 내려왔다.

티엔다에 있어봤자 이비에게 더 개입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비스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마을이 시끄럽다 싶더니 뜻밖의 인물이 시온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또 뵙네요!”

그렇게 발랄하게 인사한 건 다름 아닌 이름 높은 성녀 후보, 이비 아리아테였다.

방에서 책을 읽다가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던 시온은 그 해맑은 얼굴을 보고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을 뵈러 왔어요.”

“초대한 적도 방문을 허락한 적도 없습니다만.”

“백작님도 저희 집에 초대나 허락 없이 찾아오신 적 있잖아요.”

시온이 이비를 보자마자 차갑게 으르렁댔지만, 이비에게 그 서슬은 이제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비는 오히려 기분 나쁠 정도로 헤실대며 시온을 도발했다.


“들어가도 되죠?”

심지어 이렇게 말하며 문을 짚은 시온의 팔 아래로 슬쩍 지나가 그의 방 안까지 침범했다.

시온은 어이가 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이비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 수상쩍은 신혼부부 행세는 그만두기로 했는지, 이비는 티엔다에서나 볼 법한 화사한 나들이복 차림이었다.

산뜻한 색상의 원피스와 그에 꼭 맞는 리본으로 머리를 묶은 이비는 여전히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하지만 시온은 이제 그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순진한 척 시온의 방을 관찰하는 이비의 눈은 지금도 먹잇감을 찾아 반짝이고 있었다.

한편 이비의 눈에 비친 시온의 방은 의외로 깔끔했다.

그 못된 성격처럼 난장판일 줄 알았는데, 책상 옆에 가득 쌓여 있는 책만 빼면 모든 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방을 쭉 둘러본 이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 인사부터 드릴게요. 백작님 덕에 징계를 면할 수 있었어요.”

“마음에도 없는 말 그만하시죠.”

“백작님은 정말 한결같으시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다.

시온은 이비가 점점 기어오르는 걸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저번 한 번 나를 뜻대로 움직였다고 해서 당신이 내 위에 있는 건 아닙니다.”

이비가 선생님이라는 시온의 비밀을 알 듯, 시온도 저주라는 이비의 비밀을 안다.

그러니 피차 함구해야 하는 상황일 뿐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한 상황은 아니다.

시온이 이 사실을 분명히 하자, 이비가 한결 공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님 말씀이 맞아요. 저는 제가 백작님의 약점을 잡았다거나 백작님보다 위에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단지…….”

이비는 순순히 꼬리를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건 다음 말을 위한 앙증맞은 연기였다.


“저는 단지, 백작님의 집주인일 뿐이니까요.”

시온은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오늘 이 집을 샀다는 소리예요.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얼마나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시온이 놀라서 되묻자 이비는 깜찍하게 웃으며 서류 한 장을 팔랑 내밀었다.

이층집을 매입했다는 증명서였다.

이 뜬금없는 상황에 시온의 눈이 매서워지자, 이비가 얼른 선수를 쳤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소중한 집이라 추억을 간직할 겸 산 거니까.”

이비가 해명했지만, 시온의 눈초리는 풀어지지 않았다.


“백작님께 불편을 끼칠 의도는 결코 없어요. 오히려 저는 백작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걸요.”

그래서 이비가 무구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시온은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하다가, 굳이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는 걸 깨닫고 이비에게 물었다.


“진심입니까?”

“살짝 빈말이에요. 살짝이요, 아주 살짝.”

본심을 들켰지만 이비는 그리 놀라지 않고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그래서 시온은 날을 세우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비에게 한껏 놀아난 직후인데도 저렇게 말실수하는 걸 보니 경계가 절로 풀렸다.

그렇게 시온의 눈매가 누그러지자, 이비가 넌지시 말했다.


“아무래도 은근히 얽힌 일이 많은데, 기왕이면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잖아요.”

은근히 얽힌 일.

그건 시온의 외유, 이비의 저주, 티엔다 귀족계의 소문, 그리고 점성술사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 말이었다.

그렇게 운을 띄운 이비가 가볍게 책망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절 부탁한 사람이 여기 살던 점성술사라는 거, 왜 진작 안 가르쳐 주셨어요?”

시온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히 대답했다.


“당신이 떠올리지 못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얘기해 주셨으면 좋았잖아요.”

“예상을 전혀 못 하기에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죠.”

“정말 쫓아내고 싶은 말만 골라 하시네요.”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울컥해서 서로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길 얼마, 이비가 먼저 표정을 풀고 물었다.


“아저씨는 지금 어디 계세요?”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아는 있나요?”

그래서 재차 묻자, 그는 한참 후에야 느리게 답했다.


“아마도.”

그 모호한 말에 이비는 안도하지도 실망하지도 못한 채 애써 웃었다.


“어디서 만났는지,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돼요?”

“안 됩니다.”

“치사해요.”

시온의 단호한 거절에 이비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물론 이런다고 그가 입을 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과연 불친절한 백작님은 끝내 말이 없었고, 이비는 한숨을 쉬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 집은 제가 샀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전에 말한 것처럼 저는 일상의 소중함을 잘 알아요. 그러니까 백작님의 일상도 지켜 드릴게요.”

지켜 주겠다니. 평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래서 시온이 기가 막힌 듯 쳐다봤지만, 이비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대신 저도 부탁이 있어요. 첫째, 다시는 제 앞길을 막지 말아 주세요. 저도 일단 사람이라서 나름의 목표와 방향이 있어요. 그러니 더는 백작님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아 주세요.”

이비는 아주 산뜻한 얼굴로 선을 그었고, 그 모습에 시온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앞길을 막지 말라니, 그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은 잘한다.


“그리고 둘째, 제가 저주를 풀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면, 저도 백작님을 지켜 드릴게요.”

이비는 부탁이라고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명령이었다.

그리고 시온은 명령을 받는 일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시온의 잘난 얼굴은 안경 밑에서 다시 일그러졌고, 그 모습은 이비를 꽤 즐겁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비는 이 기분을 어떻게 더 누려 볼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백작이 한 말을 떠올리고 따라해 보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대답은 내일 들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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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을 너무 자극한 건 아닌지…….”

이비가 백작의 방에서 내려오자, 기다리던 디에스가 넌지시 말했다.

그러자 이비는 오히려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행복했어요. 실제로 때린 건 아니지만, 기분으로는 뺨이든 정강이든 한 대씩 때리고 찬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비는 정말 기뻐 보였다.

백작 때문에 워낙 마음고생을 한 탓에 그를 괴롭힐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달콤한 모양이었다.


“티엔다에선 귀족들 비위를 맞추느라 몰랐는데, 아무래도 저는 이쪽이 훨씬 더 적성 같아요.”

“어련하시겠어요.”

이비의 들뜬 목소리에 디에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이 집의 아담한 거실 겸 응접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보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디에스의 귀띔에 행복감에 젖어 있던 이비가 정신을 차렸다.

며칠 전, 이 마을에서 백작과 마주치는 바람에 이비에겐 예정에 없던 사건이 잔뜩 일어났다.

그래서 비스로 내려온 진짜 목적은 건드리지도 못한 채 지나쳤는데, 디에스가 일정을 조율해 다시 자리를 마련했다.

그로써 예정보다 훨씬 늦었지만, 어쨌든 만나게 되었다.

디에스가 말한 조력자, 이비의 저주를 풀어 줄 밤의 일족을.

이비는 그 밤의 일족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곧장 향했다.


“안녕, 물주.”

거기엔 이제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백발 소년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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