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화 시청률 5.6%
만약 지상파인 NBC의 ‘보이스피싱’만 아니었더라면. 더 높은 스타트를 끊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흐흐. 시작 좋고.”
원래대로라면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어야 할 스튜디오 마운틴의 대표 박홍철의 표정이 괜찮았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박홍철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에는. ‘폭군의 세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대표님?”
“왜? 또 촬영장에 무슨 일 터졌어?”
“아뇨. 점심 메뉴는 뭐로 시킬까요?”
제작 PD의 말에 박홍철이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들 먹고 싶은 걸로 마음껏 시키라고 해. 난 짜장면.”
“넵. 그러면 대표님은 항상 드시는 짜장면으로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탕수육도 좀 시켜서 먹고 그래. 다들 힘들 텐데 잘 먹어야 힘내지.”
박홍철의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제작 PD가 문을 닫고 나갔다.
다시 핸드폰을 들어 ‘폭군의 세자’에 관한 것들을 찾아보던 박홍철이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입질이 오고 있다고.”
당장 지상파와 종편채널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3배 이상의 시청률 차이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NBC의 ‘보이스피싱’의 3화 시청률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홍철이 웃을 수 있는 건.
- 아씨. 우리 엄마가 오늘부터 ‘폭군의 세자’ 봐야 된다고 비키래. ㅠㅠ
└ 너네집도? 우리집도 원래 나 때문에 어제까지 ‘보이스피싱’ 봤는데. 오늘 아침에 ‘폭군의 세자’ 보시더니 2화 꼭 봐야 된다고 하네. ㅜㅜ└ 아무래도 어머니들은 미스터리 스릴러보다는 사랑 이야기가 섞인 사극이 더 괜찮은 모양이야. 리모컨 뺏긴 친구들이 제법 있어.
└ ‘폭군의 세자’도 신준철이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폭군이 뭔지 보여주고 있긴 한데. 그 분위기를 환기시킬 아역들의 귀여움이 너무 좋음. ㅋㅋㅋ└ 어? 나는 생방은 ‘보이스피싱’ 보고. 다시보기로 ‘폭군의 세자’ 봤는데. 오늘부터는 QTV 볼 거 같음.
└ 지금 다들 그럼. 아무래도 오늘 내용에 따라 다음 주에 뭘 볼지 많이들 갈릴 듯?
‘폭군의 세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 덕분이었다. 슬슬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게 보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어머니들이 NBC의 ‘보이스피싱’보다 QTV의 ‘폭군의 세자’를 선호한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시청률을 견인하는 가장 큰 세대가 어디던가.
전통적으로 TV 시청률을 선도하는 건 어머님들이었다. 그런 어머니 세대들이 어린 세자의 이야기에 하나둘 채널을 고정하기 시작한 것.
납치, 추격, 스릴러의 긴박한 드라마보다. 긴박함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가 더 매력적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각종 커뮤니티에서 ‘보이스피싱’보다 ‘폭군의 세자’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고 있었다.
“대표님. 짜장면 30분 뒤에 도착한답니다. 그리고 소품을 조금 더 제작해야 한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무조건 해줘야지.”
지금은 아낄 때가 아니었다.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치고 나가야 할 때였다.
*
화요일 밤.
김시율은 벌써부터 TV 앞에서 ‘폭군의 세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차 배우 봐야지.”
어느새 그녀의 입에는 차서준이라는 이름 대신 차 배우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무엇보다.
‘폭군의 세자’는 다 같이 보는 맛이 있었다. 벌써 김시율보다 먼저 접속한 이들이 자리하고 그녀를 반겼다.
└ 다들 자리하셨나요?
└ 어서 오셈. 이미 치킨도 시켜서 다리 들고 기다리고 있음.
└ 우리 누나 보이스피싱 봐야 된다고 소리치다가 쫓겨남. ㅋㅋㅋ└ 1화 마지막이 그렇게 끝났는데. 어떻게 오늘 안 보겠냐고.
└ 시작했어요!
과거 연종의 세자 시절.
붕당 싸움이 극에 달하던 이들의 가장 큰 정쟁은 바로 세자 책봉 문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과격한 성향을 보이는 연종 때문에 훗날이 걱정된다는 것.
하지만.
갑작스러운 선왕의 서거로 결국 연종이 왕위에 오르고. 시간이 지나 세자 책봉에 반대했던 이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되는데.
자신을 반대하던 대신들을 역모의 죄를 씌워 모조리 죽여 버린 것.
그런 연종이 유일하게 건드릴 수 없었던 인물이 선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좌의정이었다.
서거 전에 공언한 선왕의 유지 때문에 좌의정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는 연종.
그런 상황 속에서 세자 이환은 또다시 밤에 궁궐을 나서는데.
-영아.
-왜?
-사실 오늘은 네게 긴히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연종이 자신과 좌의정의 손녀인 계영이 밤마다 몰래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려던 세자 이환.
하지만.
-이거 봐라. 내가 너 주려고 낮에 순이랑 나가서 만든 꽃팔찌야.
해맑게 웃으며 자신이 만든 꽃팔찌를 건네는 계영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세자 이환.
이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
-그래서 할 말이 뭔데?
-그게··· 다음에 말해야겠다.
-하여튼. 넌 어느 댁 자제인지 모르겠지만. 애늙은이 같은 면모가 있다니까.
꼭 우리 할아버지 같아.
까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계영을 보며 숨을 삼키는 세자 이환.
-세자. 내 오늘은 세자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불렀소.
-무엇이옵니까. 아바마마.
-좌의정의 손녀를 세자의 세자빈으로 맞이할 생각이오.
-아, 아바마마!
연종의 말에 경악으로 눈이 커지는 세자 이환. 저 말에 담긴 뜻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겠다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 좌의정의 손녀인 계영을 이용해먹겠다는 것.
-싫은가? 세자가 싫다하면 장차 한 나라를 이끌어야 할 세자를 농락한 좌의정의 가문에 죄를 물어야겠구나.
세자의 반응에 돌변하는 연종. 그 입매가 뒤틀린 것이 이미 두 사람을 이용해 좌의정을 끌어 내리려고 결심한 모양새.
일반적인 왕이었다면 절대로 세자빈이 되었다 한들 좌의정을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허나 연종은 즉위한 뒤 피바람을 만들었던 폭군.
그런 폭군이 명분을 쥔 이상. 더 이상 그의 뜻을 막아설 수 있는 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저자가 역모를 꾸미는 자다! 당장 끌어내어 목을 쳐라!
세자빈 책봉에 목소리를 내던 대신이 그대로 죽임을 당하고.
-너···. 아니, 세자 저하께서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알고는 계십니까?
늦은 밤 궁궐을 빠져나온 세자 이환을 원망하는 계영.
왕의 외척은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다. 그 말은 좌의정이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뜻.
거기에 좌의정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연종이 세자의 외척이 된 가문에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
바람 앞의 등불이 된 가문의 처지에 세자 이환을 원망하는 계영.
-나, 나는 정녕 이렇게 될지 몰랐다. 그저 그대가 눈에 밟히고. 또 그대가 자꾸 떠올라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저는 저하를 원망하게 될 것 같사옵니다. 더 이상 우리 사이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까워지던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고.
-조선을 정복할 군대를 준비하라. 이라타이 너는 암살조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조선의 왕을 죽여라. 계획이 성공하면 대군을 몰고 조선을 정복할 것이다.
북쪽 땅에서는 오랑캐가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하는데.
“와. 그냥 사랑 이야기나 하는 사극이 아니었네?”
예고편이 끝나고 나서야 김시율은 참았던 숨을 토했다. 그리곤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실시간 반응들을 살폈다.
└ 연종 연기가 미쳤네요. 신준철이 그냥 미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근데 거기에 밀리지 않는 서준이가 더 미친 듯. ㄷㄷ
└ 그보다 이제 북에서 오랑캐가 침략할지도 모를 텐데. 우리 이환이와 영이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환이 어떡해 ㅠㅠ└ 본격적인 시련의 시작일 듯. 2화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꽁냥꽁냥한 모습들에 너무 좋았는데. 다음 주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나요.
└ 사실 월요일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는데. 당장 돌아올 월요일은 빨리 왔으면 좋겠음. 3화 빨리 보고 싶어!
└ 월요병 치료제 등극. ㅋㅋㅋㅋ 어? 지금 쿠키 영상 나오네요.
그리고 ‘폭군의 세자’의 묘미인 쿠키 영상.
-저하. 수업 도중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 스승님. 자꾸만 누군가가 떠올라서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꾸만 떠오르는 소녀의 생각에 또다시 수업 중 딴생각을 해버린 세자 이환.
그런 세자를 보면서 벌써 그럴 때가 되었냐는 듯 놀라는 세자의 스승.
-허어. 그렇단 말씀이십니까? 대체 어떤 느낌인지 제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밥을 먹다가도. 잠에 들기 전에도. 자꾸만 누군가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하면 말이 잘 나오질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많았는데 말입니다.
세자 이환의 설명에 다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스승. 재빨리 밖에 듣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문을 닫는다.
-허허. 세자 저하. 벌써 그렇게 되셨습니까. 다만, 그 마음은 절대 제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말씀하셔선 아니 되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히 아바마마께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저하의 나이를 고려해 보건데. 명확히는 단정 짓기 어려우나. 사람들은 그 감정을 이렇게 부르곤 합니다.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세자 이환.
-사람들은 그걸 연모(戀慕)라고 부르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스승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끝나는 쿠키 영상.
└ 미쳤다!!! 분명 폭군 때문에 이환이랑 영이가 이어지는 건 맞는데. 이거 이어진 게 맞아?
└ 아니지 ㅠㅠ 당장 폭군이 영이가 세자빈이 되면 외척을 날려버리려고 할 텐데. 그러면 영이네 집안 쑥대밭 되는 거야···.
└ 문제가 거기서 끝이 아님. 저 꽁냥꽁냥한 두 사람을 향해 오랑캐들이 별동대로 국경을 넘고 있음. 예고편 보니까 다음 주 난리도 아닐 거 같은데?
└ 주말 빨리 지나가도 좋으니까. 빨리 월요일 되어서 3화 보면 좋겠다.
└ 아직 화요일이야. ㅋㅋㅋㅋ
김시율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환이 짤방?”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세자 이환의 짤방들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
심지어 그와 함께 서준이의 짤방들도 같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더 흥행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김시율은 2화 시청률이 나오길 기다렸다.
*
“엄마!”
“서준이 왔니?”
“네!”
내가 문을 열고 힘차게 엄마를 부르자. 옷을 개고 있던 엄마가 나를 안아주었다.
평소보다 생글생글한 내 표정에 엄마가 고개를 갸웃한다.
“우리 서준이 오늘 좋은 일 있었어?”
“네! 엄청 좋은 일이 있었어요.”
‘폭군의 세자’가 순풍을 타고 있다는 일도 기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기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하게 나뿐만 아니라 엄마도 같이 기뻐할 만한 소식이.
“드디어 나온대요!”
“응? 누가?”
주어를 빼고 소리친 덕분에 엄마는 한 번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요! 누구 말고 엄마랑 제가 열심히 준비한 옷이요. 드디어 준비가 모두 끝났대요.”
“정말이니?”
“네!”
그랬다.
‘폭군의 세자’에서 내가 출연하는 분량은 정확히 5화 초중반까지였다.
촬영장에서 미친 연기를 선보인 덕분에 쿠키 영상으로 꾸준히 나오는 걸로 분량이 늘긴 했지만. 어쨌거나 어린 세자 이환이 나오는 건 5화가 끝이란 말이다.
그 덕분에 DQ 패션에서 빠르게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번 주말에 정식으로 출시된다고 했어요!”
엄마의 꿈을 이루기 위한 ‘피치노’와 차서준의 콜라보 한정판.
그 결과물이 이번 주말 공개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