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13화 (113/218)

<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4) >

“어, 선우 씨! 로열패밀리 기대하고 있어요!”

기대하지 마.

“정 실장님! 미다스의 손! 저 웰메이드 주식 살까 고민 중인데!”

사지 마.

어딜 가나 저 얘기다. 그놈의 로열패밀리, 로열패밀리. 들을 때마다 위에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가장 압권인 건 회사 안에서 임주원과 성 실장을 맞닥뜨렸을 때였다.

“정 실장님, 주원 씨 오늘 전속 계약서에 도장 찍었어요. 그리고 우리 회사에서의 첫 작품은 로열패밀리가 될 거 같아요.”

“뭐라구요?”

“서브 주연 있잖아요. 간판 남주는 어마어마한 한류스타 캐스팅한다길래 아쉽지만 포기했고. 서브라고 해도 분량이나 사연이 메인 못지 않아서 괜찮겠더라고요.”

성 실장의 웃음이 커질수록 내 영혼은 찌글찌글해졌다.

임주원이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 드라마 한류스타 행 티켓이나 마찬가지라던데. 저번 소속사는 일 거지같이 잡아줘서 문제였는데, W&U 오자마자 뭔가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네요. 캐스팅 확정되면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맙소사.

로열패밀리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

금광이었다가 똥광으로 추락한 그거. 망할 줄도 모르고 내 손으로 직접 고른 그놈의 드라마. 어떻게 해야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 당장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답을 못 찾고 있다. 생각을 좀 할라치면 일이 터지는 바람에.

-선우야, 그 뭐냐, 데일리? 데일리 어쩌고 하는 신문사에서 인터뷰 좀 해달라고 집으로 전화가 왔는데 어쩌니?

이런 일.

-기자가 아주 통사정을 하더라. 괜한 말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너한테 물어본다고 하고 일단 연락처만 받아놨는데, 어떡할까? 엄마가 인터뷰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냐, 엄마. 절대 그런 상황 아냐. 번호만 알려줘, 내가 정리할게.”

전화를 끊자마자 기자 개인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인지, 내 전화는 아예 안 받는다. 괜히 집으로 연락하지 말고 용건 있으면 나한테 하라고 문자를 보내놨다.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며 콩국수를 먹던 김현조가 말했다.

“기자가 집으로 전화했대?”

“네. 어떤 기잔지 할 짓도 더럽게 없네요.”

“야, 네가 진짜 유명해지긴 했나 보다.”

네티즌들이 요즘 씹고 뜯고 맛볼 거리가 부족한 건지, 아니면 W&U 홍보팀과 웰메이드 마케팅팀의 합작이 제대로 먹힌 건지. 요 이틀간 머리털 나고 가장 큰 유명세를 누리는 중이다.

전화 끊자마자 또 전화벨이 울리는 거 봐라, 젠장.

“이번엔 또 누구냐? 뭔 밥을 못 먹게 하네.”

“······이번엔 황제현 씨네요.”

“누구? ‘지금우리’팀 황제현? 그 사람이 왜?”

나도 모르겠다. 떨떠름하게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우 씨! (선우 씨 오랜만이에요!) 우리 지금 프로그램 녹화 중인데!

스피커폰인지, 황제현 이외의 다른 멤버들 목소리도 섞여 들린다.

-용돈 고르기 하고 있거든? 1번이랑 2번 중에 하나만 골라줘!

“네?”

-둘 중 하나는 꽝이고 하나는 10만 원이야! 제한시간 가고 있어! 5초 남았어, 5초! 우리 좀 살려줘! 1번? 2번?

“일 번이요.”

녹화 중이라길래 아무거나 찍었는데, 건너편에서 곧 고함이 터졌다.

-으아아, 신사임당! 10만 원이다! (선우 씨 대박! 진짜야! 역시 미다스의 손!) 거봐! 내가 정선우 찬스 쓰자고 했잖아!

꽝이나 걸릴 것이지 또 맞고 야단이야.

멤버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배터지게 받고 전화를 끊자, 앞에서 김현조가 배를 잡고 낄낄거린다.

“정선우 찬스란다. 야, 이건 진짜 연예인들한텐 꿈같은 일인데. 어쩌다 너한테 이런 행운이 갔냐. 너 방송인으로 전향할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로드 붙여줄게. 안 그래도 다들 너한테 직접 말은 못하고, 나한테 떠보라고 난리다.”

“일없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김현조가 피식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걱정하지 마. 아쉬워하긴 하겠지만, 등 떠미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나한테 예능 나가라는 사람이 없는 건 좀 희한하긴 하다. 내가 화제가 될수록 넵튠이랑 로열패밀리도 덩달아 홍보가 되니까 졸라댈 만도 한데. 실제로 스타 매니저가 빵 터진 후로 꽤 시달리기도 했고.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김현조가 말했다.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셨거든. 네가 원하는 거 아니면 떠밀지 말라고.”

“대표님이요?”

“어. 그것 때문에 대표님이 너 엄청 챙긴다고 소문 돌고 있잖아.”

백한성 대표의 여유로운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백한성 대표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은 어떤 대책을 만들어냈을까.

김현조가 좀 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일이 너무 커지는 거 같아서 부담되냐?”

“난데없이 노스트라다무스가 된 느낌이라서요.”

“지금은 귀찮고 부담스럽더라도, 나중을 위해서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이 이미지 잘 다져놔. 미다스의 손, 네가 찍으면 성공한다. 이런 좋은 이미지는 돈 주고도 못 만들어, 임마. 만약에······.”

김현조가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임원급으로 올라가서 네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거나, 아니면 독립해서 네 회사를 차린다거나 했을 때. 이런 유명세가 그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보라고.”

내 회사를 차렸을 때라. 다른 때였으면 좀 솔깃했을 텐데.

김현조가 씩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부담스러울 거 뭐 있냐, 타이밍 딱 좋잖아. 다음 작품이 로열패밀린데.”

그게 문제라고. 그게.

“로열패밀리는 못해도 중박이야. 투자 대비 결과가 아쉬울 수는 있어도, 절대 망할 일은 없을걸?”

나도 그럴 줄 알았지.

지금 포털에 내 이름을 치면 로열패밀리가 연관검색어로 뜨는 실정이다. 이대로 미래를 바꾸지 못하고 로열패밀리가 망하면, 미다스의 손은커녕 똥손이라고 불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양이 수호령 때나, 앨범 발매 때나. 다들 망하면 어떡하니 전전긍긍할 때는 저 혼자 여유롭게 ‘잘되는 건 당연하고 얼마나 잘될까가 문제죠’, 이런 표정 짓고 있던 놈이. 희한한 타이밍에 심각해지네.”

그때는 정말 잘 되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놨었으니까.

김현조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네 선택을 믿어, 임마.”

*

이 시점에 로열패밀리에서 발을 빼는 건 어렵다.

아직 논의 중인 임주원이야 계속 머리를 짜내다 보면 말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송하는 이미 도장까지 찍었으니까. 지금 와서 엎으면 위약금은 둘째치고 배우로서의 이미지에 오점이 남는다. 탑급 베테랑이 그래도 빈축을 살 일인데, 신인인 이송하야 말할 것도 없다.

하나 방법이 있다면······ 부상에 의한 하차인데.

팔이나 다리를 다쳐서 장기간 깁스라도 하면, 촬영일정에 지장을 주게 되니까. 제작자 측과 얼굴 붉힐 일 없이 그림 좋게 하차할 수 있겠지.

“오빠, 대본리딩 하다 말고 뭐 하세요?”

이송하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물었다.

정신이 확 들었다. 이런 미친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미안. 잠깐 미친 생각 좀 했어.”

“아. 저는 제 다리 보시는 줄 알았는데.”

“아냐.”

“아니구나.”

등골이 다 서늘하다. 요즘 계속 이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더니 아예 미쳐가는 건가. 깁스는 무슨 얼어 죽을.

“어, 아냐. 시간도 늦었는데 잠깐 쉴까? 안 피곤해?”

“전 멀쩡한데 오빠는 피곤하신 거 같아요. 오늘은 이만큼만 해요.”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는 눈을 보니 가슴이 쿡쿡 찔린다. 대본리딩, 대본리딩 노래를 부르던 앤데. 내가 집중을 못 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 만든 첫 대본리딩을 허무하게 날렸으니.

“아냐, 좀 더하자. 내가 생각이 많아서 그래. 이번엔 집중하고···.”

“아니에요. 집에 가서 혼자 볼게요. 그리고 마음 탁 놓으세요, 오빠.”

이송하가 대본을 챙기면서 말했다.

“제가 열심히, 아니, 잘할게요. 저 이번엔 자신 있어요.”

*

밤새 책상 앞에 앉아있다가, 과열된 머리통을 식히려고 원룸 옥상으로 올라갔다. 봄도 끝물이라 아침인데도 바람이 미적지근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갯속에서 길을 찾는 느낌이다.

미래를 바꿀 방법이 없다면, 이제 넘어진 뒤에 재기할 계획을 세워놔야 할 때인 건가. 340억짜리 영화도 긍정적으로 스케줄 논의 중이니까. 다음 작품에 성공한다면 드라마 하나 망한 건 만회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망할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책 없이 계속 가는 건, 정말 속 뒤집어지는 일이다.

거기에 낭비되는 시간이 눈물 나게 아깝다. 그리고 로열패밀리를 선택함과 동시에 시기가 겹쳐서 포기해야 했던, 아까운 드라마들이 눈에 밟힌다.

특히 이건 손채영한테서 뺏어온 작품이라 더 울화통이 터진다고.

원래라면 손채영이 했을지도 모르는 작품인데. 망해도 손채영이 망하는 거였는데.

손채영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이 드라마가 망하면 그 여자가 좋아죽을 걸 생각하니까 지친 몸에 연료가 샘솟는 기분이다. 그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옥상을 빠져나가던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박우정 기자였다.

-실장님! 로열패밀리 간판 남주, 캐스팅 누가 유력한지 살짝 귀띔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당연히 기사는 확정 소식 뜨면 올릴 거예요! 미리 써놓기만 하려구요! 으하하핫.

로열패밀리의 간판인 남주인공은 거의 확정됐다고 알고 있다.

윤태경.

국내에서도 명실상부한 탑배우고, 중화권에서도 인기가 어마어마한 대표적인 한류스타 중 한 명이다. 중국 예능프로 한편 출연하는데 개런티를 억 단위로 받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답장에 내가 아는 내용을 간단하게 적었다. 막바지 협상만 끝나면 도장 찍을 거라는 부분을 적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핸드폰의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밤을 새워서 눈까지 침침해졌나, 생각했을 때.

세상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아니, 누가 알았겠느냐고요. 간판이랍시고 비싼 돈 주고 데려온, 철석같이 믿고 있던 대애단한 남주인공이 다 된밥에 똥물을 퍼 얹을지.”

자글자글한 노이즈. 손에 들린 소주잔, 치킨의 고소한 기름 냄새.

그리고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전부 다 낯익은 것들이다.

이거 저번이랑 바로 이어지는 건가?

목소리를 머리에 새겨넣으며 내심 쾌재를 몇 번이나 불렀다. 미래를 엿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 것만으로도. 3리터 짜리 탄산수를 목구멍에 꽂아놓은 듯한 기분이다.

“계약하기 전에 알았으면, 아니, 하다못해 방송 타기 전에만 알았어도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제가 볼 땐 스타써치에서 엿 먹으라고 일부러 그런 타이밍에 터뜨린 것 같아요. 드라마 말아먹고 위자료 폭탄 맞으라고.”

간판 남자주인공, 그러니까 윤태경일 확률이 높은 배우가 드라마를 말아먹는단 말이지. 말아먹으려면 제 인생이나 말아먹을 것이지.

그런데 대체 어떤 사고를 치길래 드라마가 망하는 거지?

그것만 알면 상황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자, 아니 이번에는 확실히 알겠다. 저건 박우정 기자다.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세하게 알려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바랐을 때.

눈앞이 다시 어두워졌다. 튕겨 나가려는 것처럼.

안돼, 잠깐. 조금만 더.

소주잔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다고 느낀 순간.

귓가에 억지로 테잎을 늘린듯한, 괴상한 목소리가 스쳤다.

“진짜 미친 거죠. 중화권 한류스타가 딴것도 아니고 마약을···.”

정신을 차리자마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주르륵 미끄러지다가 아슬아슬하게 층계참에 착지했다. 머리통이 깨질뻔하긴 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상쾌하다. 뭐랄까. 머릿속에 천 년 묵은 먼지처럼 쌓여있던 답답함이 깡그리 털려 나간 느낌이랄까.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박 팀장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간판 남주인공이 마약 관련 문제를 일으켰고, 스타써치 언론사에서 그걸 터뜨렸고. 그 시기가 드라마가 이미 방송을 시작한 후라 빼도 박도 못하고 난장판이 된 건가?

-여보세요? 자기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 뭐 좀 여쭤보려고요. 팀장님 윤태경 씨 계약 언제쯤 마무리돼요?”

윤태경이 마약을 한다는 증거를 들이밀면 계약은 당연히 엎어지겠지. 국내에서도 큰 문제지만, 중국에선 연예계 마약 범죄에 특히 더 예민하니까.

촬영에 들어간 다음에 일이 터지면 캐스팅 과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테니 일정이 너무 꼬인다. 아무리 사전제작이라고 해도 쫓기듯이 촬영해야 할거고, 당연히 영화촬영이랑 스케줄 조정도 힘들어지겠지.

계약하기 전에 막는 게 제일 확실하고 좋은데.

-오늘 출근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계약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왜요?”

-웰메이드 쪽에서 윤태경한테 시놉 보내기 전에, 박도진한테 먼저 보냈었거든? 출연료 협상하다가 조율이 안 돼서 엎어졌다는데 박도진이 출연료 좀 더 깎아서 들어올 의향이 있다나 봐.

잠깐. 그럼 남자주인공이······.

-윤태경이랑 박도진이랑, 두 명 놓고 재는 중이래, 지금.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후보가 두 명이란 말이지. 그중 한 명이 마약으로 드라마 말아먹는 놈이고. 둘 중에 누군지 어떻게 골라낸다. 그걸 확실히 알아야 증거를 찾는데.

전화를 끊고 뛰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먼저 스타써치부터 캐봐야겠다.

<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4)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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