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안 그래도 ‘타임슬립’의 첫 촬영을 시작하기 전부터 김우승에게 시달리던 참이었다.
“서준아. 밥차 보내주고 싶은데. 언제가 좋아?”
내 도움 덕분에 박강유로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며 노래를 불렀던 김우승이다.
지금이야 시간이 조금 지나 그 인기가 조금 식었다지만.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는 누군가에겐 늘어난 팬들의 숫자는 행복의 크기나 마찬가지였다.
정작 몇몇 팬들은 이미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아 보였지만.
“형. 그러면 다음 주에 한 번 와요. 제가 제작진이랑 이야기를 해서 밥차 받을 수 있게 할게요.”
“정말? 알았어. 내가 아주 제대로 준비해볼게.”
사실 김우승은 자신이 밥차와 이것저것 선물을 준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근데 형.”
“응?”
“요즘도 정체 숨기고 채팅방에 들어가요?”
“당연하지. 요즘은 타임슬립 채팅방에 들어가서 노는데. 서준이 덕분에 수, 목만 기다리고 있어.”
아이고. 김우승을 위한 선물에 더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나였다.
*
김청아는 아쉬운 마음을 담은 채 대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봤는지 해진 대본 겉표지 위에 쓰여 있는 숫자는 8이었다.
“여기까지네.”
오디션을 통해 경쟁자들을 이겨내고 얻은 ‘타임슬립’의 이아영. 김청아가 오늘처럼 촬영장에 올 수 있는 건 대본 위에 적힌 숫자처럼 8화 촬영이 마지막이었다.
범인의 뒤를 쫓던 이아영이 주인공을 대신해 희생하는 씬을 끝으로 퇴장이었으니까.
강록이 심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는 만큼 임팩트 있는 퇴장이 되겠지만. 배우로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8화 촬영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 촬영 시작까지도 2시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비록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이라지만. 촬영 시작 한참 전에 도착하여 대본을 점검하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다.
김청아는 오래된 차의 시동을 끄고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차창 밖을 살펴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다음 김청아가 한 행동은.
톡톡톡.
[타임슬립 이아영.]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검색창에 드라마 속 자신의 이름을 입력하는 일이었다.
과거 단역들을 전전할 때에는 아무리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 ‘타임슬립’에서는 제법 많은 반응들이 나왔다.
└ 이아영 배우 대사는 많지 않지만. 등장할 때마다 나름의 매력을 보여주는 캐릭터인 것 같음. ㅇㅈ?
└ ㅇㅈ 일단 화면에 나오면 은근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하더라고요. 몰랐는데 다른 작품에도 꽤나 많이 나왔던데요.
└ 심지어 대사 하나 없이 지나가는 행인 1에 나왔던 것도 누가 여기에 올림. ㅋㅋㅋㅋㅋ
└ 박우형과 대사 주고받을 때에도 어색하지 않은 거 보니 연기력은 좋은 거 같은데. 왜 이제야 주목받고 있는 건지. 아쉽네요. ㄲㅂ
└ 조금 그렇긴 함. 그래도 연기력이 좋은 거 같으니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임.
“하아. 너무 좋아.”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또 언급을 해준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떤 것일 뿐.
잘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서 배우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얼마나 말렸는지 모른다.
심지어 김청아의 집에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대신. 성공하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면서 쫓겨나기까지 했었다.
└ 근데 어차피 주연급으로 올라서기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음. 외모가 주연으로 가기엔 좀 부족하지 않나?
“뭐? 이 나쁜 놈이.”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외모가 탑급이었으면 진즉에 배우 했겠지. 죽어라 노력해서 취직한 직장을 잘 다니다가 때려치웠겠는가.
김청아의 손이 재빠르게 다른 아이디로 로그인을 눌렀다. 그런 다음 방금 달린 댓글에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 그래도 김청아 배우 나름 매력적인 외모 아닌가요? 얼굴에 손 하나 안 댄 것 같던데. 요즘 저런 배우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똑똑.
“엄마야!”
그렇게 열성적으로 댓글을 달던 중. 누군가가 창문을 두들기자 화들짝 놀라는 김청아였다.
다행히 김청아의 흑역사는 들키지 않은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 창문을 두들겼으니까.
“누나!”
“서, 서준아?”
고맙게도 촬영장에서 김청아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차서준이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서준이 너가 왜 여기 있어? 오늘 촬영에는 어린 강록 분량이 없을 텐데?”
분명 오늘 로케 촬영에는 과거 시간대의 이야기가 없었다. 고로 차서준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 우승이 형이 밥차 보내준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같이 사진도 찍을 겸 왔어요.”
“그러니? 잠깐만.”
유리창을 두고서 대화를 나눌 순 없었다. 김청아는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누나.”
“응?”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나 차를 보고 온 거거든요. 같이 제 차에서 기다릴래요? 같이 대본도 분석하고요.”
“그럴까?”
“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차서준은 자신의 촬영 분량이 없더라도 촬영장에 종종 찾아오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한참 전에 도착해 시동을 끈 차 안에서 기다리는 김청아를 발견하곤. 자신의 차 안에서 같이 있자고 제안하곤 했었다.
자연스럽게 차서준이 타고 온 밴의 문을 여는 순간.
“어어? 아, 안녕하세요.”
“바, 반갑습니다. 배우 김우승입니다.”
김청아는 누군가가 이미 차 안에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그 누군가가 차서준과 친분이 깊기로 유명한 배우 김우승이었으니.
“형. 청아 누나랑 같이 대본 분석 할 건데. 같이 있어도 되죠?”
“응? 어어. 당연히 가능하지. 타세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빨리 타라는 차서준의 재촉에 일단 차에 오르는 김청아였다.
*
사실 이렇게나 빨리 후보를 찾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외로움을 타고 있는 김우승에게 소개시켜줄 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그 적당한 후보가 바로 옆에 있을 줄이야.”
안 그래도 오디션 때 좋은 인상을 받았던 김청아였다.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서 유심히 지켜본 결과 김청아는 꽤나 좋은 사람이었다.
배우가 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모습이라든가. 또 화려한 연예계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든가 하는 모습들이 말이다.
참고로 오늘 일을 추진하기 전에 따로 알아보기까지 했다.
대본 연습을 하는 중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사람도 참하고 생활력도 강했다. 그러면 합격이지.
“···.”
“···.”
꽤나 재밌는 풍경이었다. 갑작스럽게 밴 안에 같이 있게 되어버린 김우승과 김청아를 바라보는 건.
조금 더 이 침묵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오늘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던 김청아를 돕는 게 우선이었다. 혼자서 준비하고 있던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누나. 제가 여기 이 부분 우형이 형 대사를 칠게요. 누나는 이아영 대사를 해주세요.”
“정말? 서준이가 도와줄 거야?”
“당연하죠. 저번에도 우리 몇 번 했었잖아요.”
갑자기 기다리라면서 차에서 내리더니. 여배우 하나와 돌아온 나 때문에 뒷자리로 쫓겨난 김우승이었다.
심지어 오늘 나를 따라온 이유가 자신이 보낸 밥차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물음표만 머리 위에 띄우던 김우승이었지만. 이내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본에 집중하는 김청아에게 서서히 시선을 주기 시작한다.
아마 김우승에게는 김청아가 제법 신선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조연이라지만 여배우가 이렇게 수수한 모습으로 촬영장에 오는 건 또 신선한 느낌일 테니.
“강록 너 갑자기 왜 그래? 지금까지 내 일 아니라면서 외면하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정의의 사도가 된 거냐고.”
“정의의 사도?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어. 그냥 잡아야만 하는 놈이 눈앞에 나타나서 쫓는 거지.”
김청아는 배우로서도 확실히 매력적인 포인트들이 많았다. 목소리, 발성. 그리고 다채로운 표정까지.
아마 이번 ‘타임슬립’을 통해 이주영 다음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배우가 김청아가 아닐까 싶다. 비록 분량은 많지 않더라도 말이다.
“누나. 표현이 훨씬 좋아졌는데요?”
“정말? 나 사실 소속사도 없고. 주변에 아는 선배님들도 없어서 어디다가 물어볼 데가 없었거든. 그런데 서준이 네가 가르쳐주니까 정말 뭔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는 거야.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누나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서 도와드린 건데요. 이렇게 재능 있는 누나가 왜 연기를 떠났었는지 모르겠어요.”
내 칭찬이 끝나자 흥분한 김청아가 발그레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 모습이 퍽 귀엽긴 했다.
저기 봐라. 뒤에서 슬쩍 훔쳐보던 김우승이 김청아와 눈을 마주치고선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저 형이 저런 캐릭터가 아닌데.
“어? 누나 잠시만요. 저 갑자기 회사에서 연락이 와가지고요. 우승이 형. 나 삼촌이랑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지, 지금?”
“네. 급한 용무래요.”
수진 누나야 이미 아까부터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이미 오늘 촬영에 있을 대본도 다 연습했겠다. 은근슬쩍 자리를 비켜주는 나였다.
여기까지 했으니 잘 되던, 안 되던 다 김우승의 손에 달렸다.
우승이 형.
굿럭.
*
월드 스튜디오의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은 ‘데블 오리엔트’의 배우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운이 좋아. 때마침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다니.”
이미 할리우드에서 연기력이 된다 하는 동양계 아역 배우들은 모조리 살핀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이 한국까지 찾아왔다는 말은.
“윌리엄. 이번에도 실패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옆 나라인 일본에 가볼 생각이야. 거기에도 좀 아쉽긴 하지만 후보가 둘이나 있으니까.”
아직까지 윌리엄의 눈에 차는 배우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2페이즈의 중간 보스나 다름없는 데블 오리엔트의 캐스팅이었다. 월드 코믹스의 다음 2페이즈 영화들의 도전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로 짓는 열쇠가 될 테니까.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번에 체크해야 할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가 꽤나 흥미로웠으니.
“그래서 어린아이의 몸으로 빙의한 30대 형사를 연기한다고?”
“예.”
“오히려 잘 됐어.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봤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거든. 과연 우리가 찾는 재능을 가진 배우인지, 아닌지에 대해.”
아이가 아이를 연기하는 것과.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른을 연기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후자는 말 그대로 순수 가진 재능만으로 표현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제작진 측과 협의는?”
“말씀하신 대로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참관하는 걸 허락받았습니다.”
“우리 신분은 노출되지 않았겠지?”
“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촬영장으로 가시죠.”
그렇게 윌리엄과 직원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 뭐야. 저거 월드 스튜디오 캐스팅 디렉터 아니야?”
잠시 후.
윌리엄과 직원은 ‘타임슬립’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에서 제작되는 드라마인 만큼 저들이 말하는 언어가 한국어라는 점이었다.
“저기 있군.”
배우가 어디 있나 따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시선을 빼앗기게 만드는 한 아이가 있었으니까.
스태프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차서준이라는 아이는 헤실헤실 웃으며 감독과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좀 아쉬운데.”
촬영 전 배우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이던가. 바로 감정을 잡는 일이었다. 곧 시작될 촬영을 앞두고 있음에도 저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이라니.
윌리엄이 차서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낮추려는 그 순간.
“!”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차서준이 눈빛이 돌변했다.
그리고.
“찾았다.”
그 모습을 본 윌리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