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가람 유치원 발표회.
다행히 유치원치곤 건물이 제법 큰 가람 유치원은 내부에서 부모님들을 모시고 발표회를 진행했다.
아빠가 갑작스러운 회사 일로 자리를 비운 지금. 엄마와 단둘 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가람 유치원 친구들의 멋진 모습을 발표회를 통 해 보여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역시나 유치원이라도 시작은 원장님 인사부터 시작되는 모양 이다.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 말씀도 들어야 한다는데. 그건 더 끔찍하겠네.
그런 혼자만의 생각을 하는 동안. 원장님의 인사가 끝나고 본 격적인 가람 유치원의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샛별반 연극 준비만 신경 쓰느라 몰랐다. 다른 반에서는 무엇 을 준비하지는 지에 대해.
노랫소리야 들려오긴 했는데. 저런 율동 같은 춤을 준비하는 거에 비하면. 애들에게 시달리며 연극을 준비하는 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차례는 순서대로 지나갔다. 샛별반은 발표회의 순서 가장 마 지막이었다.
샛별반 선생님을 따라 친구들이 옹기종기 무대 위로 향했다.
“샛별반 친구들은 연극 ‘바다 속 친구들’을 준비했어요. 열심 히 준비했으니 재밌게 봐주세요.”
연극의 막이 올랐다.
샛별반 친구들의 머리에는 아기고래, 대왕고래, 반짝 조개 등 등의 인형 모자를 쓰여 있었다.
“안녕. 아기고래야. 우리 오늘 숨바꼭질 할래?”
김도윤의 대왕고래를 시작으로 샛별반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무대 너머 부모님들의 얼굴에는 놀랍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유치원 친구들이 보여준 것들이 재롱잔치였다면. 방 금 김도윤이 보여준 대왕고래는 제법 어린이 연극배우 같았으니 까.
“좋아. 대왕고래야 네가 술래를 해야 해. 어제는 내가 술래를 했었고, 저번에는 돌고래가 했었잖아.”
“알았어. 그러면 내가 술래를 하고 숫자를 셀 테니. 얼른 숨으 렴.”
무대를 바라보는 부모님들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들이 떠오 른다.
슬슬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열심히 번갈아가며 마이크 앞 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상어 모자가 잘 있는지 확인한 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아기고래야. 저기 큰 바위 뒤에서 친구들이 너를 찾고 있어. 어서 나와 함께 가자.”
내 첫 대사가 끝남과 동시에.
“어머.”
“잘하네.”
“쟤가 그 서준이에요?”
“서준이요?”
“네. 우리 집 애가 매일 집에 와서 서준이, 서준이 노래를 불렀 거든요.”
큰 소리는 내지 못했으나 웅성거리는 부모들의 반응이 들린다.
6살 어린이들이 재롱잔치를 하는 무대 위에. 연기력 하나로 할 리우드까지 진출했던 배우가 환생하여 올라와 있으니.
아무리 삐약삐약 하고 울어도. 병아리 사이에 숨어있는 맹금 류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크기부터가 달랐으니까.
살짝 눈동자를 돌리니 뿌듯해하는 엄마가 보인다. 그 시선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샛별반 연극이 끝났다.
중간중간 엄마가 있는 곳을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아빠는 끝 까지 오지 못했다.
아쉽다.
다른 부모들이 나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 모습을 아빠 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
조금 늦게 도착한 서도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조카인 도윤이가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차서준이라는 아이가 누구인지.
잘한다는 이야기야 도윤이를 통해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 나 이대 애들 수준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모습은. 보지 않았다면 믿 지 못했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니,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 에 가까웠다.
딕션, 대사 속에 담긴 감정, 시선 속에 담긴 표현력.
이 모든 것들이 6살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라 차서준이라는 아이가 마이크 앞에 설 때만 분 위기가 돌변했다.
‘차서준이라는 저 아이가 등장할 때만 무대 위의 분위기가 변 한다.’
배우들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가진 재능.
상대의 호흡을 가져와 극적인 분위기까지 살릴 수 있는 배우 들이 존재했다.
보통 그런 재능을 가진 배우는 뒤늦게라도 정상을 찍곤 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무대 위에 있는 6살 어린이에게서 그 재능이 보 인다고 서도현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가진 재능은 둘째 치고 당장도 괜찮은데? 저 정도면 걔랑 비 교해도 괜찮지 않나.’
서도현이 떠올린 인물은 최근 박현우 감독의 영화에 참여했었 던 아역 배우 최이안이었다.
박현우 감독이 미래가 기대된다며. 촬영이 끝난 후에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던 아역 배우.
“야야. 우리 도윤이가 속상해할 만했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내 새끼가 시무룩해 있는 걸 어느 부모가 몰라. 그 나저나 저 정도면 진짜 잘하는 거 아니야? 소속사 대표 눈으로 보면 어때?”
“잘하지.”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기에 이어질 설명은 생략했다.
처음부터 대표가 된 게 아니다. 배우 매니지먼트에 들어가 로 드부터 몇 년을 구른 서도현이다.
그렇기에 서도현은 자신이 있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배우’, 그리고 ‘연기’라는 분야에 있어서 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감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 자신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저 6살의 꼬맹이는 장차 대배우가 될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 이다.
“이거. 뜻하지 않은 곳에서 탐이 나는 보물을 발견했네.”
“뭐?”
“아니야. 그보다 누나. 끝나고 저녁 먹기로 했잖아.”
“왜? 어디 가야 돼?”
“아니. 도윤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서준이란 친구랑 친하다 고 하던데. 같이 먹는 건 어때?”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보내는 누나를 무시한 채. 서도 현은 한 명만 제외하고 재롱잔치를 벌이고 있는 무대 위로 시선 을 돌렸다.
*
“오늘 우리 가람 유치원 친구들 너무 고생 많았어요. 어머님, 아버님들도 우리 샛별반 친구들을 응원하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 드려요.”
샛별반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가람 유치원 발표회 가 끝났다.
아쉽게도 사고가 터진 회사 일을 다 수습하지 못했는지. 아빠 는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서준아. 아빠가 회사 일이 정말 바쁜가 보네.”
“그런가 봐요. 엄마랑 이제 짜장면 먹으러 가면 돼요?”
여기서 내가 아빠를 찾았다면 엄마는 정말 당황했을지도 모른 다. 주변 대부분 엄마, 아빠가 함께한 가족이 대부분이었고. 심지 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들도 있었으니.
하지만 엄마 손을 꼭 잡고 짜장면만을 찾자. 엄마는 내게 들리 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면 엄마랑 우리 서준이랑 같이 짜장면 먹으러 갈까?”
“네! 좋아요.”
그렇게 엄마 손을 잡고서 중국집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서준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 은 오늘 연극에서 제법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김도윤이었다.
김도윤은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 아빠 모두 왔다. 그리고 거기 에 특별 손님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김도윤이 몇 번이나 언급을 했었던 외삼촌. 그 외삼촌이 김도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안녕. 우리 도윤이랑 같이 샛별반에 다니는 서준이구나. 안녕 하세요 어머님. 저는 도윤이의 외삼촌 서도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준이 엄마 김미경이에요.”
한 가지 더 김도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김도윤네 집은 제법 산다.
당장 김도윤의 손을 잡고 있는 외삼촌 서도현의 옷만 보더라 도 그렇고. 또 그 뒤에 있는 김도윤의 엄마, 아빠 역시 마찬가지 였다.
본격적인 용건을 꺼내기 위해 나선 건. 바로 김도윤의 엄마 서 연주였다.
“안녕하세요, 서준이 어머니. 저는 도윤이 엄마 서연주에요. 저희 부모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6명 식당을 예약했는데. 일이 생 겨서 못 오게 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네. 많이 기대하셨을 텐데 아쉬웠겠어요.”
“괜찮아요. 못 오셨지만 오늘 연극을 보여드리려고 동영상을 찍어두었으니까요. 그보다 마침 서준이네가 어머니만 오셨으면 저희와 오늘 저녁 같이 하는 건 어떠세요?”
“네? 그게···.”
어머니가 잠시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본다. 아마 짜장면을 노래 부르던 내가 걱정되어서겠지.
“도윤이가 집에 와서 서준이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 라요. 유치원에서 가장 친해진 친구라고.”
“그래요? 서준이도 집에 와서 도윤이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했다.
삼총사에서 사총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엄마, 아빠가 유치 원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서 안심했으니까.
“아, 저희가 이미 예약을 하면서 비용을 다 지불해서 그래요. 중식당으로 잡았는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셔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엄마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비용 까지 다 지불이 되었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당장 여기서 택시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려던 참이니까.
가계부를 쓰면서 한숨을 내쉬는 엄마를 보았기에 굳이 동네 짜장면이 아니어도 되던 나였다.
“서준아. 같이 가자.”
잠시 외삼촌의 손을 잡고 있던 김도윤이 나를 부른다.
“전 좋아요.”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엄마와 나는 김도윤네 가족이 예약했 다는 중식당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소한 몇 가지 놀람은 있었다.
먼저 김도윤의 가족을 따라 유치원을 나선 엄마의 눈이 휘둥 그레진 일이었다.
“제 차로 가시죠.”
김도윤네 부모님의 차는 평범한 국산 SUV였다. 그 가격이 제 법 나가기는 했지만 국산차란 말이다.
허나 김도윤의 외삼촌인 서도현이 타라고 안내한 차는 외제차 였다. 그것도 엄청 비싸 보이는 고급 세단.
외제차 브랜드가 알던 것과 다르니 정확히는 알 수가 있어야 지.
“아, 이상하게 생각하실까 봐.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 다.”
두 번째는 서도현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을 때였다.
[구름엑터스 대표 서도현]
나야 전혀 다른 세상이기에 연예인들이 누가 있는지 다 모르 기에 별 반응이 없었지만.
엄마는 아니었나 보다. 서도현의 명함을 받고서 구름엑터스라 는 글자를 확인한 엄마가 깜짝 놀랐다.
“하하. 아시는가 보군요.”
“맞아요. 아까 처음 보았을 때 긴가민가했었는데. 엄청 유명하 신 분이 오늘 저희 서준이와 차까지 태워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도윤이가 유치원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서준이 를 계속 말해서. 제가 오히려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몇 가지 일들을 경험한 다음 중식당에 도착해 김도윤네 가족과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
서도현의 고급 외제 세단이 굽이진 골목을 올랐다.
“저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저희 집이에요.”
“여기서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서준이랑 같이 걸어갈 수 있어 요.”
“아닙니다. 오늘 누님께서 꼭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했거 든요.”
엔진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 차가 서서히 멈춘다. 서도현이 먼 저 운전석에서 내린 뒤, 내가 있는 뒷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자 서도현이 미소를 짓는다.
엄마도 이어서 태워다주어서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는 순간.
서도현이 할 말이 있다면서 돌아서려는 엄마를 불렀다.
“서준이 어머님. 사실 오늘 발표회에서 서준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무슨 생각이요?”
“서준이는 연기에 정말 큰 재능이 있다고 말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서준이한테 연기를 시켜보면 어떨까 합니 다.”
“연기를요?”
연기를 해보자고?
“네. 지금 당장 바로 아역 배우를 시작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서준이가 제대로 연기를 배워보면 어떨까 싶어 어머 님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아. 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슨비용 같은 건 전적으로 회사에서 지원할 테니까요.”
이해할 수 없다는 엄마의 표정을 보고선 서도현이 황급히 말 을 잇는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말 엄청난 재능 을 가진 어린 친구를 보고 나니. 배우 소속사 대표로서 욕심이 나 서요.”
“재능이요? 우리 서준이가요?”
“네. 어머님께서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친구, 아직 어리지만 정말 한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다. 이렇게 말입니다.”
구름엑터스가 얼마나 큰 회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서도현이라는 저 사람.
제법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
“서준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잠시 생각에 잠긴 엄마를 뒤로하고선 내게 묻는다.
어떠냐고?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