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번 주는 엄마, 아빠. 그리고 하준이, 하윤이와 함께 집에서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16부작으로 편성된 드라마인 만큼 앞으로도 형들과 함께 볼 시간이야 많이 남았으니까.
무엇보다.
“께! 께! 엉아 싸랑해!”
“우리 서준이 덕분에 또 맛있게 먹겠네. 아들, 고마워.”
내가 나오는 드라마를 아빠, 하준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게를 먹으며 함께 본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터였다.
띵동 소리가 나자마자 덩실덩실 몸을 흔드는 하준이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던 하윤이도 꺄아! 외치며 손을 흔든다.
“아직 드라마가 시작할 시간까지 좀 남았으니까. 우리 얼른 먹어요.”
“아웅!”
“하윤아. 우리 하윤이는 조금만 더 크면 먹자. 알았지?”
“흥!”
자신은 왜 주지 않느냐는 하윤이의 삐짐 같은 귀여운 사건도 있었다.
매번 자기는 맘마만 주면서. 오빠인 하준이는 부드러운 대게살을 입에 넣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으니.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저런 표현이 나오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 서준이의 연기를 보고서 깜짝 놀랐어.”
안 그래도 ‘타임슬립’의 1, 2화가 방송된 이후. 또다시 내 핸드폰에 불이 났었다.
- 서준아! 대체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야? 난 아무리 상상해 봐도 내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되질 않는데. 혹시 시간이 되면 가르쳐줄 수 있어? 나 엄마랑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어. 서준이 진짜 대박!!!
오죽하면 김도윤에게 저런 흥분 가득한 전화까지 걸려 왔을 정도였다. 주변에서도 그럴 정도인데 엄마, 아빠가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TV 화면 너머에선 이죽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강록인데. 집에서는 마냥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으니까.
잘한다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로 30대의 거친 형사까지 표현해낼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우형이 형이랑 엄청 연습했어요.”
“우형 아우랑?”
“네! 우형이 형이 먼저 강록이라는 캐릭터를 분석하고. 그다음 표정, 말투, 몸짓 같은 걸 따라 하면서 카피했어요.”
뭔가 과정이 많이 생략된 설명이었지만. 엄마, 아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6살부터 내가 보여준 믿을 수 없는 결과들 때문이겠지.
“엉아! 이거!”
“형도 먹어보라고?”
“응!”
하준이의 작은 손 위에는 볶음밥이 담긴 게딱지가 있었다. 혼자 신이 나서 먹다가 형도 이 맛을 얼른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가지고 온 것이다.
처음에는 대게의 부드러운 살에 빠졌지만. 서서히 게딱지에 담아주는 대게 볶음밥의 맛을 알아가고 있는 하준이었다.
“맛있는데?”
“그지? 헤헤.”
내가 한입을 먹고 맛있다며 말하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방긋 웃는다. 아마 이 맛있는 걸 잊지 말고 또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시작됐다.”
‘타임슬립’의 4화 방송이 시작되었다. 입가에 밥풀을 묻히고 있는 하준이도 형이 나오는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소리에 소파 위에 앉는다.
3화 마지막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강록. 그 순간의 표정으로 시작되는 4화.
-네? 김 반장님이 없다뇨? 그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근무하시던 분인데.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김 반장은 몇 년 전에 평성 연쇄 살인 사건 범인 쫓다가 순직하셨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대답을 들은 30대 형사 강록의 몸이 휘청거린다. 김 반장이 누구던가. 강력계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에도 감싸주던 유일한 내 편인 사람이었다.
그런 김 반장이 죽었다니? 그것도 과거 시간대에서 마주했던 그 미제 사건의 범인을 쫓다가 순직한 것이라니.
-과거···.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 돼.
-저거 왜 저래? 박 형사. 아까 같이 나갔다 오더니. 어디 가서 낮술이라도 했어?
-아뇨. 차 안에서 잠깐 잠들더니만. 눈 뜨자마자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하던데요?
주변 형사들의 그런 시선조차 무시한 채. 사건 기록들이 보관된 곳을 향해 달려가는 강록.
찾아야 된다. 이미 과거 시간대에서 같은 순간에 2번이나 눈을 떴었다. 그 마지막 두 번째에서 강록이 끼어들다 만 결과가 김 반장의 죽음.
그 말은.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꼭 막아야 돼.
이마에 맺힌 땀조차 느끼지 못한 채. 강록은 미제 사건의 단서 하나라도 찾기 위해서 서류를 뒤지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그 시간대에 있었던 모든 기록들을 살피고 돌아온 강록. 집에 돌아와 눈을 감는 순간.
-다시 왔다. 그 미제 사건이 발생했던 그 순간으로.
과거 시간대의 어린아이의 몸으로 다시 눈을 뜬 강록. 딱 한 번이었다. 늦은 밤 골목길을 걷다가 부딪힌 순간 마주한 그 눈빛.
-분명 사람을 죽여 본 놈들만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지.
일반인의 눈과 살인자의 눈은 다르다. 기분이 나빠졌을 때 ‘이놈을 죽일까?’ 하는 시선은 누군가를 죽여 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이번에는 그냥 구경이 아닌. 낮에 자신이 읽었던 사건의 기록과 지금 펼쳐지는 상황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강록.
그리고 그날 밤.
살인마의 눈빛을 가졌던 수상한 놈의 뒤를 따라가는데.
-없어졌다?
분명 오늘 밤 저 모퉁이를 꺾은 집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골목 어귀를 지나간 놈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당황하는 강록.
그 순간.
-왜 날 따라오니 꼬마야.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섬뜩한 목소리.
-컥.
커다란 손으로 조여 오는 숨통.
그리고 흘러나오는 OST.
“어머어머. 여기서 끝난다고?”
“아니! 여기서 끝나면 어떡해. 서, 서준아?”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엔딩 OST에 엄마, 아빠가 발을 동동 구른다.
누구보다 ‘타임슬립’에 몰입해서 보고 있는 엄마, 아빠였다. 방금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가 된 강록이 바로 아들인 나였으니까.
너무 몰입해서 본 덕분에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도 궁금하신 모양.
“5화는 다음 주에 기다렸다가 보셔야 돼요.”
“그렇긴 한데···.”
평소라면 다음 주에 있을 내용을 알려달라는 아빠를 타박했을 엄마였지만. 방금 그 쫄깃한 장면과 끝나는 모습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스포는 언제나 금지인 법이니까.
말로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일주일간의 애타는 기다림 끝에 보는 5화만큼 재밌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금방 다음 주 수요일 돌아올 거예요. 대신 바로 예고편이 나올 거잖아요.”
“지금 나온다.”
칭얼거리는 하윤이를 토닥여주면서. 예고편이 나오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 아빠였다. 그것은 ‘타임슬립’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NBC 화제의 드라마 ‘타임슬립’의 3, 4화 시청률이 나왔다.
- 차서준, 박우형의 '타임슬립‘ 4화 만에 27.1% 달성. 이 상승세가 과연 어디까지 향할까.
- 적수가 없다. 과연 ‘타임슬립’이 올해 최고의 드라마가 될 수 있을까? 모두의 관심이 집중.
- 배우 차서준 “김은중 작가님께서 좋은 대본을 써주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결과.”
- NBC 수목극 ‘타임슬립’ 과연 올해 최고의 시청률 드라마가 될 수 있을까. 연말에 등장한 무서운 돌풍.
- 위기에 빠진 과거 시간대의 어린 강록. 시청자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마지막 장면.
└ 그냥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는 말밖에 안 나옴. ㄷㄷ 대체 이런 대본이 3년 동안 어떻게 빛을 못 봤지?
└ 이해는 감. 만약 강록 역에 박우형과 차서준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성공하지도 못했지. 아니, 제작 자체가 안 되었겠지.
└ 인정. 그냥 형사 강록이 빙의한 것처럼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차서준 덕분에 몰입할 수 있었음. 우리 차 배우가 연기의 새 지평을 또 열었네. ㅋㅋㅋㅋ
└ 쟤는 이제 아역이 아니라니까. 자연스럽게 배우 차서준입니다. 이렇게 소개해도 이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음.
└ 진짜 연기력만 따지고 보면 국내 탑급이 아닐까? 이전까지는 어린아이 연기만 해서 몰랐는데. 30대 형사가 어린아이 몸이 된 걸 연기하는 거 보니까. 그냥 감탄만 나오더라.
‘타임슬립’의 회차가 진행될수록 주목받고 있는 건. 강록을 연기하고 있는 박우형과 나였다.
특히 어린아이의 몸으로 강록 특유의 거친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내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관심에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조차 끼어 있었다.
“삼촌. 누구라고요?”
“서준이 너도 들어봤을 거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한창 주가가 높은 월드 스튜디오.”
“저도 알아요. 하준이가 거기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전에 사총사 친구들이랑 영화관에서 보기도 했고요.”
내가 월드 코믹스 영화에 대해 안다고 말하자. 서도현이 한결 이야기가 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 표정을 보니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월드 스튜디오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거기 캐스팅 디렉터에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캐스팅 디렉터가 현재 월드 코믹스 영화의 히어로들을 다 찾은 사람이거든. 그 윌리엄이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단다. 그것도 서준이 널 보기 위해서.”
“아, 얼마 전에 촬영장에 외국인이 구경하다가 갔다고 수진 누나가 그랬었는데. 그 사람이 윌리엄이었나 봐요.”
저번에 하준이가 월드 코믹스 영화를 보면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형도 저기에 나오면 좋겠다고 했었지.
문제는.
“월드 스튜디오에서 제안하는 배역이 히어로가 아니라 악당이네요? 데블 오리엔트?”
“그렇긴 한데. 서준이 네가 아직 잘 모를 월드 코믹스 영화들의 한 가지 재밌는 점이 있단다.”
이미 이어질 서도현의 말을 알고 있는 나였다. 월드 코믹스 히어로 영화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악당 캐릭터에는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명배우들을 섭외한다는 것.
그런 악당이 존재해야만 히어로가 빛이 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이는 월드 코믹스 영화들이었다.
“혹시 월드 코믹스 만화들을 본 적 있니?”
“아뇨. 영화만 봤어요.”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김도경 시절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그것은 월드 스튜디오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 큰 틀은 비슷하지만 등장하는 히어로들이나, 내용들이 김도경 시절과 달랐다.
“그러면 일단 저쪽 제안에 답변을 하기 전에. 데블 오리엔트 만화랑 준비한 자료들부터 보고 이야기해보자. 삼촌 생각은 그런데 서준이 네 생각은 어떠니?”
“저도 좋아요.”
일단 제안이 들어온 ‘데블 오리엔트’가 어떤 캐릭터인지 확인하고 결정하면 될 터였다.
*
“형.”
“으. 응?”
“근데 왜 형이 절 데려다줘요?”
그랬다.
‘타임슬립’의 촬영장으로 향하고 있는 나는 지금 김우승의 차를 타고 있었다.
원래는 매니저인 수진 누나가 데려다줘야 했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른 매니저가 운전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우승이.
“무슨 소리야! 당연히 서준이 널 위해 형이 나서야지!”
저렇게 말하며 나를 샵부터 촬영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촬영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흐음.”
“왜왜? 서준이 너 반응 참 섭섭하다. 내가 언제 널 위해서 발 벗고 나서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건 맞긴 한데요.”
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냐는 거지.
“어? 형. 지금 이 길은 촬영장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가, 가는 길에 잠깐 들러서 청아 씨도 데려가기로 했어. 서준이 너가 불편하면···.”
“아뇨! 누나랑 같이 가면 저도 좋아요.”
이런. 오랜만에 보는 김우승의 발연기였다.
어쨌거나. 이 형이 오랜만에 열정을 되찾은 것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특히 김청아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좋은 사람 같았으니까.
“서준아.”
“네?”
“나중에 혹시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든지 형에게 연애 상담을 요청해. 슬슬 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울 나이거든.”
뭐래 이형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