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46화 (146/218)

< 봄, 수확의 계절 (7) >

“곡이요?”

이태신 실장이 입맛을 다셨다.

거칠게 거스러미가 돋은 입술이 열리는 그 몇 초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구했죠.”

“아.”

“가이드 녹음은 끝났고, 지금 가사 뽑고 있어요.”

“어떤 작곡가 곡이에요?”

미래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뭔가 목구멍에 턱 걸린 느낌인데, 입으로는 술술 말하고 있다.

귓속으로 들어오는 내 목소리는 지나치게 태연하고 낯설다.

“정 실장님은 들으셔도 모르실텐데. DOM이라고···.”

“도미요?”

“돔, 이요, 돔. 무명 작곡가예요.”

이태신 실장이 굉장한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

돔이라.

지난 미니앨범 작업 때 어지간한 국내 작곡가들 이름은 다 들어봤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래도 이름은 아니까 전화 몇 통 돌려보면 연락처 정도는 금방······.

알아내서, 어쩌게?

가이드 녹음까지 이미 끝났다는데. 어쩌려고?

“이름 있는 작곡가들한테는 곡 받기가 워낙 힘들어서요.”

이태신 실장이 계속 말했다.

“곡 준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가 보면, 대부분 몇 년 동안 여기저기서 거절당해서 갈데없는 곡인데. 아, 물론 저희한테는 그것도 감지덕지죠. 그렇게 오래 돌던 곡으로 잘된 사례도 많잖아요. 그런데···.”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곡비를 너무 세게 부르니까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저희는 무대의상 맞출 돈도 없어서 애들이 직접 수선해 입는 형편이라.”

웃는 얼굴위로 씁쓸함이 떠오른다.

계속 긁적거린 탓에, 그의 머리는 쥐가 헤집어 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넵튠은 작곡이 되는 멤버가 있어서, 이제 곡찾아 삼만리는 안하시겠네요.”

그의 시선이 잠깐 이태희한테 닿았다가 떨어졌다.

“로열패밀리 OST아직도 1위던데요. 저도 엄청 듣고 있어요. OST 곡도 그렇게 잘 빠졌는데, 앨범에 들어갈 곡은 얼마나 좋을지··· 혹시라도 작업한 것 중에 남는 곡 있으시면 꼭 저한테 연락···.”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태신 실장이 양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헛소리를 자주 해요. 넵튠 다음 앨범이 정규앨범이라 수록곡도 필요할 텐데, 곡이 남을 수가 없죠.”

내가 다시 입을 뗐을 때.

“프리티걸! 어디 계세요, 스탠바이 하셔야 되는데!”

“네, 네! 갑니다!”

스텝의 부름에 이태신 실장이 황급히 프리티걸 멤버들을 모았다.

“정 실장님, 저희는 그럼 먼저···!”

“명함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돌아서는 그를 붙들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내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다음에 시간 괜찮으실 때 술이라도 한잔···.”

“그럼요, 그럼요!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눈을 휘둥그레 뜬 이태신 실장이 내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허둥지둥 자기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프리티걸을 찾는 스텝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리기 시작했다. 입을 벙긋거리던 이태신 실장이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손에 들린 걸 내려다봤다. 명함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진다.

재앙과 희망이 들어있는.

얇은 종잇장을 꽉 움켜쥐고 돌아섰다.

프리티걸 멤버 한명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다가, 힐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또.

뭐지?

나오라고 염불을 욀 땐 들은 척도 안하더니, 연달아 두 번씩이나.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집중했다. 끊어졌다 붙었다 하는 정신 사나운 시야로 컴퓨터 모니터가 보인다. 손가락이 느리게 마우스 휠을 굴리고 있다.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고서야 화면에 떠 있는 게 뭔지 알아챘다.

기사다.

사진이 걸려있다. 방금 전에 봤던 그 애다. 프리티걸 멤버.

스크롤이 내려간다. 사진 아래에 리드 문구가 진하게 박혀있었다.

「프리티걸 정재이. “제 2의 이송하” 타이틀, 너무 과분해」

발끝이 움찔했다. 나는 다시 대기실 문턱을 밟고 서 있었다.

프리티걸 멤버, 정재이와 눈을 맞춘 채로.

좀 전까지는 삐걱삐걱하긴 해도 머리가 굴러가긴 했는데, 지금은 아예 파업이다. 미래에서 본 리드문구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제 2의 이송하?

그런 타이틀이 붙는다고? 얘한테?

분위기부터 압도적인 이송하한테 대면, 전체적으로 옅은 인상이다.

눈물점 때문인지 처연하면서도 어딘가 색기가 도는···.

샅샅이 뜯어보고 있는데 불쑥, 정재이가 손을 내밀었다.

“저도 한 장만 주시면 안 될까요? 명함.”

“오빠!”

목소리가 나를 생각의 늪에서 끄집어냈다.

임서영이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눈에는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 건지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릴 정도다.

“아까 오빠 명함 받아간 애기요, 스물두 살이래요!”

“무슨 애기야. 너보다 한 살 적은데.”

“애기죠! 오빠가 스물아홉 살이니까, 세상에, 일곱 살 차이네!”

“그러네. 근데 나 지금 생각···.”

“그 애 태어났을 때 오빠는 초등학생!”

“아니지. 유치원 다니고 있었겠지.”

“그럼 걔 중학생이었을 때 오빠는 군인! 군인아저씨!”

“···그건 맞고.”

도무지 심각할 틈이 없다.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관우와 스타일리스트는 자리를 비웠는지, 이태희랑 엘제이뿐이다. 둘 다 나를 보고 있다. 이어폰을 빼놓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관찰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왜 셋뿐이지?

“송하는 어디 갔어?”

“저 여깄어요.”

깜짝이야.

이송하가 내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있었다. 지박령처럼.

“한참 전부터 오빠 옆에 있었는데.”

“으아아, 일 났네, 일 났어.”

호들갑을 떨던 임서영이 내 무릎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

“오빠 첫눈에 넋 나가고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무슨 헛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설마 걔랑 사귀고 그러실 건 아니죠? 스물 둘인데? 일곱 살이나 어린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송하가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어차피 가는 덴 순서 없는데.”

“뭐?”

“아니, 이게 아니고, 어차피 같이 늙어 가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해. 일곱 살이 아니라 칠십 살 차이라도 괜찮지.”

“칠십 살은 안 괜찮지.”

내 말에 이송하가 입술을 벙긋거린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 새카만 눈동자가 거의 뱅글뱅글 돌고 있다.

엘제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나이는 상관없지. 근데 아까 걔는 얼굴만 보면 미성년자 같던데. 너무 동안이라. 송하 너랑 같이 있으니까 걔가 훨씬 어려보이더라.”

“내가 좀 겉늙었지.”

이송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샜다.

이때다 싶었는지 임서영이 덧붙였다.

“맞아요. 걘 미성년자 같았어. 오빠 걔랑 사귀면 은팔찌 철컹철컹···!”

“너 나한테 이러는 거, 이거 병이다. 그리고 내가 사귀긴 누구랑 사귀어.”

“오빠가 걔한테 명함 줬잖아요!”

“아. 명함주면 사귀는 거야? 이 바닥에 내 명함 가진 사람 수백 명은 될 텐데, 내가 무슨 의자왕이냐? 그냥 준거야, 그냥. 내 명함은 너희도 있잖아. 실장 달고 명함 나오자마자 기념 삼아 준 거.”

“이거요. 저도 있어요.”

가방을 뒤지던 이송하가 명함을 꺼낸다. 내 명함.

“넌 그걸 왜 가지고 다녀?”

“집에도 하나 있어요. 이건 이동용 부적이에요.”

“아, 그래.”

명함을 도로 집어넣은 이송하가 손을 내민다.

“저도 새로 한 장 주세요.”

“두개나 있다면서, 또 왜?”

“아까 슬쩍 보니까 명함 디자인이 좀 바뀐 것 같아서요.”

이해할 수 없지만, 익숙한 일이다.

“···명함을 디자인별로 모아서 뭐하게?”

“서영 언니도 똑같은 인형인데 표정만 다른 거 계속 모으잖아요.”

임서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소리쳤다.

“야! 이송하 너, 비교할 걸 비교해라! 내 인형은 디테일이 엄청 다르거든!”

“이것도 디테일이 엄청 달라.”

이송하가 꿋꿋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그래. 이게 뭐 귀한 거라고.”

“그럼 두 장.”

지갑에 한 장만 남겨놓고 몽땅 꺼내줬다. 이송하가 꾹 다문 입술을 움찔거리며 웃는다. 수백, 수천만 원짜리 핸드백이나 구두를 협찬 받았을 때도 좋아하는 티를 안 내던 애가. 앞으로 얘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땐 명함을 뿌릴까.

우스운 생각을 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곧 이관우와 스타일리스트가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대기실 안에 평소처럼 시끌시끌해졌다. 이태희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고, 임서영은 자기 파트의 가사를 중얼거렸다. 이송하도 구석자리에서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안무를 연습했다.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는 건 한명 뿐이다.

엘제이가 발로 바닥을 밀었다. 바퀴가 달린 의자가 내 쪽으로 쭉 다가왔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넘어가지 마세요.”

“뭐에?”

엘제이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유혹에.”

*

엘제이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상황에는 딱 어울렸다.

정말 유혹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양쪽 귀에 뱀이 한 마리씩 달라붙어서 지껄인다.

그냥 삼켜버려. 그럴 수 있잖아. 정식 녹음도 안 했다는데.

삼켰다가 뱃속에서 썩으면? 미래에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 될지도 모르는데.

갈라진 혓바닥이 귓속으로 들어와서 뇌를 휘젓는 느낌이다.

찬 물로 샤워를 해봐도 마찬가지다. 정신이 또렷해지기는커녕 닭살만 돋는다.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다. 한걸음. 단 한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모든 게 변하는, 그런 갈림길 위에 선 기분이다.

어느 순간 알람이 울렸다.

나는 고민에 쉼표를 긋고 움직였다.

창밖으로 하루가 밝아오고 있었다.

“정 실장님, 왜 이렇게 까칠해 보여요? 잠 설쳤어요?”

버스 뒷좌석에서 SBE 필름 기획피디가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잠을 설치기만 했을까. 한숨도 못 잤다.

“피디님이야말로 얼굴이 퉁퉁 부었는데요. 못 주무셨어요?”

“꼴딱 샜죠. 개봉전날은 늘 그래요. 잠들면 악몽을 꾸니까. 오프닝 스코어가 바닥을 긴다든지, 화장실 칸막이 안에 들어가 있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영화 거지같다고 욕한다든지, 그런 거요.”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비슷했다. 기념촬영을 위해 뒤쪽에 몰려있는 배우들도, 매니저들도, 스텝들도. 얼굴 위에 긴장과 졸음이 엉겨붙어있다. 심지어 최성원 감독도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 실장님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다른 때보단 좀 낫네요.”

기획피디가 농담조로 말했다.

가까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끼어든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 찾을 게 아니라 정 실장님한테 기도할까봐!”

“선우 씨, 로열패밀리에 운 다 쏟아 부은 건 아니죠? 좀 남겨뒀죠?”

“혹시 오늘 성적에 대해서 뭔가, 느낌 같은 거 좀 안 오세요?”

“저 무당 아닙니다.”

내 말에 스텝들이 뻣뻣한 얼굴로 웃는다.

뒤쪽을 바라봤다. 배우들 틈에 이송하와 남조윤이 나란히 앉아있다. 흥분과 긴장이 휘몰아치는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만 고인 물처럼 잔잔해 보인다. SBE 필름에서 나온 직원이 배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버스가 멈춘 곳은 영등포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앞이었다. 무대인사가 있는 회차를 예매하는데 실패했는지, 배우들이 이동하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팔뚝만한 대포카메라까지 보인다.

“이기환! 오빠, 멋있어요! 좀 천천히 들어가지!”

“야, 박세령이다. 얼굴 주먹만··· 헐, 야, 이송하! 이송하! 얼굴 봐!”

“끝내준다, 진짜. 영화 꼭 볼게요! 열 번 볼게요!”

흥분한 목소리가 귀에 쑥쑥 박힌다. 배우들을 중간에 넣고 스텝과 경호원들이 사방을 에워싼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인사에 익숙한 영화관 관계자들 덕분에 수월하게 얼라이브 상영관 입구까지 도착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관객들이 좌석을 빠짐없이 채우고 있었다.

최성원 감독을 시작으로 이기환과 박세령이 손을 흔들며 들어갔다. 상영관 안이 들썩거렸다. 비명과 함성이 메아리쳤다. 나도 무대인사는 여러 번 봤는데, 이만큼 격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뭐, 라인업이 워낙에 화려하니까.

이송하에게 말했다.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멘트 잘하고 와.”

“네. 금방 올게요.”

이송하가 성큼성큼 들어간다. 영화 무대인사 경험은 처음인데도 긴장한 기색은 조금도 없다. 하긴 수천 명의 관객들 앞에서 공연도 하고, 드라마 프로모션도 했던 애니까. 이제 수백 명이 보고 있다고 긴장할만한 신인은 아니지.

시선을 돌려 남조윤을 바라봤다.

“다녀와요, 형.”

“네가 가라니까 가긴 하는데.”

“내가 아니라 SBE 쪽에서 부탁한 거예요. 무대인사 같이 돌아달라고.”

목을 긁적이던 남조윤이 이내 관객석 앞으로 걸어갔다.

영화가 끝난 후였으면 좋았을 텐데. 영화 시작 전에 진행하는 행사라 관객들의 반응이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배우들 끄트머리에서 같이 들어오니까 저 사람도 배운가 보다, 하고 예의상 쳐주는 박수가 전부였다.

아쉽게 혀를 차고 있는데, 남조윤이 갑자기 멈칫했다. 놀란 듯한 눈길이 관객석 한 곳에 잠시 머무른다. 혹시 아는 사람이 왔나 싶어서 남조윤이 바라봤던 곳을 훑었다.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관객석 정중앙에, 낯익은 얼굴들이 주르륵 앉아있었다.

< 봄, 수확의 계절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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