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83화 (83/218)

< 스타 매니저 (7) >

“W&U홍보팀입니다.”

여직원이 연휴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IBC 방송 섭외 때문에 넵튠 담당자분 연락처 좀 받고 싶어서요.

“네, 잠깐만요.”

-설 특집 나오신 정선우 매니저님 연락처로요. 육아 예능이라서.

정선우의 핸드폰 번호를 불러준 여직원이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선우 씨 찾는 사람 많네.”

“간만에 신선한 얼굴이잖아. 대중 반응도 좋고. 이런 경우는 거의 확 끓었다가 팍 식어버리니까, 그 전에 단물 쪽쪽 빨아 먹겠다는 거지.”

남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직원이 다시 말했다.

“어쨌든 이거 때문에 넵튠 인지도도 올랐고, 회사에서 선우 씨한테 보너스라도 줘야겠다.”

“어쩌면 승진할 수도 있겠던데. 앞으로 개인 스케줄 늘어나면 손이 부족하니까, 김현조 실장님이 밑으로 매니저 더 뽑아야겠다고 하시더라고.”

볼펜 끝으로 턱을 툭툭 건드리던 여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파티션 너머, 박 팀장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직원이 박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님, 선우 씨는 예능 더해볼 생각은 없대요?”

“글쎄, 없는 것 같던데? 이번 것도 넵튠 아니었으면 안 했을걸?”

“좀 아쉽네요.”

여직원이 입맛을 다셨을 때.

중년 남자가 홍보팀 사무실로 들어왔다. 목도리와 코트를 둘러 마트료시카처럼 둥글어 보이는 몸. 겨울이라 더 추워 보이는 벗겨진 머리. 본부장이었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넘긴 본부장이 바로 박 팀장에게 물었다.

“박 팀장, 혹시 들었어? IBC 수목드라마, 타임슬립. 그거 작가랑 감독 바람나서 와이프가 촬영현장에 찾아오고 난리였다는데?”

“들었죠, 그럼. 그래서 지금 급하게 새 작가가 붙어서 B팀 감독이랑 찍고 있대요.”

“둘이 뭐 있다고 정보 가져온 게 복덩이였지? 걔는 이걸 어디서 들었대?”

대화를 듣던 여직원이 팔꿈치로 남직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고양이 수호령, 뭍나인, 타임슬립, 처음에 선우 씨가 우리한테 한 얘기 다 맞았어. 이거 완전 대박 에피소든데. 선우 씨가 예능 나가서 이거 풀면······ 에이, 아무도 안 믿겠지?”

본부장이 힐끔 여직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참. 복덩이 걔가 예능프로 나간 게 또 반응이 좋다면서?”

“방송 못 보셨어요? 문화평론가랑 기자들이 설 특집 예능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으로 뽑았잖아요.”

“어이구야, 그 정도야? 걔가 웃기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 않아?”

“아니죠. 그런데 겉으로 봐선 예능이랑은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이 그렇게 캐릭터가 잡히니까, 오히려 그 갭이 재밌더라구요.”

여직원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보여드릴까요? 영상 돌아다니는 거 몇 개 저장해놨는데.”

금방 여직원의 모니터 뒤로 본부장과 남직원, 박 팀장까지 모여들었다. 거짓말 탐지기, 넵튠과 정선우가 서로를 흉내 내는 영상 등을 차례로 보여주자 본부장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여직원이 마지막 영상을 클릭하며 말했다.

“전 이게 제일 재밌더라구요. 본방으로 봤는데 이 부분에서 물 마시다가 코로 뿜었잖아요.”

매니저의 흑역사를 폭로하는 현장이었다. 이러다 질지도 모른다고 외치는 임서영. 방송용 메이크업 때문에 평소보다 더 싸늘해 보이는 정선우가 한우 따위 자신이 사주겠다며 뜯어말리는 모습이 이어졌다.

MC들이 부추기자 임서영의 입이 열렸다.

[예전 일인데요, 새벽에 다들 피곤해서 차 안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어요. 저 혼자 잠에서 깼는데, 갑자기 앞좌석에서 선우 오빠가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어떡하지?’ 그러시는 거예요.]

[외계인이요?]

MC들과 출연자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비친다. 정선우 본인도 모르는 일인 듯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제가 ‘갑자기 외계인이 왜요?’ 물었더니, 오빠가 엄청 심각하게 ‘그럼 내가 지구를 구해야 하나? 그런 건가?’ 하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잠꼬대더라구요.]

스튜디오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화면은 다시 정선우를 원샷으로 잡았다. 당황한 티가 별로 안 났지만,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니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제가 ‘오빠가 지구를 무슨 수로 구해요?’ 했더니 ‘그건 비밀이야.’ 하고 그러시더라구요. ‘음. 절대로 쫄쫄이 수트는 입지 말자.’]

본부장이 폭소했다.

*

축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군민운동장에 모인 관객들이 환호했다. 넵튠의 팀 명과 멤버들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 중에는 젊지 않은 나이도 꽤 보였다. 스타 매니저 덕분이지 싶다. 더 넓은 연령층을 대상으로 인지도를 높였으니까.

넵튠의 공연은 이제 한 곡을 남겨둔 상태다. 손목시계를 보자 얼추 예상했던 시간이다. 차를 뺄 동선을 확인하고 있는데, 안면 있는 행사대행사 직원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매니저님, 넵튠 요즘 스케줄 좀 어때요? 많이 바쁘죠?”

이럴 때 넵튠이 좀 떴구나, 실감이 난다.

‘거기, 매니저’라고 부르던 사람의 입에서 ‘매니저님’이 나올 때.

‘행사장엔 걸그룹이 분위기 띄우기 좋아서 무명이라도 부르는 건데, 의상 좀 더 노출 있는 건 없어요?’라고 묻던 사람이, 요즘 많이 바쁘냐면서 눈치를 살필 때.

“얼마 전하고 비교하면 뭐, 많이 바빠졌죠.”

“이야, 정말 확 컸네요.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행사 주최 측에 넵튠 섭외했다고 얘기하면 그게 누구냐고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넵튠 섭외했다고 하면 좋아한다니까요.”

친한 척 웃으며 말하던 직원이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매니저님, 넵튠 좀 있으면 신곡 나오죠?”

“지금 한참 녹음 중이에요.”

“그 전에 미리미리 스케줄 잡아야겠네. 만약 신곡이 히트치면 그때부턴 지금 가격엔 절대 못 부를 텐데. 단가 올라가도 가격조정 좀 잘 부탁해요.”

“그건 그때 가서. 아, 잠깐만요.”

얘기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네, 정선웁니다.”

-안녕하세요, 방송 섭외 때문에······.

작가가 랩을 하듯이 설명했다. 흘러나간 소리를 들었는지 방송행사대행사 직원이 입맛을 다시며 멀어진다.

수첩을 꺼내서 타이틀과 촬영일정, 방송 컨셉, 예정일 등을 휘갈겼다. 앞장에 빼곡하게 적힌 섭외 메모를 보니 저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걸렸다가, 도로 내려왔다.

-그래서 매니저님이 멤버들이랑 같이 출연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저도요? 그게 필수사항입니까?”

-스타 매니저보고 저희 컨셉에 너무 잘 어울리는 팀이라 연락드린 거라서요. 아, 당연히 매니저님한테는 출연료를 따로 챙겨드릴·····.

작가의 말을 끝까지 듣고 말했다.

“일단 스케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버릇처럼 혀를 찼다.

이게 몇 번째지. 방송 한번 출연한 것치고는 그 여파가 너무 크다.

언제쯤이면 날 보고 ‘아, 그, 그.’ 하면서 삿대질을 하거나, ‘매니저는 본업이고 지구 구하는 건 부업으로 하시는 거예요?’ 하고 헛소리를 던지는 사람들이 사라질까.

젠장, 빌어먹을 잠꼬대.

아마 미래 예지능력이 생기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일 거다. 왜 나한테 이런 특별한 능력이 생긴 걸까를 고민하던 때.

혹시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고,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서 ‘우리의 능력은 지구를 지키기 위한 거야! 함께 지구를 지키러 가자!’ 같은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잠꼬대까지 했을 줄이야.

임서영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일인데.

고개를 내저으며 배신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중학생쯤 됐을까 싶은 여자애 두 명이 배신자 앞에서 우물쭈물 서 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배신자가 특유의 웃는 얼굴로 물었다. 둘 중 더 적극적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내 쪽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자애가 친구를 끌고 내 쪽으로 조르르 다가온다.

“이분한테 말씀드릴게요!”

배신자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나는 최대한 웃는 표정을 짓고 여자애들을 내려다봤다. 내 기분을 살짝이나마 좋게 만들어줬으니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따가 넵튠 언니들 사인 한 장만 받으면 안 돼요?”

“기다려봐. 차에 탄 다음에 받아다 줄게.”

“감사합니다!”

상대적으로 얌전해 보이는 여자애가 배꼽 인사를 한다.

그리고 다른 쪽, 입이 근질근질한 듯 움찔거리던 애가 툭 말했다.

“지구 구하러 언제 가세요?”

“뭐?”

“근데 쫄쫄이 수트는 제가 봐도 아닌 거 같아요. 히어로 영화 보면, 그거 몸매가 엄청 좋아도 웃기잖아요. 근육 없으면 완전 시각테러겠던데!”

그러면서 내 몸을 훑어본다.

기가 막힌다. 나 지금 중학생한테 성희롱 당하는 건가.

얌전한 애가 친구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야, 하지 마. 화나신 거 같은데.”

“아냐. 방송 보니까 원래 기본표정이시래. 그죠? 지금 화나신 거 아니시죠?”

“화난 거야.”

“죄송합니다!”

상체가 폴더처럼 접혔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지는 않겠지. 얌전한 애가 흉악범이라도 본 것처럼 주춤주춤 물러서는 걸 보면.

여자애들이 도망치듯 사라지고 난 후에 배신자가 말을 걸어왔다.

“선우 너, 이렇게 된 거 방송 더 해보는 건 어때?”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이 정도로 반응 좋은데 아깝잖아. 이참에 아예 노선 변경해서 그쪽으로 가면 더 성공할 수도 있고. 네 적성에도 잘 맞을 것 같은데?”

지난번 일을 기점으로 배신자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내 앞에서는 저놈 가식의 두께가 조금 얇아진다.

저 웃는 뺨을 닭꼬치로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넌 다단계 영업하면 떼돈 벌 거 같은데 그거 해볼래?”

사기꾼이라고 하려다가 참은 거다.

농담처럼 ‘네 적성에도 잘 맞을 것 같은데’라고 했더니 배신자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 입은 넵튠 애들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송하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뽀얀 입김이 허공에 번진다.

“오늘이 제일 추운 거 같아요.”

“차에 히터 틀어놨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녹여.”

“오빠도 차 안에서 기다리시지. 추운데.”

얼음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얼어있는 애들을 승합차 안에 밀어 넣었다. 끄트머리에 있던 임서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으아으아, 오빠! 무대의상에 찬바람 숭숭 다 들어와요! 장난 아니에요! 얼어 죽겠어요!”

“죽으면 나랑 같이 묻히면 되겠네. 나는 이미 시체야.”

“호, 혹시 누가 또······.”

고개를 끄덕이자 임서영이 울상을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다면 주둥이를 꿰맸으면 꿰맸지, 절대 흑역사 얘기는 안 했을 거라며.

자기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는 임서영을 승합차에 태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까 왔던 여자애들이 멀찍이서 애타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손짓하자 부리나케 달려온다.

사인을 받고 좋아하는 애들을 뒤로하고 축제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넵튠을 가까이서 보겠다고 몰려든다. 예전엔 없던 일이다. 냉큼 창문을 내린 임서영이 손을 흔들었다. 함성과 사진 찍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정말, 많은 게 달라지고 있었다.

*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세트장.

그곳은 장례식장만큼이나 우울한 분위기였다. 출연 배우들은 물론 스텝들의 얼굴에도 여유와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쉼 없이 촬영을 이어갔다. 진창에 빠진 드라마를 빨리 끝내버리고 발을 빼고 싶은 것처럼.

탈의실에 들어간 손채영이 조 실장을 닦달했다.

“대표님은 대체 언제 귀국하신대?!”

“내, 내일 오신다니까.”

조 실장이 입술을 핥으며 계속 말했다.

“채영아, 대표님한테 가서 또 소란피우지 말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어. 이거 대표님 선에서 다 정리된 거래.”

“나한테 말도 없이?! 선생님 일인데, 오빠라도 나한테 얘기했었어야지!”

“넌 걱정할 거 없어. 2팀장님이 심경택 선생은 절대 네 이름 입 밖으로 못 꺼낼 처지라고 하셨으니까. 넌 그냥 모르는 척하고······.”

열심히 달래는 조 실장을 노려보던 손채영이 시선을 내렸다.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조 실장을 탈의실 밖으로 내보낸 손채영이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대표님 귀국하시면 제가 수습할 수 있는 데까지······.”

-수습?! 이게 지금 수습이 될 문제야?!

건너편에서 심경택 선생이 머리끝까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앞서 어떻게든 해보라고 안달복달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손채영이 말을 멈춘 사이 심경택 선생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백한성 대표 외국에 있는 거 맞아?! 너, 수습한다 말만 늘어놓고 나한테 독박 씌우고 빠지려고 수 쓰는 거 아니냐고! 지금 내 꼴이 어떤 줄 알아? 기사에 이름만 안 나갔지, 저거 나 아니냐는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아냐고! 이제 쪽팔려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

손채영은 대답 없이 탈의실 의자에 앉았다.

-이송하 일도 다 널 위해서 한 건데, 나 혼자 이렇게 독박 쓰고 말 것 같아?! 내가 입 열면 너도 끝나! 이미지 시궁창에 처박고 싶지 않으면, 네가 직접 백한성 대표 그 자식한테 기사 올라오는 거 다 내리고 언론통제······!

“저 협박하지 마세요, 선생님.”

손채영이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뭐, 뭐?!

“저 협박하지 마시라구요. 그리고 그건 절 위해서 하신 게 아니라 거래였죠.

-너······!

“백 대표님한테 어떤 말을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알아도 제가 더 알아요. 저는 까짓거 과거 병력 공개하고 기자회견 열면 돼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 입 열리면 그거 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당황한 심경택 선생이 더듬거렸다. 손채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 스타 매니저 (7)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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