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경상도 남자는 원래 그렇다면서.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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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파이팅하세요! 서예나’
현수막은 그냥 간명하게 가기로 했다.
힘을 내라는 메시지와 예나의 사진 중에서 귀엽게 나온 얼굴을 프린팅해서 현수막과 배너를 걸었다.
그런 이유로 예나가 이 커피트럭을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예나는 당연히 회사에서 자기 이름으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커피 트럭에서 진수가 신경을 쓴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날씨가 차갑기도 했고 또 아침을 거르고 일찍 출근한 배우나 스태프들이 많았기에, 진수는 커피와 함께 뜨거운 콩국과 토스트를 메뉴에 포함했고, 결론적으로 그 추가한 메뉴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전폭적인 환영을 받았다.
촬영현장에 도착한 후 혹시 예나가 알게 되면 흥분한 기분에 촬영을 망칠까 봐, 나는 멀찍이 서서 커피트럭을 주시하고 있었고, 조 단역 배우들과 스태프가 모두 촬영장 안으로 들어간 후에 진수와 나는 커피트럭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커피 드릴까요?”
“콩국으로 주세요.”
“하~아~ 죄송합니다. 콩국은 많이 기다리셔야 해요. 지금 재료를 가져오라고 해두긴 했는데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 정도로 콩국을 많이 찾아요?”
“다른 촬영장에서는 대부분 커피를 찾는데, 오늘 날씨가 유독 추워서인지······.”
결국 진수와 나는 커피를 받아들고 촬영장이 보이는 귀퉁이에 숨어서, 예나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나의 연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명불허전 그 자체였다.
촬영장에서의 예나는 평소 내가 받았던 귀엽기만 한 20대 아가씨의 그 느낌이 아니라,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여제로서의 위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서 배우가 국민 여배우라 불리는 이유가 따로 있었네.”
“대단하지?”
“그래 솔직히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
“하긴 그렇기는 하네. 대표님만 보더라도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런데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넌 차에 가서 좀 쉬어. 나는 조금만 더 보다가 갈게.”
나도 전생에는 국민배우로 불리면서 내로라한다는 축에 속했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예나의 모습은 결코 내 전생의 그것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본인의 연기를 하는 것도 하는 것이지만, 예나의 카리스마가 아예 촬영장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케이! 30분만 쉬었다가 갑시다!”
감독님께서 오케이 사인과 함께 30분간의 휴식을 지시했다.
그때야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과 배우 소속사 관계자들은 긴 숨을 토해냈다.
그만큼 조금 전에 보여준 예나의 연기는, 주변 사람들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를 압도 했었던 것이었다.
“실장님. 고생 많으시네요.”
“어! 한 배우님. 촬영 때문에 오시지 못 하신다더니? 아무튼 커피트럭 고마워요.”
우선 김 실장님께로 다가가서 내가 왔음을 알리고 인사를 건넸다.
“자기야!”
갑자기 고함이 들리기에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감독님과 모니터를 하고 있다가 나를 발견한 예나가 도도도 거리면서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감독님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멀뚱거리는 눈으로 예나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옷도 그렇고 가체가 얼마나 무거운데.”
“치! 올 거라면 미리 온다고 얘기라도 하지.”
“아!”
“자기야 왜 그래?”
예나는 이곳이 촬영장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인지 달려오자마자 내게 안겼다.
아니 내게 안긴 것이 아니라, 예나가 나를 덥석 안았던 것이다.
그런 예나를 떼어낼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예나의 가체에 꽂힌 비녀가 내 얼굴을 살짝 찔렀고, 그 때문에 내가 신음을 내자 예나는 나를 안았던 것을 풀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예나는 남들의 시선은 깡그리 무시한 채, 정말 이곳에서 키스라도 퍼부을 기세였기에 나로선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아픈 체해야 했다.
“괜찮아. 생각만큼 아프지 않아.”
“정말 괜찮아?”
“응. 그런데 정말 연기 죽여주더라. 넌 완전 사극체질이네. 왕비로서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어.”
“왕비가 아니라 황후야. 조선 아니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 민 씨?”
“아니지. 명성황후 민씨는 고종의 부인이고, 나는 순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인 윤 씨거든.”
솔직히 난 조선의, 그러니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가 명성황후 민씨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연극과 뮤지컬로 공연되었던 명성황후 민씨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아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정효황후 윤 씨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였다.
그리고 예나는 그런 순정효황후 윤 씨의 배역을 맡은 것에 대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없이 웬일이야?”
“오늘 하루 촬영을 쉬게 되었어. 구청에서 허가받는 것이 늦어져서.”
“그럼 미리 전화라도 하지. 그랬다면 내가 무슨 핑계라도 대서 촬영을 하루 빠졌을 텐데.”
“그럼 다른 분들이 고생하잖아.”
“그런데 혹시 커피트럭 자기가 보낸 거야? 회사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던데.”
“응, 어젯밤에 부탁했었어.”
“치! 자기는 아직 출연료도 받지 않았으면서.”
“계약금 받은 것도 그대로 남아 있거든.”
“아무튼 자기가 보내준 커피트럭도 받아보고, 오늘 기분 정말 끝내준다.”
커피트럭 하나에 예나가 이렇게 좋아할 줄은 미처 몰랐다.
덕분에 그동안 예나에 대해 무관심하고 또 여자의 감정에 무감각했던, 나 스스로에 대해서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기분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부탁을 할 걸 그랬네?”
“자기가 경상도 남자잖아.”
“갑자기 경상도 남자란 말이 왜 나와?”
“경상도 남자들이 이런 방면으로는 영 아니라던데? 이벤트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하지도 말라던데?”
“그게 지역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언니가 그러던데. 고모부도 경상도 분이거든.”
“에이~ 김 실장님 아버지만 그러시겠지. 경상도 남자들도 요즘은 그렇지 않거든.”
아니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이었다.
아니 경상도 남자들이 모두 그런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종류의 일에는 무감각할 정도라는 것이 사실이었고, 심지어 무관심하기까지 한 것이다.
내 생일조차 잊어버려서 여동생인 지수에게 잔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이따금은 달력에 표시까지 해두고도 단 하나뿐인 여동생 지수의 생일조차 잊어버리고 지나쳤다가, 지수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적도 제법 되었으니 말이다.
“혹시 한강수 배우님 되십니까?”
“예. 제가 한강숩니다.”
예나와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내 이름을 부르기에 고개를 돌리니, 대본을 손에 쥔 남자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감독님이셔.”
“안녕하세요. 감독님. 신인배우 한강숩니다.”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만, 감독님께서 한 배우님과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셔서요.”
“알겠습니다. 가시죠.”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 드라마를 찍는 데 있어 최고 책임자인, 감독님이 부르신다고 하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조감독님 무슨 일이에요?”
“저도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감독님께서 한 배우님이 서 배우님의 남자친구가 맞느냐 물어보시기에, 그런 거로 알고 있다고 했더니 한 배우님을 잠시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예나가 대신 물었다.
하지만 조연출 또한 감독님께서 왜 나를 부르시는지 확실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감독님, 신인배우 한강숩니다.”
“어서 오세요. 감독 김형국입니다.”
“서 배우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서 배우가 많이 배우고 있다고요.”
“우리 서 배우가 배울 것이 뭐가 있어요. 연기라면 대한민국에서 Top이 바로 우리 서 배우인데.”
“그런데 검도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예. 호신 차원에서 조금 배웠습니다.”
전혀 예상과는 다른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내가 검도 유단자란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 그게 오히려 궁금했다.
“김 감독 말로는 호신 차원은 진작 뛰어넘었다던데요?”
“예? 김 감독이라면 김영웅 감독님 말씀이십니까?”
“예. 김영웅 감독 맞습니다.”
하긴 이 바닥이 워낙 좁은 바닥이니, 두 분이 서로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굳이 김영웅 감독님에게, 나에 관해 물어볼 이유가 있나 싶었다.
“그제 저녁에 김 감독하고 소주를 한잔 했거든요. 그때 우리 서 배우하고 한 배우 이야기가 나와서, 두 분의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어요. 그게 갑자기 지금 생각이 났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예나가 아예 광고하듯 ‘우리 서방’이라고 나발을 불어 댔으니, 쉬쉬하면서 도는 소문조차도 단 며칠이면 파다하게 퍼지는 이 바닥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하는 이야긴데, 바쁘지 않다면 혹시 카메오로 잠시 출연해줄 수 없을까요?”
“카메오 말씀이십니까? 전 아직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어서 아무 효과도 없을 텐데요?”
“아니죠. 국민 여동생에서 국민 여배우가 된, 서예나 배우의 여심을 훔친 남자인 한강수 배우가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소문이 나면, 우리 시청률이 폭발적일 걸요,”
감독님 말씀처럼 시청률이 폭증할 일까지는 없겠지만, 분명 시청자들 중에서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감독님의 기대처럼 된다면, 그 또한 예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극에서 과연 내가 카메오로 출연할 만한 것이 있을지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우선 처리해야 할 것은, 이제 내가 개인이 아닌 예담기획 소속이었기에 회사로부터 허락을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기야, 하자.”
“응, 잠깐만.”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먼저 예나가 재촉을 했다.
어차피 어떤 배역을 주실지 몰라도, 망가진다고 해봐야 아직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니 딱히 겁을 낼 이유도 없었기에, 회사의 허락을 받기 위해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한강숩니다. 서예나 배우 촬영장에 왔는데 감독님께서 카메오 출연을 요청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잠시 기다렸고, 전화기 속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배우.”
“예. 한강숩니다. 대표님.”
“그런 것은 한 배우 선에서 결정해도 되네. 어차피 카메오 출연이야 크게 신경을 쓸 일도 없으니까.”
대표님으로부터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감독님께서 제안하시는 배역이 어떤 배역이든지 내가 잠시 얼굴을 비치는 것으로, 예나가 여주인 이 드라마의 시청률을 조금이나마 오르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감독님도 이번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인 예나의 남자친구이기도 하고, 신생 소규모기획사도 아닌 예담기획 소속인 나를 엿 먹이는 그런 그림은 그리지 않으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