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세계, 더 많은 꿀(2)
더 큰 세계, 더 많은 꿀(2)
탑은 각 층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면서 한층 한 층을 직접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탑에 올라와 98층에 표류 됐을 때, 마왕을 사냥하라는 목표가 제시된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최종 목표를 달성하고 다음 층으로 이동해 ‘웨이포인트’를 찍고 나면, 내가 0층을 통해 98층으로 올라오듯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탑을 올라갈 때처럼 내려갈 때도 조건이 있다.
자신이 올라갔던 최고층을 기준으로 밑으로 10층까지는 ‘마나 스톤’이라는 에너지원을 사용해서 이동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다.
진짜 문제는 최고층을 기준으로 10층 이상을 하강할 때다.
각 탑의 입구가 있는 0층을 제외하고 10층 이상을 하강하게 되면 ‘역행자’라는 상태가 되며 랜덤으로 디버프가 부여된다.
그중에서는 등탑자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저주가 속해있다.
이게 본인의 목숨만 위험한 거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해나가 걸린 저주처럼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저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게 문제지.”
물론, 해나의 부모님이 무리해서 탑을 역행하려다가 저주에 걸렸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길드원들을 구하기 위해 탑을 역행하다가 강력한 저주에 걸려 목숨을 잃은 사례가 꽤 많았으니 또 모르는 일이지.
저주에 걸리면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랭킹이 밀리거나, 심할 경우 등탑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최고층 기준 10층 밑으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제한 없이 탑의 모든 층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내 눈앞에 있는 워프 시스템은 그런 탑의 규칙을 가볍게 무시한다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아니, 그런 제한이 없으면 이거 사기 아니야?
하긴, 애초에 처음부터 98층에 도착해서 빠르게 강해지고 돈도 많이 번 내가 사기를 논할 수는 없지.
“보자······ 사용 방법 1번이 마나 스톤 삽입. 마나 스톤을 넣어야 하는 건가?”
각 숫자 위에 동그란 삽입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빛바래고 깨진 마나 스톤이 박혀 있었다.
오래되고 힘을 잃어서 손상된 모양이다.
딱 한 곳만 빼고.
대부분 힘을 잃은 마나 스톤이 박혀 있는 가운데, 딱 한 층, 63층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정순한 최상급 마나 스톤】
─임의로 분리할 시 파괴될 수 있습니다.
무려 최상급인데다가 ‘정순한’이다.
이거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다.
아니, 애초에 만들기조차도 힘들다.
“뭐, 디버프가 없다고 해도 동력원이 필요하다는 거구나?”
마나 스톤은 농축된 마나를 품고 있는 보석으로, 무기를 제작하거나 아티펙트에 마법을 부여, 시약을 제작 등 마나가 필요한 모든 곳에 쓰이는 만능 동력원이다.
하급 마나 스톤의 경우 100g에 10만 원은 하니까, 최상급 마나 스톤이면 같은 무게에······ 대략 1억쯤 하겠지.
심지어 ‘정순한’이라면······ 대체 얼마를 써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고작 한 층을 하강할 때마다 수천만 원어치의 마나 스톤을 사용해야 하는 일반 등탑자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이점이 있는 게 사실.
하지만 이래서야, 당장은 써먹기도 힘들겠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네.”
고아원 애들이 기어코 탑에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내가 도우러 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그런데······ 열려 있는 층에 뜬 이건 뭐지?”
불이 들어와 있는 63층 버튼 위에는, 악마 이모티콘처럼 생긴 모양이 표시되고 있었다.
나는 악마 이모티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카식 워리어 미션】
─탑 63층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진행 중인 ‘마왕군’을 격퇴하십시오.
*권장 레벨 : 75
“마왕군?”
마왕은 98층에 있잖아?
설마 마왕이 하위층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나저나 왜 여기만 불이 들어와 있을까?
“세계 랭킹 1위가 62층을 공략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 불이 들어온 이유는, 아직 공략이 안 된 층이라서?”
알려진 바로는 등탑자들은 딱 62층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음이 63층이란 건데······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아니면 우연인 걸까?
“뭐가 됐든, 아직 내가 도전할만한 레벨은 아니네. 권장 레벨 75라니.”
물론 98층의 몬스터보다는 약하지만, 아직 레벨 43인 내가 상대할 레벨은 아니다.
그런데, 잠깐.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나는 몬스터와 싸우는 아카식 워리어들의 벽화를 지났다.
다음에는, 아카식 워리어를 양성하는 트레이닝 룸.
그다음에 나온 워프 시스템은 다른 층에서 나오는 마왕 군 퇴치 퀘스트가 나왔지.
그렇다는 건······.
“설명, 훈련, 투입. 혹시, 아카식 워리어라는 건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건가?”
공간의 배치와 목적을 생각해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다.
그런데, 이런 스킬이 대체 왜, 하필이면 나에게 있는 거지?
설마······ 내가 마왕과 싸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운명이라는 뻔하고 쉬운 이유 따위로.
“안 돼.”
난 거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마왕과 싸우는 게 아니라, 약초나 키우고 라면집이나 운영하면서 돈 잘 벌고 살고 싶은데······.
“후······ 지금 고민하면 뭐 하냐? 왜 아카식 아머리 같은 게 나한테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일단, 강해지고 생각하자!”
나한테는 눈앞의 생존이 급하니까 말이지.
나는 처음에 이곳에 들어온 목적대로, 3단계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하지만, 3단계 트레이닝을 시작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Lv.53 훈련용 목각인형】
나와 레벨 차이가 10이나 나는 목각인형은 2단계에서도 상대해봤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쿵, 쿵.
“왜 두 마린데!!”
이번에는 상대가 둘이라는 것.
레벨 53짜리 목각인형 두 기를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하지만, 김정수 사전에 포기란 없지!
나는 이를 악물고 놈들에게 덤벼들었다.
“분신! 썬더 볼트! 마나 붐! 쇼크웨이브!”
파지지직! 콰앙!
허공을 수놓는 화려한 기술들.
그러나, 아직 두 놈을 한 번에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우드득!
쿵, 퍼벅, 퍽!
“끄아악!”
이번에도 나는 숨 쉴 틈조차 없이 얻어맞았다.
평소의 두 배로.
나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숨을 고르며, 바닥을 수놓은 이빨을 세었다.
“이백십칠, 이백십······ 치과의사는 두 명인데, 왜 이빨은 세 배로 빠지냐? 아이고, 진짜 죽겠다.”
역시, 이 실력으로 63층에 가는 건 힘들겠어.
“후······ 그래도 언젠가 폭풍 성장해서, 63층 마왕군 기지에 꼭 놀러 가주마.”
98층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나 싶지만.
나는 복수심에 새로 돋은 이빨을 부득부득 갈며, 트레이닝 룸을 나왔다.
두 놈을 한 번에 상대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
트레이닝 룸에서 나오고 이틀 뒤.
나는, 토니와 함께하는 대사업! 98층에서의 라면 가게 창업을 준비했다.
토니는 라면을 시식해본 뒤, 감동과 극찬을 하며 요리도구만 봐도 벌벌 떨던 PTSD를 극복했다.
“이거라면 셰프 슬레이어도 인정할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놈의 셰프 슬레이어는 대체 누구야.
이쯤 되니까 얼굴 한번 보고 싶네.
“극악무도한 놈! 기다려라! 이번에 배운 비기, 정수식 공기접촉을 이용한 특제라면 맛을 보여줄 테니!!”
토니는 한 번 불탔다가 이제 새순이 돋기 시작한 숲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이게 두려움에 맞서는 토니의 방식이겠지.
한 번 꺾였던 사람일지라도,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을 보니까 좋네.
“문제는 가게를 어디에 내느냐는 건데······.”
이 마을은 농업 위주의 마을로, 소득 수준도 그리 높지 않고 인구도 200명 남짓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장사를 시작하면 손님이 없지는 않겠지만······ 큰 돈벌이는 힘들겠지.
그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 의욕을 되찾은 토니가 제안했다.
“톨른 마을에서 말을 타고 한, 두 시간만 이동하면 도시가 있습니다. 거긴 어떨까요? 톨른에 오기 전 마지막 도시인 데다가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 나리들께서도 들르는 길목이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한, 두 시간이라······ 그 정도라면 매일 서울로 출퇴근하는 경기도민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네.
여차하면 토니네 가족은 그 근처로 이사를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나야 상황이 꼬이면 납품만 하면 되니까.
거기다, 나도 언젠가 도시로 갈 계획이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도 지구로 내려가 팔만한 아이템이 잔뜩 있었는데, 도시로 가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들이 있을까?
그걸 지구로 가져가 팔면······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되는 거지!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역시 장사를 하셨던 분이라 그런지, 감각이 좋네요. 그렇게 하죠. 그런데······ 가다가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떡하죠?”
최근 사건이 많았다.
토니를 쫓아온 빚쟁이들, 레드문으로 강화된 다이어 울프, 괴물 같은 군단장과 그보다 더 괴물 같은 지하의 괴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끼를 상대로 고전했던 내가 이 무서운 곳을 나다닐 수 있을까?
하지만, 토니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쭉 편 채 자랑스럽게 웃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삼촌과 이야기를 끝냈거든요. 삼촌이 자주 가시는 곳이기도 해서, 동행해주신다고 하네요.”
뭐야, 이미 창업할 곳을 정해놓고 윌리엄 포섭까지 끝내둔 거야?
토니, 순박한 시골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 처리를 잘하네.
이거, 꽤 괜찮은 동업자를 찾은 것 같다.
“좋아요. 그럼, 시간을 더 끌 것 없이 바로 가게 자리를 보러 가죠.”
“네! 알겠습니다. 삼촌 모시고 올게요.”
그렇과 나는 윌리엄과 토니와 함께, 도시로 가는 마차를 타기 위해 마을 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어이구, 마차가 방금 출발했는데, 어쩐대요? 오늘 일찍 마감한다고 방금 간 게 오늘 마지막 마차인디.”
역참 관리인이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이걸 어쩐다······ 내일 출발해야 할까요?”
토니가 낭패라는 얼굴로 윌리엄에게 물었고, 윌리엄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마을 밖으로 발을 옮겼다.
“역참의 마차가 아니라도, 갈 방법이야 있지. 생각해보니, 마침 오늘이 출발하는 날이구만.”
“엇, 마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또 있나요?”
“그래.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양봉업자가 있는데, 마차에 꿀통을 잔뜩 싣고 도시로 납품을 나가네. 마침 오늘이 납품 날이야. 부업으로 운송도 해주고 있으니, 가능하겠지. 나도 종종 그 친구를 찾아가거든.”
꼼짝없이 하루를 미뤄야 하나 싶었는데, 방법을 찾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윌리엄의 뒤를 따랐다.
“다행이네요. 윌리엄, 덕분에 살았어요.”
그렇게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양봉업자의 집.
양봉업자의 집답게, 근처에는 털이 보송보송 돋아 생각보다 귀여운 꿀벌들이 열심히 꿀을 나르고 있었다.
뭐, 꿀벌 크기가 주먹보다 큰 건 차치하고 말이지.
“잭! 잭 거기 있나?”
“누굽니까?”
윌리엄의 부름에 집 문이 열리고, 40대 정도에 털이 수북해, 산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윌리엄! 오늘도 마차를 놓친 겁니까?”
“큼, 오늘도라니······ 그렇게 됐네. 세 명 탈 자리가 있겠나?”
“그럼요. 오늘 꿀통 수가 좀 적어서, 좁지만 다 탈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출발할 건데, 괜찮으십니까?”
“우리야 좋지. 고맙네.”
마차에 탑승을 마치고 출발하려는 순간.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던 양봉업자 잭이 별안간 마부석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잠깐!!”
투다다다!
어디론가 맹렬하게 달려간 잭이 폴짝 뛰었다가 떨어지며 주먹을 갈겼다.
콰앙!
“키에엑!”
잭의 주먹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건······.
【Lv.53 크레이지 호넷】
크레이지 호넷?
우리 동네 근처 균열에서 나올 예정인 그 몬스터다.
그런데 레벨 30대로 알려진 크레이지 호넷이 왜 이렇게 레벨이 높아?
98층이라는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가?
레벨이 높은 크레이지 호넷은 잭의 솥뚜껑 같은 주먹에 맞고도 죽지 않았는지 꿈틀거렸다.
그걸 본 잭이 바닥에서 바동거리는 크레이지 호넷의 위에 올라타더니, 파운딩을 갈겨댔다.
쾅! 쾅!
어우······ 파운딩이라니, 왜 내가 아픈 것 같지?
한참이나 주먹을 내리꽂던 잭은 마차로 돌아오며 침을 퉤, 뱉었다.
“빌어먹을 놈들, 조만간 말벌집을 족쳐야겠어. 올해만 벌써 꿀벌 몇 마리가 당한 건지.”
아무리 사나운 크레이지 호넷이라고 할지라도, 말벌이 꿀벌을 잡아먹는 건 지구랑 다를 게 없나 보네.
그런데, 나는 이 양봉장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여긴 식충식물이 없네요? 꿀벌도 삼켜서 그런가요?”
“아, 데스 마우스? 말벌은 여왕을 조져야 집을 옮기는데, 어차피 여왕벌은 데스 마우스 향에 끌리지도 않는 데다가······ 어, 잠깐만!”
투다다다!
응?
잭이 또 한 번 도약하더니, 날아드는 크레이지 호넷의 머리를 향해서 발차기를 날렸다.
그 이후 장면은 아까와 비슷했다.
“후······ 미안하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데스 마우스가 꿀벌까지 잡아먹어서 못 심어. 놈들 씨를 말리려면, 여왕을 족치는 게 최고······ 잠깐만!”
설마, 또야?
투다다다!
쾅! 쾅!
와, 내가 다 정신이 없네.
평소에도 계속 이러고 사시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보스 몬스터인 ‘크레이지 호넷 퀸’은 식충식물로 퇴치가 안 된다는 거지?
고급 정보를 얻었다.
하마터면 균열 대응에 큰 구멍이 날 뻔했네.
하지만, 나는 한순간 눈을 빛냈다.
내 눈앞에 있는 잭은 말벌퇴치 전문가다.
다시 말해, 균열을 통해 나오는 ‘크레이지 호넷’을 해결할 방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전문가라는 소리지.
나는 마차에서 펄쩍 뛰어내려 잭의 손을 붙잡았다.
“제발 알려주세요! 배우고 싶습니다!”
잭은 나와 토니, 윌리엄을 번갈아 보다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를? 양봉을?”
잭의 말에 윌리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수, 자네는 인사말이 항상 배우고 싶습니다, 인 것 같군. 사업을 대체 어디까지 확장할 셈인가? 포기하게. 이 마을에 양봉업자는 한 명이 한계야.”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오해를 풀었다.
“아뇨! 양봉 말고, 크레이지 호넷 퇴치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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