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세르지오 디난테는 오랜 친우인 크리스 앤더슨이 월드 스튜디오와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불같이 화를 냈었다.
“그런 조건들을 수용하면서까지 찍고 싶은 겐가!”
결국은 친우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 세르지오, 내가 이번에 정말 특별한 배우를 만났다고. 시간만 된다면 자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
자신을 놀라게 만든 배우를 만났다면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흥분한 목소리로 연락을 했었던 크리스 앤더슨이었다.
세간에선 친분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자신들을 가리켜 ‘괴팍한 감독들’이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건 안다.
허나 그만큼 촬영 과정에선 까다롭지만. 결과로 보여줬기에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감독으로 남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배우길래?’
어지간한 연기력으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는 크리스 앤더슨이었다. 누구보다 냉정하게 배우를 평가하기로 유명한 감독 중 하나였으니까.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번 자신의 작품은 반드시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친우의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영화관으로 향했던 그였다.
그리고.
‘저 배우구나.’
크리스 앤더슨이 전화로 몇 번이나 말했던 특별한 배우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할리우드의 스타가 된 데이븐의 연기력도 나쁘진 않았다. 허나 관객들이 히어로 무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 배우는 정작 따로 있었다.
차서준. 그 어린 배우가 보여준 연기력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놀람을 감추지 못했던 세르지오 디난테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어린 배우는 얻어걸린 인생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듯. 바로 다음 작품으로 다시 한번 증명해버렸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감독이라면. 도저히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고.
- 세르지오. 저번에 말했던 그 배우가 이번에 넷티비에서 드라마를 찍었으니. 관심 있으면 시간 날 때 한 번 보게나.
넷티비에서 공개된 ‘왕자의 난’을 본 순간. 세르지오 디난테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수없이 많은 천재라 불리는 이들을 봤지만. 저 정도의 재능을 보여준 배우는 손꼽힐 거라고.
그때부터였다. 저 배우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오르고. 주인을 만나지 못해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시나리오 하나가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주변에서 친우들조차 ‘자네 미친놈인가? 그걸 내버려둔다고?’ 이런 반응이 나오게 만든 그 시나리오였다.
“비용은 내가 다 지불할 테니까. 이번 모임에 꼭 데리고 오라고. 자네가 그렇게 자랑을 해대니 다들 보고 싶어 하잖나.”
- 아니. 어디 다른 주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사우스 코리아에 사는 어린 친구라니까.
결국 친우의 툴툴거림을 감내하면서까지. 배우 차서준을 직접 보기로 결심한 그였다.
혹시나 누가 채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크리스 앤더슨을 닦달하여 몰래 먼저 만나기로 했다.
‘역시.’
그리고 직접 차서준을 만난 그 순간. 세르지오 디난테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눈동자. 특히 배우들의 눈은 많은 것들을 그에게 알려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 어린 배우에겐 남들에게 없는 특별함이 있다.’
차서준에겐 남들에게 없는 ‘특별함’이 있음을. 세르지오 디난테는 차서준을 처음 마주한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어린 배우라면 그 배역을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혹시나 해서 가져온 시나리오를 건넨 그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오늘. 세르지오 디난테는 그 생각에 확신을 더 할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의도적으로 빼놓은 지문이었다. 배우가 주인공이 놓인 상황에서 어떤 분석을 할지 확인하기 위해.
“거기서 왜 그런 표정을 지었지? 분명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또 마지막 남은 식량까지 모두 강탈을 당한 상태인데. 왜 좌절과 절망이 아닌 웃음을 터트린 건지 설명해보게.”
“좌절, 절망. 이런 감정들은 지난 며칠 동안 숱하게 느꼈잖아요. 믿었던 사람의 배신.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절벽 끝. 제가 그 상황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이제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구나. 누구에게 기대지 말고 혼자 살아남아 보자. 실패하면?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 거지 뭐. 이렇게요.”
저것이었다!
세르지오 디난테가 저 장면을 쓰면서 떠올렸던 주인공의 심정이. 동료에게 의지만 하던 주인공이 영화 중반부터 홀로 생존을 위해 홀로 설 것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
처음 글을 쓰면서 떠올렸던 할리우드 배우 몇몇에게 보여주었지만. 그가 애타게 기다렸던 저 대답을 꺼낸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좌절, 절망의 극한을 표현하고. 그 끝에서 다시 결심을 다잡는 표현만 보여줬을 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세르지오 디난테가 원한 정답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몇 년 만에 당시의 자신이 떠올렸던 그 생각을 정확하게 들려주는 배우가 나타난 것이다.
“어제 들어보니까. 소속사 대표와 같이 왔다던데. 맞나?”
“네. 데뷔 때부터 함께한 삼촌 같은 대표님이에요.”
“잘됐군. 굳이 비싼 비행기 값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 당장 이리 오라고 전해주겠나?”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불같은 성격의 감독답게. 곧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세르지오 디난테였다.
*
“고생했다.”
“뭘요. 이번 미국 여행은 정말 많은 것들을 얻은 시간이었어요.”
“할리우드 거장들과의 친분. 거기에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과 차기작까지. 이 정도면 종합 선물 세트보다 더 풍성한 것 같은데.”
정말로. 서도현의 말처럼 크리스 앤더슨 감독 덕분에 할리우드의 감독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단순히 한 번 만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신들과도 한 번 작업을 해보자는 말까지 들은 것. 감독들의 연락처는 덤이었다.
그뿐일까. 배우 차서준이 오스카의 남자라고도 불리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과의 차기작이 결정된 것이다.
“할리우드 거장은 거장이더라. 아직 시나리오와 배우 하나만 결정된 상태인데. 벌써부터 촬영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일정 조율하자는 걸 보면.”
“이미 몇 년 전부터 할리우드 내에선 소문이 돌고 있었대요. 끝내주는 시나리오 하나가 있다고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이 몇몇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준 적이 있어서요.”
그중 한 명이 배역에 반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에게 강력하게 하고 싶음을 어필했지만. 아쉽게도 감독의 마음에 차지 않아 불발되었다고 했다.
그런 작품이니만큼.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 제작하고 싶다는 의사만 내비치는 순간 투자부터 제작까지 문제가 없을 터였다.
기쁜 소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삼촌 그 소식 들었어요?”
“그래, 들었다. 아직 1년이나 남은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지.”
“맞아요. 형들에게서 연락이 엄청 왔었어요.”
그 기쁜 소식이란 넷티비에서 공개되었던 드라마 ‘왕자의 난’과 관련된 것이었다.
‘골든 글로브’
매년 전 세계의 영화와 미국 TV 드라마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 그곳에서 ‘왕자의 난’이 언급된 것이다.
올해 골든 글로브 TV 부문 수상 과정에서. 사회자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했단다.
“올해의 후보들은 정말 박빙입니다. 아직 1월이지만 내년 수상자는 누구일지 벌써 알 것 같지만 말이죠.”
사회자의 진행 도중 가벼운 조크였으나. 그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모두가 동감하고 있는 생각이었으니까.
이미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내년에 있을 골든 글로브의 TV 드라마 부분 수상이 이미 결정된 것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문가들 역시 마찬가지. 그만큼 ‘왕자의 난’이 넷티비에서.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보여준 성적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드라마 하나가 넷티비를 다시 일으켰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을까.
“또 하나 더. 서준이 네가 이번에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저번과 달라진 점이 느껴지지 않던?”
“맞아요 삼촌. 길에서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어요.”
정말이었다. ‘디멘션 소서러’를 촬영할 당시만 하더라도. 자유롭게 길을 다녀도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데이븐의 팬들 정도가 SNS를 보고서 날 알아보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왕자의 난’에서 봤다며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이 잔뜩 생겨났다.
“한국에서도 관련 썰들이 올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미국에서 배우 차서준을 알아보는 이들이 엄청 많아졌더라. 이런 글과 외국인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내 사진이 종종 올라왔다.
“그 정도로 놀라면 안 될 텐데.”
“차기작 발표가 나면 모두가 깜짝 놀랄 테니까요?”
“그렇지. 아직은 준비 단계니 비밀로 해야겠지만. 공개되는 순간 난리가 날 거다.”
그러고 보니 배우 차서준의 할리우드 차기작 발표가 나면 가장 방긋 웃을 곳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이주연 피디님에게 맛있는 거 얻어먹어야겠네요?”
바로 곧 편성될 주말 예능 ‘힐링 가족’.
이번 미국 여행의 결과로 여름 방학이 되면 촬영을 위해 하차해야겠지만.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출연할 예정이었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과의 차기작 소식이 알려지면 가장 활짝 웃을 사람이 바로 이주연 PD가 아닐까.
*
“여행을 떠나요!”
“떠나요!”
“더나요!”
내가 노래를 부르면. 싱글벙글 웃음꽃이 가득한 동생들이 따라 부른다.
그랬다.
곧 주말에 편성이 될 주말 가족 예능 ‘가족 힐링’을 촬영하기 위해 떠나고 있는 차 안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 하나.
새해가 밝았지만 배우 차서준은 아직 12살의 나이로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운전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서준아,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니야? 서울 근처에도 형이 아는 정말 좋은 곳이 있다니까.”
“정범이 형. 정말 고마워요. 형이 운전해준 덕분에 하준이, 하윤이랑 이렇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얘들아?”
바로 연사모의 일원이자, 나와 나이를 뛰어넘은 절친인 배우 김정범이었다.
다른 출연자 가족들은 아빠가 운전을 한다지만. 나는 아직 운전을 할 수 없는 나이니까. 그래서 섭외했다.
이번에는 김정범. 다음에는 김우승. 이런 식으로 로테이션을 돌리기로. 이 소식을 전하니 이주연 PD가 아주 뛸 듯이 좋아했었다.
마지막 박우형은···. 음, 그 형이 그래도 하준이, 하윤이와 잘 노니까 괜찮지 않을까? 안 괜찮으면 이주연 PD 가 알아서 잘 편집하겠지.
“고맙습니다!”
“꼬맙씁니다!”
몇 시간이나 남은 운전 시간에 울상을 짓던 김정범이었지만. 하준이, 하윤이의 방긋방긋한 미소에 활짝 표정이 핀다.
뒤에서 카시트에 앉아 흥얼거리는 동생들에게 살짝 웃어준 뒤. 나는 조수석에서 살짝 고개를 가까이하고서 김정범에게 속삭였다.
“형. 미리미리 연습해둔다 생각해요.”
“연습?”
“네. 형도 조만간 우승이 형처럼 장가를 가서. 제 조카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가족 여행을 위한 사전 연습.”
내 말에 무언가 상상을 했는지.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김정범이었다. 아직 차서준 연애 조작단은 끝나지 않았다.
근데 정범이 형.
방금 내가 한 말이랑, 형 반응 카메라에 다 찍혔어요.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