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첫 대면, 그리고 계약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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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이제 나가.”
“내가 골라준 것을 입어 봐.”
“야! 속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네가 여기 있으면 어떻게 갈아입어?”
방으로 따라 들어온 예나는 옷장에서 이것저것 옷을 끄집어내더니, 마치 자기가 스타일리스트라도 된 것처럼 내 얼굴에 들이대면서 난리를 쳤다.
속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예나를 쫓아낸 후에 예나가 골라준 옷을 하나씩 챙겨 입고, 예나는 밴에 그리고 나는 진수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어서 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한강수라고 합니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전 커피면 충분합니다.”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라 불렸던 양반의 아우라는 어딜 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인사를 끝내고도 한참을 멍하니 선준호 대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고, 그런 내 눈길을 눈치 챈 예나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우리 예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선 대표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물론 예나와 사귀는 것이 싫어서거나 또 예나가 싫어서도 아니다.
그렇지만 아직 나는, 예나에 대한 애틋하면서도 특별한 감정이라곤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된 것은, 내가 예나를 만나서 한눈에 반했다든지 아니면 예나의 어떤 특별한 것에 눈이 홱 돌아가서, ‘예나가 아니면 내게 다른 여자는 없다.’라는 그런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예나의 말과 행동이 내게 편안했고 얼굴 또한 예쁘니, 이 정도 여자라면 사귄다고 해서 내게 손해가 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 첫째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선준호 대표가 예나의 아버지이니, 이 양반이 어쩌면 앞으로의 내 연예계 생활을 조금은 더 윤택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작용한 것이니 말이다.
“왜? 우리 예나가 한 배우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닙니다! 저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냥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예나에 대한 지금의 내 감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걸 해석하는 것은, 예나의 부친이자 예담기획의 대표인 선준호 배우께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한 배우는 이제 배우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신인이잖아요. 우리 예나와 사귄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괜찮겠어요?”
“저야 잃을 것이 없는 생짜 신인이니 저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예나 배우가 저와 사귄다는 말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서 배우나 회사에 손해 볼 것이 많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인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아직 사랑까지는......”
“아무튼 나는 우리 회사소속 아티스트들의 연애에 대해서는 간섭할 생각이 없어요. 단지 한 배우님에게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사귀는 도중에도 그리고 혹시 둘 사이가 멀어질 때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 그 말씀은 제가 확실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선 대표는 자신이 예나의 부친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에서인지, 예나와 내가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끝을 냈다.
심지어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의 집을 방문했을 때면 거의 국룰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님에 관한 것조차 묻질 않았다.
“그런데 한 배우는 소속사가 없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맞습니다. 아직 오라는 곳도 없고, 또 딱히 소속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요.”
“그럼 예나와의 관계도 있으니 차라리 우리 회사와 계약하는 것은 어때요?”
어차피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소속된 기획사가 있다면 도의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없겠지만, 소속사가 없이 프리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선 대표로서는 당연한 제안일 것이다.
물론 사전에 예나의 매니저인 김 실장에게서, 나에 대한 개략적인 보고는 이미 받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고민해보겠습니다.”
“혹시 생각해둔 기획사가 있어요?”
“그런 건 없습니다. 단지 제가 혼자 결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어서요.”
“혹시 한 배우를 따라다닌다는 친구 때문에 그래요?”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 매니저입니다. 물론 친구인 것도 맞지만요.”
“그래요. 미안해요. 김 실장 말로는 매니저라는 그 친구가 이 바닥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기에.”
“맞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제 매니저를 하기 위해서 대학도 매니지먼트학과를 지원해서 졸업한 친구입니다.”
“그럼 언제 그 매니저라는 친구를 한번 데리고 와보세요.”
“오늘도 같이 와서 지금 1층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담기획이 나로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런데 만약 진수를 예담기획에서 매니저로 채용해준다면, 내가 예담기획에서 활동하는 것 또한 과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신인인 내가 어떤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내게 배역이 쏟아질 일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 전담매니저로 진수를 받아줄 회사는 아예 없을 것인데, 진수가 예담기획에 매니저로 채용 될 수 있다면 나로선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나는 선 대표의 말에 진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한강수 배우 휴식기에는 다른 배우님들을 서포터 해드리기는 하겠지만, 한 배우가 활동할 때는 무조건 제게 한 배우를 서포터 하는 것이라면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수의 생각은 간명했다.
내게 일거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지만, 내가 배우로서 활동할 때는 내 전담 매니저야 한다는 것이 진수가 내세운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이제 계약서를 쓸까요?”
그러면서 선준호 대표는, 몸을 돌려 등 뒤 책상위에 있는 계약서와 펜을 집어서 내게 건넸다.
“우선 제가 계약서를 잠시 훑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요.”
내가 펜을 손에 쥐자 진수가 먼저 선 대표에게 자기가 계약서를 확인해 봐도 되겠느냐고 나섰고, 선 대표는 진수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계약서는 표준계약서를 기준으로 해서 만든 것이었기에, 딱히 독소조항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아니 아직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은 신인인 나와의 계약에서, 수익에 대한 정산비율이 6:4란 것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좋은 조건이었다.
“어때요?”
“누구라도 만족할 만한 조건입니다.”
“그럼 계약하시겠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수가 먼저 계약서에 대한 만족을 표시하자, 선 대표는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내게 펜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 펜을 받는 대신에, 선 대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정산비율은 5:5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전담매니저로 여기 김진수를 확실하게 명기해주셨으면 합니다.”
“한 배우. 왜 이래?”
내 말에 진수는 화들짝 놀라 내 팔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진수에게도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진수를 내 전담매니저로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회사라고 할지라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내가 벌어들인 수익에서, 내 몫으로 받아야 할 정산비율을 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죠. 어차피 김진수 씨를 매니저로 채용하기로 했으니, 김진수 씨를 한 배우 전담매니저로 하는 것이야 크게 어려울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나뿐 아니라 우리 회사 직원들 누구에게도 김진수 매니저의 능력을 인정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1년의 기간을 드릴 테니, 모든 직원들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능력이라면 어떤 능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년 단발 계약으로 5천만 원 이상의 광고를 따오세요. 그럼 그 이후부터는 한강수 배우 전담팀의 팀장으로 한 배우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을 드리겠습니다.”
1년에 5천만 원짜리 광고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선 대표 말대로 1년 5천만 원짜리 계약을 따오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내가 드라마에서든 영화에서든 그만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선준호 대표의 그 말은 진수를 전담매니저로 두려면, 그 이전에 내가 배우로서의 가치를 먼저 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수에게 주게 될 매니저의 급여를, 공으로 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
“대표님께서는 혹시 김진수 매니저가 공돈을 먹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 지금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정산비율을 5:5로 하되 대신에, 계약기간을 3년으로 줄였으면 합니다.”
“계약기간을 줄이겠다는 말입니까? 보통 배우 계약은 7년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담기획은 배우님의 입장을 고려해서 5년을 기준으로 재계약을 하고 있는데요.”
“물론 대표님 그 말씀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제 능력이 부족해서든지 아니면 운대가 맞지 않아서, 1년 이내에 대표님께서 내거신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제 매니저인 김진수 매니저가 나머지 기간 동안 거의 무보수 자원봉사를 하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되든지 말입니다.”
선 대표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진수 문제를 계약서상에 명기하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지만, 일단 진수가 개입된 상황에서는 나는 이 문제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혹자(或者)는 보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니저 일을 때려치우면 될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진수는 그런 이유로 매니저를 할 결심을 했던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튼 내 말에 선 대표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진수 문제에 관해서는 더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꼭 어느 회사에 소속되어야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역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조금은 늦어지겠지만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될 자신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내가 소속사를 정하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왕 상황이 이리 되었고 비록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진수가 소속사로부터 월급을 받게 된다면, 내가 진수에게 가질 부담이 많이 줄어든다는 생각과, 혼자서 작품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면 작품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훨씬 다양하고 쉬울 것이라는 이유일 뿐이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진수는 연신 내게 눈짓을 하면서, 그냥 계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보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에도 친구로서 또 내 매니저로 생활하면서 자기 삶 전부를 오롯이 희생한 진수였기에, 이번 생에서는 결코 나를 위해 일방적으로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진수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록 이 문제로 인하여 계약이 무산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