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초반의 악재를 딛고서 순항하고 있는 김우승의 드라마. ‘꿈속의 당신’이 드디어 시청률 20%를 넘어섰다.
“고맙다 서준아.”
“뭘요. 다 형이 잘해서 얻은 결과죠.”
“아니. 서준이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는 얻지도 못했을 거야.”
사실 걱정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사모에 있는 박우형이나 김정범은 모두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배우들.
거기에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증명까지 하고 돌아온 배우 차서준까지.
조금이라도 부족한 연기를 보였다간. 시기, 질투의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에게 물어 뜯겼을 터였다.
하지만.
“감독님도 서준이 네가 소하에 나와 준 덕분에 20프로를 돌파할 수 있다고 했어. 고맙다고 전해달라던데.”
“그래요?”
“그래. 그러니 조금 있다가 소하 시작하기 전에 야식으로 먹고 싶은 거 있음 다 말해. 내가 다 사줄 테니까.”
‘소소한 하루’의 촬영과 함께. 내가 스파르타로 김우승을 교육시킨 덕분에 연기력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우승이 연기한 내면의 아픔을 애써 감추고 푼수처럼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재벌가 혼외자.
‘폭군의 세자’ 이환을 통해 박우형 신드롬이 있었듯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꿈속의 당신’의 박강유였다.
“형?”
“응?”
김우승이 옆에서 조용해졌기에 뭘 하고 있나 돌아봤더니. 집중한 얼굴로 핸드폰으로 바쁘게 뭔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요?”
“소하 채팅방인데. 이거 생각보다 꽤나 재밌어. 서준이 너도 해볼래?”
‘소소한 하루’ 토크방에 접속한 김우승이 정체를 감추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신 정체를 절대로 밝히면 안 돼. 나 이거 하려고 아이디도 새로 만들었잖아.”
“평소에 그러면서 봤어요?”
“어. 이게 혼자 집에 있다 보면 문득 외로울 때가 있더라고. 그럴 땐 이렇게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보면 꿀잼이야.”
아이고. 혹시나 좋은 사람을 찾으면 우리 우승이 형에게 소개라도 좀 해줘야겠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니.
“뭐야. 서준이 너 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봐.”
“제가 어떤 눈으로 형을 보고 있는데요?”
“짠한 눈빛?”
역시나 아이돌답게 눈치도 빠르다. 어쨌거나 ‘소소한 하루’를 기다리면서 야식으로는 치킨을 주문했다.
“비싼 거 먹어도 된다니까. 치킨 말고 대게 먹지.”
“어우. 대게의 대 짜도 꺼내지 마요.”
하준이가 대게 맛에 눈을 뜬 뒤. 매일같이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내게 재롱까지 부리면서 부탁 아닌 애원을 했다.
전에 내가 없는 사이에 엄마에게 ‘께! 께 머꼬시퍼!’ 하고 졸랐다가 혼난던 모양.
엄마의 교육 덕분에 ‘매일매일 먹을 수 없는 음식 = 대게’라는 사실을 배웠지만. ‘형에게 재롱을 부리면 얻을 수 있는 음식 = 맛있는 대게!’라는 공식을 알아버린 하준이었다.
먹고 싶다고 재롱을 부리기 전에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퍽 귀여워 배달 어플로 주문하곤 했던 나였다.
“대게는 당분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집에 대게 킬러들이 있어서. 대신 저는 치킨이 더 좋아요.”
“그래? 서준이 네가 좋다면 좋은 거지. 자, 여기 태블릿에 로그인도 해놨거든. 조금 있다가 같이 떠들면서 보자.”
이 형이 갑자기 부쩍 외로움을 느꼈나. ‘소소한 하루’ 팬들 사이에 가면을 쓰고 열심히 채팅을 치는 모습이 신기하긴 했다.
대체 어떤 채팅을 치면서 노는지 궁금했기에. 나도 김우승 옆으로 다가가 앉아 태블릿을 들었다.
└ 요즘 김우승 연기력이 물오른 거 같음. 처음에 박강유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박강유 그 자체더라. 김우승도 저런 상처 하나쯤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닐까?
└ 우승이 어서 오고. 내가 너 닉네임 기억해뒀지. 김우승 파트에만 등장해서 칭찬만 해가지고. 딱 걸렸어. ㅋㅋㅋ
└ 우승이 팬 아닐까? 솔직히 ‘유니온’ 시절 때부터 김우승 팬이 많지는 않아도 좀 있었는데. 요즘 연기도 잘하긴 하잖아.
└ ㄴㄴ 저거 좀 수상함. 꼭 김우승이 정체 숨기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온 사람처럼 행동함. 너 김우승 개새끼 해봐.
└ 욕은 나쁜 거임. 자자, 누구를 헐뜯고 비난하기보다. 오늘도 소하 즐겁게 봐요. ^^
└ 나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긴 한데. 설마 김우승이 정체까지 숨기려고 아이디도 새로 만들어서 저러겠음? 나이 먹어서 외로움 타는 것도 아니고.
형? 이미 들킨 것 같은데?
어쨌거나 김우승은 나름 정체를 숨긴 채 하는 채팅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런 김우승을 보면서 나는 결심했다. 안 되겠다. 혹시나 괜찮은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저 형을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잠시 후.
‘소소한 하루’가 시작하기 직전에 야식으로 주문한 치킨이 도착했다.
“서준이 넌 닭다리보다 윙, 봉을 더 좋아하더라?”
“다리는 금방 배가 부르잖아요. 저는 작은 사이즈인 날개랑 봉이 좋아요.”
퍽퍽한 가슴살을 딱히 선호하지 않는 나와, 아이돌 시절 체중 관리를 한다며 닭가슴살만 주구장창 먹었던 김우승에게 있어. 다리와 윙, 봉으로 구성된 콤보 세트는 최고의 메뉴였다.
-형. 저번에도 말했던 습관이 자꾸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아요. 연습할 때부터 의식하지 않으면 나중에 카메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그러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아, 안 되겠지? 연기를 하기 전에 계속 되뇌고는 있는데. 쉽게 안 고쳐지네.
-괜찮아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엄청 좋아졌거든요. 사실 화면 너머로 보면 크게 티는 안 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연습에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게 좋잖아요.
어느새 ‘소소한 하루’에서는 나와 김우승의 파트가 시작되었다.
방금 전까지 먹던 치킨 다리는 내려놓고. 또 열심히 누르던 채팅조차 내려놓은 채. 김우승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TV 속 자신을 보고 있었다.
최근 자신의 연기력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고 있을 때. 자만하기보단 경계하고 또 노력하는 김우승이었다.
“서준아. 확실히 저 당시에는 못 느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서준이 네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알겠어.”
“형 지금 엄청 발전하고 있어요. 우형이 형도 1화보다 지금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잖아요.”
“그렇지. 다 서준이 네가 도와준 덕분이다. 그런데 너무 쥐 잡듯이 잡는 것처럼 보이는데. 착각이겠지?”
착각일 리가. TV 속에서 빨간 모자를 쓴 채. 매의 눈으로 김우승의 박강유 연기를 쳐다보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포스가 느껴졌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저 두 사람의 콩트를 보려고 소하 생방 꼭 챙겨보자나. 군대에 가본 적도 없는데 조교 말투와 행동을 어떻게 저리 잘 알지? 혹시 차 배우 정말 인생 2회차 아닐까? 막 대배우였다가 어린이로 눈을 뜬 걸지도 모르겠음.
아니, 어떻게 알았지?
*
이제 고작 9살. 아역 배우가 보여준 필모라고 보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간 배우가 차서준이었다.
그런 차서준의 차기작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때. 업계 관계자라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비중 있는 조연까지 모두 공개 오디션으로 뽑는다? 이건 배우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도전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잘 해야 돼. 이제 슬슬 모아둔 돈도 바닥나고 있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역력한 긴장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1차 오디션을 통과하고. 2차 오디션을 앞두고 있는 김청아 역시 마찬가지.
김청아는 단숨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될 만한 미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향하게 할 만한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
다만, 과거 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생업을 위해 직장 생활을 하다가 퇴사를 결심. 조금 늦은 나이에 다시 배우에 도전하고 있었다.
“뭐야. 오늘 오디션이라곤 해도. 사실 형식상으로 보여주기식이 아닌가 싶었는데. 아닌가 본데?”
“그러게. 내가 알기론 우리 회사에서 박주혁도 하고 싶다고 했거든? 심지어 이번에는 주연 고집 안 부리고 비중 있는 조연이어도 괜찮다면서.”
박주혁? 김청아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연기력이 외모의 반의반만이라도 나왔다면 단숨에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미남 배우.
다만 처참한 연기력 덕분에. 그 외모를 가지고도 아직까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배우였다.
“그런데 바로 까였대잖아. 이번에는 철저하게 연기력만으로 배역을 뽑는다면서 다음에 같이 하자고 했대.”
“뭐? 박주혁이면 연기력은 처참해도 광고주들이 좋아해서 뽑힐만하지 않나? 심지어 주연도 아니고 조연으로 했으면 더 그럴 텐데.”
“그러니까. 이번에 철저하게 연기력만 본다는 말이 허튼말은 아니라는 거지. 난 이번에 진짜 날 위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목숨 걸고 할 거야.”
수군거리는 대화를 엿듣고 있자니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자신의 차례가 되어 들어간 김청아는 감독님 옆에 앉아 있는 차서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청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기부터 봅시다. 바로 시작해주세요.”
압박 면접처럼 곧바로 연기 요청이 들어왔지만. 김청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처음은 ‘타임슬립’의 이아영. 다음은 준비해온 자유연기. 떨리는 심장조차 느낄 새가 없을 정도로 몰입해서 연기를 펼친 김청아였다.
“제가 먼저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아까 이아영을 연기하실 때. 왜 시선 처리를 그렇게 하셨어요? 분명 대본에서 이아영의 대사는 범인을 향한 것이었는데.”
사실 김청아 본인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던 부분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아영이었다면 이 대사를 내뱉으면서 어디를 바라봤을까.
“강록에게서 이상함을 느꼈으니까요. 대체 저걸 어떻게 알았지? 분명 자신도 증거를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녔는데. 그 어디에도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남아있질 않았는데. 강록은 마치 거기에 그게 알고 있었다는 듯 찾아냈잖아요. 이아영의 그 시선이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줄 거라 생각했어요.”
김청아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고민의 결론을 이야기했을 때.
“좋네. 사실 오늘 이아영 오디션을 시작하기 전에 차 배우와 그 이야기를 좀 나눴었는데. 바로 그 시선 처리를 보여주는 배우가 나타날 줄이야. 준비한 자유연기도 인상 깊었고요. 수고하셨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학영 PD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김학영 PD가 아주 작심을 한 듯싶다. 배우의 이름값이 아닌 철저하게 연기력으로 뽑겠다는 말을 지키다니.
배우 차서준과 박우형이 출연을 확정지은 드라마. 거기에 자신들의 배우를 꽂아 넣으려는 요청이 얼마나 쏟아졌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 배우. 요즘 나도 소소한 하루 재밌게 보고 있어.”
“정말요?”
“응. 거기서 보니까 우리 차 배우 디렉팅 실력이 보통이 아니던데? 나중에 감독해 봐도 괜찮겠던데.”
편성이 확정된 뒤. 김은중 작가와 함께 몇 번이고 미팅을 가졌던 김학영 PD였다. 그 덕분에 지금처럼 제법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다.
본격적인 오디션을 시작하기 전. 김학영 PD가 이미지는 괜찮지만 연기력 때문에 1차 오디션에서 떨어뜨린 배우들에 대해 수다의 시간을 가졌다.
“박주혁이? 걔는 디렉팅으로도 안 돼. 마스크야 배역이랑 괜찮을지 몰라도 안 돼 안 돼.”
“왜요?”
“배역과 이미지가 어울리고 광고주들이 좋아하면 뭐해. 정작 촬영장에서 어떻게든 장면 뽑아내야 하는 감독인 내가 죽을 맛일 텐데.”
안 그래도 나도 그 소문을 듣긴 했었다. 배역이랑 이미지가 맞아떨어져 뽑은 배우였는데. 정작 촬영장에서 얼마나 개판을 쳤는지에 대해.
결국 감독이 두 손 두 발 들고서 포기한 채 방송에 내보냈다고 들었다. 그 드라마의 연출이 김학영 PD의 후배였으니. 절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한 배우들이 한 트럭이라고 했다. 김학영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곧바로 2차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연기부터 볼게요. 바로 시작해주세요.”
김학영 PD의 옆에 내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디션을 보기 위해 들어온 이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소소한 하루’에서 보여주었으니까. 조금은 부족하다 느껴지던 김우승의 연기를 정작 본방에서는 어떻게 바꿔버렸는지.
특히나 상대역으로 내가 대사를 치겠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오늘 잡힌 오디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차 배우. 오늘 앞으로 함께 할 배우들을 미리 본 소감이 좀 어때?”
김학영 PD 물음에 내가 답했다.
“다들 배역에 찰떡처럼 맞는 이미지도 그렇고. 연기력들도 출중해서 이번 우리 드라마 대박 날 거 같아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