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수확의 계절 (8) >
모자를 벗어들고 열심히 흔드는 김현섭. 그 옆에 감독을 비롯한 스텝들과 무명 배우들까지. 남조윤이 촬영했던 독립영화 식구들이 단체로 앉아있었다. 남조윤이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스텝들이 의자 밑에서 뭔가 꺼낸다.
설마 플랜카드는 아니겠지. 흠칫했는데, 다행히 카메라였다. 앞자리 기자들 것보다도 거대한. 하긴 저 사람들 영화 스텝들이지. 장소가 영화관이 아니었다면 필름 카메라를 가져와도 돌렸을지도.
무대인사 끝나면 따로 인사해야겠네.
생각하며, 남조윤을 바라봤다. 입 끝이 살짝 올라가있다.
배우들이 다 모이자 기획피디가 마이크를 들었다.
“이야, 배우 분들이 대단하셔서 그런지 취재열기가 뜨겁네요! 오늘 얼라이브 재밌고 보시고 가족, 친구, 동료, 모르는 사람들한테 홍보 좀 부탁드리고요. 그럼 감독님과 얼라이브 출연진 인사 듣겠습니다!”
귀청을 찢을 듯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
“조윤 씨 저기 있으니까 낯설다. 그죠?”
“저런 탑배우들이랑 같이 무대인사도 하고. 되게 멀게 느껴지네.”
“조윤 씨도 이제 우리랑 사는 세계가 달라지는 건가?”
독립영화 식구들이 소곤거렸다.
“상업영화에 몇 컷 나온다고 뭐, 단번에 인생이 바뀌나?”
퉁명스런 목소리가 찬물이 끼얹었다. 이성현이었다.
“성현 씨는 시사회 때 같이 안 봤나? 조윤 씨 몇 컷 아냐, 꽤 많이 나와.”
“맞아. 캐릭터도 엄청 임팩트 있어. 얼라이브 흥행몰이하면 분명 조윤 씨 인지도도 확 올라갈걸?”
감독과 조감독의 말에 이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마나 흥행할진 봐야 알죠. 며칠 있으면 할리우드 작품도 개봉하는데.”
“듣자듣자 하니까. 네가 찍은 영화 폭삭 망했다고 남의 영화도 저주하냐?”
김현섭이 끼어들었다. 이성현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조감독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야, 이송하 쟤는 조명이고 반사판이고 필요 없겠다. 자체발광이네.”
“연기가 더 대박이죠. 얼라이브랑 로열패밀리랑 동시에 촬영했다는데, 완벽하게 소화했잖아요. 완전 극과극인 캐릭턴데. 아이돌 출신이 아니라 아역배우 출신 같았다던데요.”
스텝들이 혀를 내둘렀다. 이송하가 마이크를 잡자 관객석에선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함성이 계속됐다. 능숙하게 인사를 마친 이송하가 옆을 봤다. 다음 차례는 남조윤이었다. 치솟았던 환호성이 쑥 꺼졌다.
“저 사람은 누구래?”
“같이 인사하는 거 보면 배우겠지. 일반인치곤 잘생겼잖아.”
“어쨌든 인사 길게 해줬으면 좋겠다. 딴 배우들 몇 분이라도 더 있다가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송하가 마이크를 넘기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어, 여러분. 영화 시작하기 전에, 제 옆에 있는 분 잠깐만 봐주세요.”
관객들이 하나둘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모르셔도, 영화 끝나고 나면 아마···.”
“알아요! 저 알아요!”
맨 앞줄에 앉은 여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배가 둥그런 임산부였다.
“시사회로 보고나서 바로무대인사 예매했어요! 오늘 조조도 봤어요!”
흥분한 임산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이크를 받은 남조윤이 고개를 숙였다.
“남조윤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떡해, 연기 너무 잘하세요! 영화 보다가 애 떨어질 뻔 했어요!”
“···애가 떨어지면 안 되죠.”
관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몇 명이 남조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임산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팬 됐는데, 인터넷 다 뒤져봐도 사진이 개미 콧물만큼 밖에 없어요! 그래서 얼라이브 몇 번 더 보려고요! 앞으로 작품 많이 찍어주세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남조윤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미지근하던 그의 표정이, 따듯한 온기로 데워져있었다.
*
두 시간 후, 관객들이 진빠진 얼굴로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입소문 좋을 만한데요, 이거?”
“나 한 번 더 봐야겠다. 스토리에 빠져서 이송하 얼굴을 못 핥았어.”
“두 시간동안 엄청 쫄리더라! 목에 담 걸릴 뻔 했어, 하도 힘을 줘서.”
호평이 줄줄 쏟아졌다. 부푼 배를 안고 지나가는 임산부를 본 여자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아! 나도 아까 그 배우 사진 찍을 걸! 그 미친 악역, 이름 뭐였지?”
“남··· 남조윤! 난 찍었다? 이 배우 뜰 거 같지?”
“보자! 헐, 대박 잘 나왔어! 나도 보내주라, 블로그에 올리게!”
그 모습을 본 독립영화 감독이 김현섭의 어깨를 짚었다.
“조윤 씨 반응 괜찮은데?”
“그러게요. 조윤이 그 놈, 이번엔 진짜 잘됐으면 좋겠는데.”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잖아. 조윤 씨 같은 사람이 잘 돼야지.”
고개를 끄덕인 감독이, 주위를 둘러봤다.
“성현 씨도 그만 틱틱거리고··· 응? 어디 갔어?”
이성현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무명 배우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시발, 누군 인생 폈네. 오디션 떨어질 때마다 남조윤 보면서, 십년을 매달려도 안 되는 저런 답 없는 인생도 있는데 나정도면 아직 괜찮은 거라고 위안 삼고 그랬는데. 남조윤도 될 놈이었던 건가.”
“운이지. 이건.”
이성현이 확신하듯 말했다.
“운 좋게 이런 작품에 캐스팅되고, 운 좋게 임팩트 있는 배역 얻고. 이런 기회가 나한테 왔으면 나도···.”
“말이라고 하냐? 성현이 네가 했으면 훨씬 잘했겠지! 나도 뭐···.”
무명 배우가 거들었을 때였다.
“저기.”
노트북과 카메라를 든 남자가 다가왔다. 명함을 내밀면서.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될까요?”
“어··· 기자세요?”
명함을 확인한 무명 배우가 놀라서 되물었다.
“무대인사 현장 취재하러 왔는데, 아까 얘기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얘기요?”
기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네. 배우 남조윤 씨랑 잘 아시나 봐요?”
***
“선우 씨! 와, 진짜! 와, 정말! 와, 말이 안 나오네!”
“진정하세요.”
“기사 뜬 거 봤어요! 대박, 실장님 진짜 신들린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피리 부는 매니저가 된 기분이다.
사무실을 코앞에 두고 라운지에 있던 직원들에게 둘러싸였다.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왱왱거린다. 양 손에 커피 캐리어를 든 홍보팀 여직원이 나한테 하나 건네며 말했다.
“SBE 필름은 지금 뒤집어졌던데요? 거기 대표님이 그랬다면서요. 개봉 첫 주 스코어 2백만 명이 목표라고.”
“그랬다더라고요.”
“첫 주 2백만이 목표였어? 그럼 뒤집어져야지. 내가 거기 대표였으면 백 텀블링도 했겠다!”
“2백만이 문제야? 오프닝 스코어가 79만 명인데!”
누군가 헛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다른 직원들도 혀를 내둘렀다.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래요.”
“이런 기세면 2백만은 오늘내일 안으로 바로 넘을 걸요?”
“지금 입소문도 좋다면서? 이러다 첫 주 스코어 5백만쯤 나오는 거 아냐?”
“천만은 뭐 일도 아니겠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얼굴이 다트 판이 된 기분이다.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예전에는 웃으며 흘려보낼 수 있었던 시선이 오늘은 부담스럽다. 속이 거북할 정도로.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태연한 척 입술을 문질렀다.
넵튠 미니앨범 작업 때 얼굴을 익힌 A&R팀 여직원이 말했다.
“분명 똑같은 사람인데. 사람 맞죠?”
“아니면 뭐겠어요.”
“근데 어떻게 고르는 것마다 잭팟이냐고요. 신통방통하게! 정 실장님만 있으면 우리 회사 A&R팀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면 넵튠 다음 타이틀곡도 그냥 실장님이 고르면 될 것 같은데요?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고!”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번졌다.
농담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 알고 있는데도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A&R팀 직언의 말을 듣는 순간, 겨우 눌러놓았던 것들이 튀어나왔다. 프리티걸. 이태신 실장. 작곡가. 넵튠이 부르면 더 대박이었을 거라고 김현조가 확신했던 곡. 넵튠 앞에 지저분하게 널린 문제들을 쓸어내고, 내 다음 선택도 실패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성공이 보장된 곡.
“여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불쑥,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2팀장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일 없어?”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인사만 하고 걸음을 옮겼다. 얼라이브의 성공적인 스코어 때문인지 2팀장은 독 오른 가오리처럼 심기가 불편해보이고, 나도 정신상태가 아슬아슬하니까.
“정선우.”
2팀장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들었다.
“···네.”
“너 넵튠 관리는 잘 하고 있냐? 거기 요즘 시끄러운 것 같던데.”
“늘 바람 잘 날이 없죠.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래? 난 다른 떡에 한눈파느라 넵튠은 내팽개쳐 둔거 아닌가 걱정했지.”
남조윤한테선 걸고넘어질 만한 게 없나보지. 넵튠 얘길 꺼내는 걸 보면.
본인 일이나 신경 썼으면 좋겠는데.
웃는 얼굴을 하고 대꾸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오히려 팀장님이 저한테 너무 한눈파시는 것 같은데요.”
“이 자식 이거, 말하는 게 나날이 티꺼워지네.”
2팀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임마, 한창 잘 되고 있을 때 겸손해야지. 언제 넘어질 줄 알고.”
내가 다시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선우 씨! 빨리 들어와 보세요, 남조윤 씨 기사가 떴···!”
뛰쳐나온 홍보팀 여직원이 2팀장을 보곤 움찔했다.
2팀장이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기사? 무슨 기사?”
사무실로 들어가니 컴퓨터 앞에 사람들이 수북하게 모여 있었다.
3팀장과 김현조, 이관우를 비롯한 3팀과 홍보팀 직원들이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홍보팀 박 팀장은 핸드폰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언성이 높다.
“아니, 부장님. 남조윤 씨가 홀몸도 아니고, 우리 식군 거 알면서 이러기예요? 대체 이런 건 언제 다 취재한 거야? 독점기사를 낼 거면 나한테 미리 언급이라도 좀 해주지. 이렇게 갑자기 던져버리면 어떡해?”
취재? 독점기사?
남조윤과 관련된 일 중에 터지면 문제가 될 만한 게 뭐가 있지?
전 소속사 소송관련 문젠가? 그건 그쪽 과실이 더 큰데.
작년에 박 감독이랑 한바탕 했던 거?
아니지. 이것도 박 감독이 지은 죄가 있으니 생각 없이 떠들 리가 없는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곧장 물었다.
“뭐예요? 남조윤 씨 기사라는 거.”
“그래, 뭔데 야단이야?”
따라 들어온 2팀장이 덧붙인다.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린 김현조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정확하게는, 남조윤 씨랑 네 기사지.”
“저요?”
“기사 올려봐.”
이관우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화면속의 기사가 위로 올라간다.
곧 헤드라인과 굵은 리드문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또 한 번 미다스의 손 증명한 정선우 실장, 작품뿐 아니라 사람까지?]
10년 무명세월을 떨치고 얼라이브의 씬스틸러가 된 배우! 남조윤은 누구?
뭐야, 이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인데.
김현조의 말처럼 남조윤의 기사라기보다는 우리 둘의 기사였다. 독립영화 촬영장에서 남조윤과 내가 처음 만났던 이야기. 그리고 SBE 필름에서 최성원 감독과 오디션을 본 일. 얼라이브 촬영. 나와 남조윤이 함께한 지난 몇 개월이 고스란히 활자로 박혀있었다.
W&U에서 남조윤과 미팅을 했다가 전속계약이 불발됐던 일까지.
3팀장이 들으라는 듯 기사내용 일부를 읽었다.
“W&U 관계자는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미팅을 담당했던 팀장이 남조윤을 두고 가능성이 떨어지는 배우’라고 평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담당 팀장이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라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 봄, 수확의 계절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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