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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미발견 지역에서 꿀 빱니다-44화 (44/69)
  • 더 큰 세계, 더 많은 꿀(5)

    더 큰 세계, 더 많은 꿀(5)

    나는 눈앞에 있는 고대 자료들을 보며, 윌리엄에게 다시 물었다.

    “고대어라면······ 고대인들이 이걸 쓴 거라고요?”

    “그렇다네, 정수. 이것들은 전부 고대의 유물로서,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물건들이지. 아직 그 가치를 입증하진 못했지만, 그 자체로서 귀한 물건들이야. 언젠가 해석할 수만 있다면 진가를 발휘할 게 분명하네.”

    윌리엄은 선망이 담긴 눈으로 보관실을 둘러보았다.

    “하, 하하. 그렇군요.”

    나는 그런 윌리엄을 보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화장실 깨끗이 청소하는 법】

    【까칠한 우리 고양이 육성법】

    【입 냄새 제거하는 데 좋은 약초 108선】

    처음에 봤던 라퓨타 마탑의 논문을 제외하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그냥 생활 꿀팁 같은데, 이게 선인들의 지혜라니······ 그래, 뭐 관점에 따라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

    비록, 윌리엄을 비롯해 마법사들이 원하는 지식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나는 천천히 고대어 서적들을 둘러보다가, 단 한 장, 아주 낡아 유리로 만든 보관함에서 꺼내면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 같은 양피지 한 장에 시선을 멈췄다.

    【아카식 비공정 아크의 제독 노아의 마지막 항해일지】

    “아카식?”

    이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봐도 아카식 아머리와 관련된 일지 같은데.

    한 번 읽어볼까?

    ─ ······마지막 항해를 시작하며. 우리가 본 것은 노스이스트 설산을 새까맣게 칠하고, 황금빛으로 빛나던 너른 들판을 불태우며 진격하는 마왕군과 악마 추종자들, 그리고 광폭해진 몬스터들의 파도였다. 우리는 명령대로 놈들의 동쪽으로 향해서 기습을 준비······.─

    한 페이지 분량의 항해일지를 읽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웬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카식 아머리’의 소유를 확인합니다】

    【탐색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아카식 비공정, 아크 탐색】

    ─아카식 워리어의 고대 병기, 비공정 ‘아크’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아크를 추적하고, 재기동하십시오.

    ─진행도 ‘1/6’

    ─보상 : 비공정 아크

    “뭐?”

    그러니까, 아카식 워리어들이 사용하던 아크라는 비공정이 있고, 그걸 찾으라는 거겠지?

    내 추측이 맞는 듯, 곧 바닥을 따라 길게 그려진 푸른 선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아카식 트레이닝룸을 처음 발견했던 그때처럼, 따라오라는 듯이.

    내비게이션까지 깔아주다니, 친절하네.

    진행도로 봐서, 앞으로 5개의 흔적을 더 찾아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윌리엄에게 물었다.

    “윌리엄, 혹시 마법사 길드마다 이런 도서관이 있나요?”

    “음? 모두 있는 건 아니네. 규모가 큰 길드에만 있지. 이곳 윈터우드의 도서관이 큰 편이긴 하지만, 더 큰 도서관도 꽤 된다네. 가장 가까운 건, 저 멀리 산을 넘어가면 나오는 북쪽 도서관이겠군.”

    윌리엄이 가리킨 방향은 정확히 내비게이션과 같은 방향이었다.

    아무래도, 다음 찾아야 할 일지는 북쪽의 도서관인 것 같은데?

    “윌리엄, 저 산을 넘는 건 힘든 일이겠죠?”

    “산 말인가? 흠. 힘들게야. 저 산맥은 북부에서도 넘기 힘든 곳 중 하나거든. 몬스터도 많고, 얼어 죽기도 하지. 왜, 북쪽 도서관에 가보고 싶나?”

    “아, 네. 여기보다 큰 도서관이라니, 관심이 좀 생기긴 하네요.”

    “산을 크게 돌아가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몇 달은 걸릴 걸세.”

    당장은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을 비울 수가 없다.

    아무래도 설산을 넘을 방법을 찾던가, 오랜 시간을 낼 수 있을 때 진행하기로 하고, 이건 잠깐 묻어두는 수밖에.

    그래도 이제 곧 썬더 볼트의 숙련도를 100%까지 올릴 수 있을 테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쉽네요. 당장은 할 일이 많으니, 이 윈터우드에서 공부하는 거로 만족할게요.”

    “그래, 그러지. 이 윈터우드 도서관에도 배울 게 많다네.”

    윌리엄이 홀홀 웃으며 턱수염을 쓸었다.

    *

    그렇게 윈터우드에 라면 가게를 열 준비를 마친 뒤.

    나는 남은 컵라면과 봉지 라면, 맥주를 토미에게 싹 다 넘기고 지구로 돌아왔다.

    식당 운영을 하려면 물건을 꽤 많이 쌓아놔야 할 거다. 이번에 내려가서 잔뜩 싸서 들고 올라와야 할 듯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니 엄청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게 다 뭐야? 이제 슬슬 재배해도 되겠는데?”

    고아원 뒷산의 임야.

    밭으로 만든 뒤 아이스 사파이어까지 박아 넣은 그곳에서, 무성하게 자란 약초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400평 정도의 땅에 대략 3,500여 뿌리의 약초가 자라고 있다.

    “이 정도면······ 하루에 100뿌리 정도는 출하할 수 있겠는데?”

    뽑아서 새로 약초를 심으면 온전히 자라기까지 약 한 달.

    하루 100개를 출하한다고 치면, 거의 쉬는 일 없이 물건을 팔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투견 길드에 납품하기로 계약된 물량이 한 달에 100뿌리 정도.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이 그 35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국내 등탑자의 약초 수요는 하루에 6~7천여 뿌리에 이른다. 거기다가 수출량까지 따지고······ 최근 등탑자 외 일반인들의 기능성 식품에도 약초가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은······.

    “내가 생산하는 양은 소농업에 불과하지.”

    하지만 내가 생산하는 약초의 질이 압도적으로 좋다는 점이 강력한 경쟁력이 되어줄 거다.

    “태산에서 생산하는 건 평균 하급에서 조금 높은 수준이라고 했는데, 내가 생산하는 건 상급이니까.”

    돈 많은 고객들께서 좋은 물건부터 선점하려고 경쟁할 테니까.

    “곧 큰돈이 들어오겠어.”

    흐뭇하게 웃으며 약초밭을 살피자, 이 약초가 이만큼 자랄 수 있게 관리한 일등 공신, 해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나야!”

    “오빠! 왔어?”

    “어. 나 없는 사이에 진짜 고생했다, 해나야. 정말 잘 관리했다. 너······ 소질 있는데?”

    나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 녀석에게 칭찬이란 걸 해줬던 게 언제였더라?

    “헤헤······ 별 관리를 안 해줘도 잘 자라던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해나는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자랑스러울 만도 한 게, 아이스 사파이어가 뿜어내는 강력한 한기가 고아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밭에만 맴돌도록 제어한 게 해나였다.

    녀석. 처음에는 무리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 정도까지 훌륭하게 해낼 줄이야.

    그때, 해나의 뒤로 난 길을 따라 원장님이 올라오시더니 눈을 크게 뜨셨다.

    “정수 돌아왔구나? 그런데, 이게 다 뭘 심어놓은 거니? 요즘 해나가 뒷산에 자주 오르는 것 같더라니, 언제 이렇게 큰 밭을 가꾼 거야?”

    “아, 원장님. 다녀왔습니다. 이건 탑에서 가져온 약초인데, 앞으로 우리 고아원을 먹여 살릴 거예요. 거기에 해나가 꼭 필요하고요.”

    원장님은 잠시 해나와 나, 약초밭을 둘러보다가 서글서글한 눈으로 웃으셨다.

    “어쩐지, 해나가 요즘 많이 밝아졌더라. 정수 네가 동생들을 챙기겠다고 하더니, 그 약속을 이렇게 빨리 지킬 줄은 몰랐다.”

    “이제 시작이에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게 해줄 거예요.”

    그래. 이건 사업의 시작에 불과하니까.

    나는 서리가 덮인 약초밭의 싸늘한 기온에 몸을 살짝 떠는 원장님께 외투를 벗어드리며 말했다.

    “여긴 추우니까 먼저 들어가 계세요.”

    “그래.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거라. 나도 도울 테니까.”

    “괜찮아요. 저희끼리 할 수 있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여태까지 고생만 하셨으면서.”

    원장님의 등을 떠밀어 내려보낸 나는 약초밭을 돌아보았다.

    이거, 원장님 도움은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넓은 약초밭이라면 나 혼자서 뽑는 것도 일이겠는데?

    거기다가, 탑을 들어가야 하니 매번 내가 다 뽑을 수도 없는 노릇.

    거래처를 만들고, 약초를 포장하고 유통하는 문제도 있으니, 조만간 같이 약초를 뽑을 사람을 구해야겠다.

    그렇게 약초밭을 마저 살피고 내려온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재중 전화가 왜 이렇게 많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쌓여 있던 문자를 먼저 확인했다.

    ─정수야! 아직 탑이냐? 식충 식물 대량 재배에 성공했고, 인제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서울로 향하던 자이언트 로커스트 한 무리를 성공적으로 구충했다! 곧 뉴스 나갈 거니까, 내려오면 확인해봐라!─

    아하, 이래서 관계자들한테서 연락이 와있던 거구나?

    나는 한수 형에게 간단한 안부와 함께 확인해 보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균열감시대응청장 강무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김정수입니다.”

    ─축하한다 김정수. 작전 성공이군. 약초 판매 루트, 뚫어주지.

    좋아, 계획대로다.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하지.

    강무진은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본론만 얘기하더니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뭐, 나도 말이 길어지는 것보단 이게 편하지만.

    그런데, 식충 식물이 얼마나 효과가 좋았길래 한수 형이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뉴스를 확인하라고 한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아원으로 들어가자, 원장님과 민희가 앉아있는 다용도실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식충 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응? 다들 무슨 일인데 TV 앞에 앉아있어요?”

    “오빠 저것 좀 봐봐.”

    “뭔데.”

    원장님이 대답했다.

    “지금 난리다, 난리. 그 왜, 인명 피해 내고 농작물 다 갉아먹던 큰 메뚜기떼 있잖아? 그걸 정부에서 해결하고 있다는구나.”

    원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채널을 몇 개 돌리셨는데, 어떤 채널을 틀어도 식충 식물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제 오후 2시 30분, 균열감시대응청에서는 자이언트 로커스트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데스 마우스’라는 식충 식물을 도입했습니다. 전문가들의 계산에 따르면 로커스트 무리의 완전 박멸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는데요. 영상 보고 오시겠습니다.─

    뉴스에서는 내가 봤던 비공개 라이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빼곡하게 심어진 식충 식물을 조명했다.

    카메라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길게 심어진 붉은 입술 꽃이 하나의 벽을 이룬 게 아주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수를 셀 수도 없이 새까만 로커스트 무리가 달려들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늘을 까맣게 채운 자이언트 로커스트 무리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대응 병기를 내놓은 균열관리대응청에서는 자이언트 로커스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강원도 일부를 봉쇄, 순차적으로 데스 마우스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기나긴 해충과의 전쟁 끝에,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원장님은 그 영상을 보시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

    “저놈들 때문에 다치고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니? 거기다 저놈들이 풀이든 가축이든 다 갉아먹는 통에 물가는 정말 얼마나 올랐는지······ 한동안 장보기가 겁났는데, 이제 조금 괜찮아질 것 같구나.”

    “다행이네요.”

    그때, 불쑥 내 눈앞에 스마트폰이 들어왔다.

    민희가 내민 스마트폰에는 인터넷 기사들이 가득했다.

    “TV고 인터넷이고, 저 얘기만 한가득 이야.”

    ─탑에서 나온 절망은 탑에서 나온 희망으로. 데스 마우스를 들여온 제2의 문익점은 누구?

    ─대재앙을 구한 것은 누구인가? 그 정체는 외국계 기업.

    ─한국을 구한 외국계 기업, 로커스트 박멸을 향한 희망의 불씨에 국내외 대형 길드들 앞다투어 접촉 중.

    처음에 말했던 대로, 강무진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공급한 것으로 처리되었나 보다.

    그러니 외국계 기업이 해결한 일이 되었지.

    그리고,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대형 길드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저놈들에게 당장 팔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 부분은 이미 강무진 청장과 합의가 끝난 부분이고,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치밀하게 계산해서 대형 길드에 타격을 줄 것이다.

    그 기사들은 같이 보시던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누군진 몰라도, 정말 큰일 했구나. 약초 수급에 문제가 생겨서 등탑을 멈추면, 국가 경제가 휘청할 뻔했다던데. 그리고 무엇보다, 저 메뚜기들을 처리하면 사람 안 다치고 말이다. 사람 안 죽고 안 다치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렇죠.”

    우리를 전부 거둬 기르신 원장님답다고 해야 할까? 거듭 피해받은 사람들부터 생각하신다.

    원장님의 반응을 보니 조금 뿌듯하기도 하네.

    내가 원장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민희가 물었다.

    “오빠, 저 식물도 탑에서 나온 거지?”

    “그렇지.”

    “와, 그럼 몬스터로 몬스터를 잡을 생각을 한 거야? 누구인진 몰라도 진짜 똑똑하다.”

    내가 공급한 거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다들 이렇게 대단하다고 하니, 괜히 어깨랑 같이 광대가 올라가는 것 같다.

    내가 대답 대신 웃고만 있자, 민희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근데, 오빠. 왜 그렇게 바보같이 웃어?”

    “그런 게 있다.”

    나는 민희의 머리를 헝클이고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음지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 기분······ 이게 다크 히어로가 된 기분인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걸.

    물론, 기분이 좋은 진짜 이유는.

    저 뉴스가 돈이 들어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

    같은 시각.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태산 길드의 본사에는 전 간부 비상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대재해를 막을 힘이 나타났다.”

    상석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손에 없지.”

    침묵 끝에,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 힘을 얻지 못한 자들은 도태될 거고······.”

    남자는 태산 길드의 마스터이자 국내 랭킹 3위.

    아시아 최고의 브루저로 뽑히는 거산(巨山) 강태산이었다.

    “힘을 손에 쥔 놈들이······ 우리의 자리를 야금야금 뜯어먹기 시작할 거다. 언젠가는 우리 위에 군림하려고 들겠지.”

    그가 억누른 숨을 천천히 내쉬며 탁자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두꺼운 쇠로 만든 탁자가 엿가락처럼 구부러졌다.

    끼기긱!

    잠시 침묵이 맴돌고, 강태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무슨 수를 쓰든 공급책을 찾아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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