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오늘부터 1일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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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우님,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나를 데리러 갔던 예나의 매니저가, 난감한 표정으로 내려와서 내 앞에 선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나는요?”
“그게 지금......”
“예? 무슨?”
“예나가 깊이 잠이 든 것 같아서요. 저희 대표님께서는 허락하셨는데, 오늘 밤만 여기서 예나를 동생분, 방에서 재울 수 있겠습니까?”
“매니저님. 예나가 여배우란 사실은 알고 계시죠? 만약 내일 아침에 누군가가 예나의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하지만 아무리 깨워도 예나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대표님께 그 사실을 보고 드리니 여기서 재워도 괜찮다고 하셔서.......”
정말 황당한 소리였다.
아니 예나나 매니저 그리고 내가 알고 있기로 예나의 아버지인, 예나 소속사인 ‘예담 기획’의 선준호 대표까지 정상으로 보이질 않았다.
어디 과년한 처녀를, 아무리 여동생 방에 재운다고 하지만 사내들이 우글거리는 한집에서 재운다는 말인가?
“매니저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힘들겠습니다.”
“예? 왜요?”
내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자, 예나의 매니저는 이게 무슨 황당한 대답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거절하는 그것은 솔직한 내 본심이 아니었다.
‘예담 기획’의 선준호 대표가 예나의 아버지란 사실을 전생의 기억으로 이미 알고 있는 나였기에, 이번 기회에 선 대표에게 점수를 따보자는 얄팍한 속셈에서 거절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미쳤다고, 예나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것을 반대한다는 말인가?
아니 나와 예나의 처지를 비교하자면, 오히려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예나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길 기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매니저님. 아무리 예나가 ‘예담 기획’ 소속 배우라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기획사 대표님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나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예나 부모님들께서 국내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 내 입에서 ‘순발력 좋고!’라는, 감탄사가 튀어 나올 뻔 했다.
선준호 배우가 예나의 아버지란 사실을 밝힐 수 없었기에, 이 매니저란 양반이 내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는데, 대뜸 예나 부모님이 해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옷은 제대로 입고 있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옷을 제대로 입고 있다면 제가 올라가서 깨우려고요.”
“우리 예나가 이렇게 편하게 잠드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한 배우님께서 이번만 어떻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올라가서 깨운다고 하니 예나의 매니저는 또다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매일 피곤함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는 예나가, 평소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 이상했다.
“예전에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예나가 항상 불안해서 잠을 깊이 들질 못하거든요.”
“그 일이라니요?”
“그게 좀.......”
대충 알만한 상황이었다.
매니저가 쫓겨났고 심지어 여자들이었을 스타일리스트와 코디네이터까지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 문제밖에 없지 싶었다.
“그 일이라는 것이 혹시 예전에 강간을 당했던 것입니까?”
“아뇨! 절대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 미친 새끼가 덮쳤지만 우리 예나가 극렬하게 반항해서 얻어맞았지만, 절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셔츠가 좀 찢어지긴 했었지만.......”
다급하긴 다급했었나 보았다.
여배우로서는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 중의 하나를, 내가 넘겨짚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부인하느라, 매니저의 입에서 정말 무의식적으로 절대 강간은 당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튀어나온 것이다.
“그렇게 불안해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오늘처럼 매니저님께서 옆에서 같이 자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말씀하시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나가 생각 이상으로 예민하거든요.”
“그럼 오늘은요. 우리 집은 오늘 처음이기도 하고, 제 동생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요?”
“그게 저도 그리고 저희 대표님께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나중에 알아보시면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신 부분인데, 예나가 남자에게 먼저 친구를 하자고 한 경우가 한 배우님이 처음이거든요. 물론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남자와 말을 섞거나 어울리지 않고 생활할 수가 없지만, 예나가 항상 그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고 상대가 일정 선을 넘어오면 벽을 쌓는 통에, 남자들 사이에서 별로 평이 좋질 못하거든요. 그런 예나가 한 배우님께는 갑자기 왜 그러는지 저도 잘 이해가......”
예나의 매니저 또한 지금의 상황이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예나와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나를 경계하고 또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도, 예나의 행동을 막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한 배우님, 죄송하지만 잠시 전화를 좀......”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예나의 매니저 휴대전화 벨이 울렸고, 휴대전화를 확인한 예나 매니저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예. 바꿔드리겠습니다.”
한동안 ‘예’ ‘예’를 반복하던 예나 매니저는 내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저희 대표님이십니다. 대표님께서 한 배우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얼굴을 맞댈 양반이라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건네받았다.
“한강수라고 합니다.”
“‘예담 기획’ 선준호입니다.”
“예. 선배님. 신인배우 한강숩니다.”
“초면에 결례지만 제가 한 가지 부탁을 할까 해서, 이렇게 전화를 바꿔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아까 김 실장에게 말을 해두긴 했는데, 우리 예나를 하룻밤만 댁에서 재워줄 수 없겠습니까? 오늘 이 일에 관한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사례라니요. 서예나 배우를 저희 집에 재우는 것이야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아침에 다른 사람 눈에라도 뜨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그 문제는 저희 예담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선준호 대표의 말에 환호성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억지로 그걸 누르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용을 썼다.
그냥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재우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도움이 될 수가 있는데, 거기에 더해 선 대표에게 빚을 하나 지우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내가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을지언정, 결코 세상을 함부로 살지 않은 놈이란 것을 과시하는........
“선배님 말씀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럼 서예나 배우의 매니저님을 그 방에서 같이 자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지요. 조만간 밥이나 한 끼 합시다. 늦게 미안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선배님.”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아니 깔끔하게 정리가 된 정도가 아니라, 나로서는 완전히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의 상황이었다.
만일 앞으로 예나와의 관계가 진전되었을 때 내가 부모님을 일찍 여위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게 나에게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오늘의 내 마지막 말이 그런 의구심을 깔끔하게 씻어줄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예나의 힘들었던 기억 덕분에 예나에게 나란 존재는, 앞으로도 영원히 예나의 유일한 남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선준호 배우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예나 덕분에, ‘예담 기획’은 차치하고라도 배우 선준호가 연예계서 쌓아둔 유산을 고스란히 내가 물려받게 될 수도 있고 말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러게 말이다. 나도 얼떨떨하다.”
“이러다가 널 ‘예담 기획’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대표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배우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예담 대표로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진수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아마 진수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내가 ‘예담 기획’과 계약을 해서 ‘예담 기획’에 소속되면 더는 내 매니저로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인마, 이럴 때는 나보고 가지 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해? 다른 회사도 아닌 ‘예담 기획’인데?”
“네가 날 평생 책임진다면서?”
“네가 배우로서 대성하게 만드는 일이 내 일이고 이제 그걸 나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내가 계속 네 매니저를 하겠다고 고집부리면 그게 나쁜 거지.”
“지랄한다. 내가 딱 한마디만 할게.”
“뭐?”
“진수 넌, 예전에도 내 매니저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내 매니저야.”
“뭐?”
“만약 ‘예담 기획’과 계약을 할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내 매니저란 말이지. 그리고 예담에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예담하고 계약할 생각도 전혀 없고.”
“지랄! 미쳤어? 예담에서 계약하자고 하면 잽싸게 사인부터 할 생각을 해야지.”
내 말에 진수는 툴툴거리면서도 뿌듯한 표정이다.
솔직히 진수 또한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진수의 성격을 보면, 내가 ‘예담 기획’과 전속계약을 맺게 되는 과정에 자기란 존재가 걸림돌이 된다면, 두 번 생각조차 않고 스스로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선택할 친구다.
내 전생에서의 삶에서도 진수는 항상 그렇게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었고,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야 다시 내가 진수를 끌어당겼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무리 진수가 그렇게 행동하려고 하더라도, 이젠 철저히 그걸 내가 먼저 막아낼 것이다.
그게 내 전생에서 나도 모르게 진수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방법일 테니까.
“와~ 이건 무슨 냄새야?”
“북엇국이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웬 북엇국?”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도 아침에 속 푸는 데는 북엇국이 최고야. 그런데 넌 다 큰 처녀가 사내놈 우글거리는 집에서 잠이 오냐?”
“사귀는 남자친구 집에서 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쪼잔하게 굴어? 그런데 앞으로 나 이따금 여기 와서 자고 가면 안 돼?”
“뭐?”
“나 정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잠을 푹 잤단 말이야. 아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기억은 아예 없었던 것 같아.”
김 실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예나의 표정엔 간절함이 느껴졌고, 또 왠지 모르게 어제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이기도 했다.
“가자.”
“가긴 어딜 가? 너만 가면 되지.”
지수가 학교에 간 후에도 예나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갖은 핑계를 대면서 집에서 나갈 생각조차 않더니, 나에게 외출하자고 했다.
“우리 대표님 만나러 가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아무튼 일어나. 대표님께 남자친구 생기면 먼저 소개해 드리기로 했단 말이야.”
“하~아~ 인마, 내가 어떤 놈인 줄 알고 함부로 남자친구니 뭐니 해?”
“어떤 놈 이긴 뭐가 어떤 놈이야. 내 남자친구지. 국민 여배우 서예나의 남자친구.”
결국 며칠 후에 밥이나 한 끼 하자는 선 대표를 오늘 만나게 생겼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예나는 마치 갓 결혼한 새색시나 된 것처럼, 내가 입을 옷을 챙겨주겠다면서 내 방으로 밀고 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