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적(1) >
흔적(1)
백작은 나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꽤 많은 개체를 잡긴 해서 자네가 원하는 만큼, 아니 이 창고에 있는 걸 다 주어도 괜찮네만, 정말 이런 거로 괜찮겠나?”
“네! 저에게는 꼭 쓸 데가 있는 물건이니까요. 오히려, 다 주시면 감사하죠!”
저게 다 얼마야.
침이 고이다 못해 흐를 것만 같다.
“흠. 그렇다면 이 창고에 있는 사체 전부 가져가게. 내 창고지기에게 말해놓지. 창고도 사체를 다 처리할 때까지 사용해도 좋네.”
“감사합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연신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짜, 백작가가 나를 먹여 살리는구나!
아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거 아닌가?
“우리로서는 처리하는 데 골이 아픈 것들인데, 자네가 가져간다고 하면 우리가 고맙지.”
백작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디멘션 늑대를 해체해서 팔아도 그렇게 큰 돈벌이는 안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98층에서 지구로 내려갈 일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과거에는 여기서도 차원석이 비쌌다고 한다.
“예전에는 ‘텔레포트 장치’의 동력원으로 쓰였는데, 남은 장치들이 전부 고장이 나서 이제 더는 활성화할 수 있는 것들이 없네. 그래서 차원석 산업은 끝이 났고, 이제는 평범한 돌덩이와 크게 다르지 않지.”
그런 이유로, 98층에서 차원석을 비롯해 디멘션 늑대 부산품은 별 가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구로 내려가서 판다면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백작가가 주기에는 너무 민망한 선물이군.”
“저에게는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아니면 부탁을 하나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백작가와의 정식적인 거래를 원합니다.”
“거래라······ 알 것 같군.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게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더 많은 차원 늑대의 사체가 필요하다.
이건 어마어마한 돈이 되는 물건이니까.
그리고, 백작은 츄르와 캣닙을, 백작가는 비정기적으로 공급받는 라면과 커피가 필요하다.
백작과 나는 그 자리에서 구두 계약을 맺었다.
“좋아. 자세한 공급량과 사체는 나중에 문서로 정리하는 거로 하지. 이거, 백작가가 너무 이득을 보는 장사가 아닌가 싶어 민망하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앞으로 더 돈독한 관계가 될 수 있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백작가에 필요한 물건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대신, 정기적으로 사냥하는 디멘션 울프를 받는다.
어차피 북부 산맥을 타고 주기적으로 내려오는 녀석들이라, 차고 넘치게 잡는다나?
주기적으로 공급받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으니, 국내 등탑계에 닥친 위기를 돕기에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백작과의 계약을 마치고, 나는 천장까지 쌓인 디멘션 울프 사체를 보며 웃었다.
“이게 황금 탑이구만. 그런데, 여기는 텔레포트 장치 말고는 차원석을 안 쓰나? 지구에서는 다른 곳에도 종종 쓰이는데.”
차원석은 텔레포트 마법이나 아공간의 원자재다.
지구에는 그런 공간과 관련된 스킬을 전문적으로 배운 마법공학자 특성 각성자들도 존재하고, 보통 그런 사람들이 아공간 주머니를 제작하곤 한다.
전에 연금술사 안도원의 딸을 납치하려던 놈이 사용했던 텔레포트 스크롤에도 쓰이는 물건이기도 하고.
마법 공학의 발전은 새로운 산업 혁명 시대를 열기도 했다.
아공간 주머니뿐 아니라 마나 스톤을 에너지원으로 작동하는 기계 장치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98층에 올라온 뒤에는 그런 어마어마한 기술력이 사용된 마법 공학 장비 같은 걸 본 적이 없네.
백작에게 듣자 하니, 고장 난 텔레포트 장치는 현재 설계 도면이나 수리법이 소실되어 수리 불가능하다고 한다.
마법 공학이 98층에서는 일종의 로스트 테크놀로지 같은 게 아닐까?
내가 알기로는 등탑자 중 그 마법 공학 특성 가진 이들도, 등탑 중 어떤 유적지 같은 곳에서 습득할 수 있었다던데······.
98층에도 그런 유적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윌리엄을 찾아가서 마법 공학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네.
“쩝. 그래도 아쉽네. 98층의 높은 마법 수준이라면, 분명 어마어마한 마법 공학 장비들이 넘쳐나겠지 싶었는데.”
그런 물건을 구할 수 있다면,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훨씬 고가치한 물건이 될 거다.
뭐, 98층에서는 마법 공학이 사장된 걸 생각하면,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어쨌든, 차원석을 이렇게 얻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야?
이것만 해도 족히 수십, 아니, 수백억 원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자, 한 번 차원석을 꺼내 보자고!”
나는 디멘션 울프의 배를 갈라서, 심장 부근에 있는 차원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차원의 틈’에 넣었다.
소중한 것들이니까 최대한 안전하게 보관해야지.
그런데······.
【‘차원의 틈’에 ‘차원석’을 흡수시키겠습니까?】
【YES】【NO】
“어?”
차원의 틈에 차원석을 흡수시킨다고?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메시지를 보다가, 반사적으로 YES를 눌러보았다.
【차원의 틈 해방을 진행합니다】
─현재 해방률 10%
“오, 뭐지? 해방?”
나는 곧바로 디멘션 울프 9마리의 배를 갈라, 차원의 틈에 차원석을 10개 먹였다.
【2단계 차원의 틈이 해방됩니다】
【차원의 틈 2단계】 【Lv.41 이상】
- 스킬
1) 아이템 보관 : 차원의 틈에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현재 0/50kg.
*아이템의 단계에 따라 무게가 변동됩니다.
2) 아이템 버프 : 보관된 아이템에 따라 사용자에게 이로운 효과를 부여합니다.
3) 단거리 텔레포트 : 10분에 한 번, 원하는 곳으로 100m까지 공간을 가르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를 본 나는 화들짝 놀랐다.
“와, 씨 그 차원의 틈에 넣을 수 있는 무게만 50kg이라니! 그럼 내 무게 한계 20kg과 합쳐서······ 70kg?”
정신이 아찔해지는 무게.
이제는 무려 성인 남성 한 명에 달하는 무게를 들고 탑 안과 밖으로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텔레포트도 생겼어.”
말해 뭐하나 싶지만, 텔레포트는 등탑자들이 모두 원하는 스킬이다.
방어막보다 더 확실하게 목숨을 지킬 수단이면서, 보스 몬스터를 기습하는 데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니까.
“진짜 대박이네. 그럼, 프랜차이즈 사업도 시작할 수 있고 차원석도 대량으로 수출하고······ 차원의 틈이 더 성장하면 할 수 있는 게 대체 몇 개야!”
입이 귀에 걸린 나는, 다음 디멘션 울프의 배를 가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잠깐. 그런데······ 내가 방금 얼마 치를 먹인 거지?”
손톱만 한 차원석의 가격이 1,200만 원쯤 했던 것 같은데, 주먹만 한 차원석의 가격은 대체 얼마나 될까?
그런데 그런 차원석을 한 개도 아니고 열 개는 먹였다.
등을 타고 천천히 식은땀이 흐르고, 힘이 들어간 주먹에 땀이 배어 나왔다.
“이거······ 막 먹이면 안 되겠다.”
*
디멘션 울프들의 배를 갈라 강무진에게 납품할 차원석을 빼낸 뒤, 나는 윌리엄을 찾았다.
물론, 마법 공학에 관련된 아이템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
하지만, 윌리엄에게 들은 말은 실망스러웠다.
“정수. 현재, 마법 공학에 관련된 지식이나 아이템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네. 과거 마왕과의 치열한 전투 중, 마왕군의 손에 마법 공학 아이템이 넘어갈 걸 우려한 마법공학자들이 이주 선단을 만들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버렸거든.”
“아······ 피난을 간 거군요.”
“그렇지. 그때 마법 공학에 관련된 기술도 대부분 소실되었고. 파괴된 텔레포트 장치도 많다고 알고 있네. 설계도도 구할 수 없고 가르칠 기술자가 없으니 점차 사장된 거지.”
나로서는 매우 아쉬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내 표정을 본 윌리엄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너무 실망하지는 말게. 마법공학자들이 다른 차원에 가져간 건 대부분 전쟁에 쓰이는 물건들이고, 아직 생활에 쓰이는 물건들은 종종 발견되곤 하거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물건이 있다면 비싸진 않아도 수요가 있을 테니 돈이 되겠지.
그런데, 다른 차원이라······.
차원, 하니까 생각난 것이 있었다.
탑은 각 층이 별개의 공간처럼 작동한다.
그리고, 탑은 그 별개의 공간들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며, 워프 게이트를 통해 층과 층이 연결된 구조지.
즉, 차원과 차원이 연결된 거다.
거기에, 마왕군과 싸우던 마법공학자들이 다른 차원으로 피난을 갔다는 힌트와 트레이닝 룸 뒤쪽에 있던 엘리베이터 같은 역할의 워프 게이트.
여기에, 탑 내부 ‘유적 테마의 던전’에서 마법 공학에 관한 기술을 얻은 지구의 마법공학자들을 생각하면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혹시, 마법공학자들이 피신한 곳이 탑의 아래층 아닐까?
그런 추측을 하고 있는데,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
“사실, 이 근처에도 그런 물건이 있으리라 추정되는 유적이 있기는 하지. 고대 마도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유적지일세.”
이거, 백 퍼센트 던전이다.
하긴, 마을 지하에 괴물이 봉인된 던전 같은 게 있다고 했으니, 그런 던전이 몇 개쯤 더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이나 아이템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하다.
뭐, 아카식 트레이닝 룸도 그런 던전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 혹시 마법공학과 관련 없더라도, 알아두면 좋겠지.
나는 윌리엄을 향해 말했다.
“마도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유적이라니, 정말 궁금하네요. 혹시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윌리엄은 잠시 턱수염을 쓸며 고민했다.
“흠······ 사실, 그 유적을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네. 하지만, 문제가 있어. 사실, 가장 큰 문제지.”
얼굴이 굳어진 윌리엄을 보며, 나는 살짝 긴장했다.
무려 레벨 130의 마법사가 문제라고 할 정도라면, 안에 위험한 괴물이라도 있는 걸까?
경비대원들이 지키는 종탑의 지하처럼 말이지.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문제죠?”
“문이 안 열리네.”
“네?”
위험한 괴물이 있는 게 아니라, 문이 안 열린다고?
그 황당한 말에 잠시 눈만 끔뻑이며 윌리엄을 보자, 윌리엄은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 유적의 문은 그 누구도 열지 못했네. 과거 고대 마법 공학 유물을 탐냈던 바스텔 왕국이나 노던 왕국도, 심지어는 제국도 말일세, 그 문을 천 명의 병사가 당기고, 밀고, 심지어는 마법으로 폭파해도 끄떡없었네.”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었길래 별짓을 다 했는데도 부수어지기는커녕 열리지도 않는 걸까?
오히려 대놓고 위험하다는 냄새가 풍기니까, 이제는 호기심이 동한다.
98층에서 그런 장소는 항상 나에게 이득이 되는 장소였거든.
“그래도 가보고 싶어요. 안내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 요청에, 위험하다고 엄포를 놓았던 윌리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껄껄 웃으며 턱수염을 쓸었다.
“허허! 정수, 자네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지. 마법사로서 아주 바람직한 탐구심이야. 그럼 지금 바로 떠나세나. 여기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네.”
나는 윌리엄을 따라 마을을 나섰다.
윌리엄이 가리킨 곳은, 톨른 마을보다 더 북서쪽에 있는 산.
레드문이 끝날 때마다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몬스터들의 영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윌리엄을 따라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었다.
산을 넘고 내리며 한참을 걸어, 저 멀리 눈 덮인 설산이 보이는 높은 산의 중턱쯤.
“윌리엄, 아직 멀었나요?”
“아니. 이 근처일세.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저 폭포 뒤에 입구가 있지.”
윌리엄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꽤 큰 폭포가 흐르는 곳이 있었다.
휘유, 저런 곳에 입구가 있다니 발견된 게 신기할 정도네.
그렇게 폭포 뒤쪽으로 향하는 샛길을 통해 들어가자. 상상보다 훨씬 큰 문이 자리했다.
“어떤가, 정수. 장관이지 않나? 그 먼 옛날에 만들어졌음에도 이런 거대한 문에 새겨진 장식 하나까지 풍화되지 않은 게 말일세. 문외한들이 마법까지 사용해서 터트리려고 했지만, 손상되지 않았지. 그 당시의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물건이야.”
“아, 네······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나는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윌리엄의 말대로, 정말 문에 새겨진 문양 하나하나가 손상되지 않아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 문에 새겨진 문양들의 생김새가 익숙하다?
나는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저 문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열 수만 있다면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고대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사료와 귀물들이 쏟아져 나올······.”
잔뜩 흥분해서 열변을 토해내는 윌리엄의 긴 혼잣말을 무시하고, 문에 손을 댄 그때였다.
【자격요건 확인 중······】
【‘아카식 아머리’의 소유를 확인했습니다】
【마나를 불어넣어 출입문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아카식 트레이닝룸을 처음 발견했던 때.
그때와 비슷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기······ 윌리엄?”
“그런 위대한 발견을 하는 마법사! 나는 어릴 적 그런 마법사가 되고 싶었네! 정수, 고대 유적이라니,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정말 마법사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윌리엄!!”
“아잇! 깜짝이야. 아직 귀가 멀지는 않았네. 왜 그렇게 부르는 건가?”
그와 동시에 나는 문에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었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환영합니다】
“이거 열리는데요?”
쿠구구······.
천천히 열리는 문과 나를 번갈아 보며 눈을 끔뻑거리던 윌리엄.
윌리엄은 천천히 눈이 커지더니, 지팡이를 내던지며 펄쩍 뛰었다.
“이, 이 문이! 이 문에 열리다니! 정수! 그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