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9) >
누가 나한테 ‘당신이 가장 미친놈이었을 때는 언제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지금이다.
3팀장이 대표실에서 얘기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백한성 대표에게 연락할 생각이니까.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보려고.
각오를 다지며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을 때.
손 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3팀장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대뜸 말한다.
-너, 바로 대표실로 올라와.
대표실에 들어가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
그런데 지금이 가장 긴장된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블라인드가 쳐진 실내는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3팀장과 본부장도 있지만 내 시선은 백한성 대표에게 고정된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어려운 사람이다.
적대적인 것도, 고압적인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나도 어디 가서 기가 약하다는 말을 듣는 놈은 아닌데, 저 사람하고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기가 쭉쭉 빨리는 느낌이다. 아니, 짓눌리는 느낌인가.
인사하고 3팀장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지난번에 전화통화하고 처음이지?”
“아, 네.”
뺨이 따갑다. 옆에서 3팀장이 괴상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대표님하고 전화통화도 했느냐고 묻는 얼굴이다.
“그때는 잘 찍었어.”
백한성 대표가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부장이 덧붙였다.
“그래, 너 그건 제대로 짚었더라. 중국에선 지금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드라마 이슈 차트를 휩쓰는 중인데 말이야, 그 밑에서 야금야금 고양이 수호령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더라고.”
본부장은 찻물을 홀짝이며 몇 가지 정보를 더 알려줬다. 모두 다 반가운 소식이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엔 딴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타이밍을 살피며 백한성 대표를 힐끔 쳐다봤을 때였다.
“넵튠 다음 앨범을 더블 타이틀로 가자고 했다면서?”
갑자기 본론이 훅 들어왔다.
백한성 대표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멤버 자작곡을 아주 적극적으로 밀었다며?”
“네.”
“이유가 뭐야?”
그거야말로 성공이 보장되다시피 한 곡이니까.
라고 말할 순 없고. 3팀장을 꾀기 위해 준비했던 얘기를 다시 꺼내 주르륵 읊었다.
마무리하고 백한성 대표를 바라봤을 때,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다르다. 아까까지는 흥미롭게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요하다.
마치, 따분하다는 듯이.
웃고 있을 때와는 인상이 전혀 달라서 저절로 어깨와 등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갸웃, 하고 그가 고개를 기울인다.
“음. 그리고?”
그리고, 라니.
할 수 있는 얘긴 탈탈 털어서 다 했는데?
“다른 이유는?”
“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고. 왠지 너한테는 그 곡을 밀어붙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니야?”
목덜미가 서늘하다.
백한성 대표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눈은 여전히 나에게 꽂혀 있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 머릿속을 낱낱이 읽히는 기분이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나야말로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설마, 나한테 정말 신기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내가 수상쩍은 짓을 몇 번 하긴 했지만, 그거야 운이 기막히게 좋다, 감이 좋다, 안목이 좋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지난번에 날 찾아왔던 직원들도 어디까지나 고민되는데 한번 물어나 볼까, 하는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고. 길거리 좌판에서 삼천 원짜리 타로점을 보는 것처럼.
백한성 대표가 생각하는 ‘다른 이유’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저 사람에게 사실을 토해내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다. 믿지 않아도 문제고, 믿어도 문제니까.
“말씀드린 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없다고?”
“네. 없습니다.”
젠장. 설득이 안 먹히면, 저번에 손채영 건으로 써먹은 카드라도 다시….
“그럼 됐고.”
뭐?
“이번 앨범은 더블 타이틀로 가 봐.”
갑자기 팽팽하던 실이 뚝 끊어진 것 같다. 죽어라고 돌리고 있던 머리가 멍해져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만 놀란 게 아니라 아까부터 나를 살얼음판을 싸돌아다니는 어린애 보듯 하던 3팀장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본부장도 황당한 표정이고.
태연자약한 건 백한성 대표, 한 사람뿐이다.
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한 번 더 믿어보지, 뭐.”
김현조도, 배신자도 말문을 잃은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입만 뻥긋거리던 김현조가 겨우 소리를 냈다.
“믿어보지, 뭐? 대표님이 그러셨다고?”
“그렇다니까.”
3팀장이 혀를 내두르며 나를 쳐다본다.
“복덩이 이놈은 대표님이랑 본부장님 면전에서 천연덕스럽게 지 할 말은 다하고 나왔어. 내 참,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긴장한 티도 안 내더라.”
엄청나게 긴장했는데요.
“현조야, 요즘 애들은 다 이러냐? 신입의 패기, 뭐 그런 거야?”
“그냥 얘가 미친놈이야. 난 입사한 지 1년 넘어서 6층 처음 구경했구만. 건영이 너는 대표님이랑 얘기해 본 적 있냐?”
“……아니요.”
“그래, 이게 정상이라고.”
나는 따끔따끔한 시선들 속에서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아직도 백한성 대표 얼굴이 아른거린다.
더블 타이틀로, 라고 툭 던지던 목소리…….
나는 밤을 새워 고민하고, 3팀장한테 달라붙어서 어렵게 꼬드기고 나서도 상황을 내 뜻대로 바꾸지 못해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는데, 백한성 대표는 말 한마디로 바꿨다.
나는 언제쯤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고개를 올려보면 위가 아득하긴 하지만, 어쨌든 당장은 한시름 놓았다. 묵직하던 것이 쑥 내려간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레일을 이탈해서 안갯속을 달리던 열차가 원래의 궤도로 진입했으니까.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떠오른다.
“웃지 마, 미친놈아.”
김현조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3팀장이 뒤이어 말했다.
“태희한테는 복덩이 네가 직접 얘기해줘라. 안되는 거, 네가 멱살 잡고 끌어올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네. 알겠습니다.”
“야, 너 그런데…….”
3팀장이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한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큰 건을 꾸역꾸역 밀어붙이냐. 망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엿 되는 거지.”
손날로 목 치는 시늉을 한 김현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뭐, 너 잘리면 내가 다른 회사 소개해 줄 게. 이제 3개월 경력도 있으니까 자리는 있을 거야.”
저건 진심이다. 백 프로 진심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현조가 3팀장과 함께 사라진다. 이제 남은 건 나와 배신자, 둘 뿐이다.
“너 말이야.”
배신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태희랑 뭐 있어?”
“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난 네가 연기 쪽에 주력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앨범 제작 쪽으로는 거의 문외한에 가깝다고 생각, 아, 미안.”
살짝 눈을 찡그린 배신자가 말을 고친다.
“별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 오히려 그건 내 관심분야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밀어붙이는 게 도통 이해가 안 돼서. 팀장님 말씀처럼 이거 잘못되면 지금까지 잘 쌓아온 공로가 빛바랠 수도 있는 건데. 뭐, 그래서 태희랑 뭐가 있는 건가 했지.”
“있긴 뭐가 있어. 태희 자작곡이 좋았고, 그래서 지금 시기 놓치기가 아까웠다니까. 그렇게 따지면 너야말로 사이먼 리랑 뭐 있냐?”
“……그럴 리가.”
내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배신자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까 대화할 때도 느꼈지만, 저놈은 사이먼 리의 곡이 성공할 거라고 자신하는 눈치다. 그래서 단독 타이틀로 밀고 싶어 하고. 그런데 미래에선 왜 이태희 자작곡을 밀어붙였던 걸까.
내심은 그 곡에 마음이 쏠려서?
아니면 그 곡이 내 손에 쥐어지는 게 불유쾌해서?
배신자가 다시 말했다.
“이렇게 되면, 너랑 나랑 사이좋게 한 곡씩 가져온 셈이 됐네.”
“그러게.”
“둘 중 어느 쪽이든 잘 돼서 넵튠 앨범 성공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됐으니까 소소하게 내기라도 할까?”
다른 사람 눈에는 평범하게 대화하는 모습 같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저 녀석과 나 사이를 연결하던 다리가 쩍쩍 갈라지고 허물어지는 게. 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것처럼.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내기.”
그날 밤, 숙소 현관문 앞에서 이태희에게 이야기를 전해줬다.
이태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로서는 처음 보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몇 번이나 물어보길래, 나도 느긋하게 몇 번이나 대답해줬다.
“타이틀…….”
애써 표정관리를 하더니 거실을 힐끔 본다.
다른 애들이 무슨 얘기하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얌전한 건 이송하뿐…… 인줄 알았는데, 몸만 얌전하고 머리와 목은 피사의 사탑처럼 점점 이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잠깐만요.”
이태희가 밖으로 나오더니 현관문을 닫는다.
문 닫힐 때 이송하 눈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는데.
“정말 타이틀이라구요?”
“그래, 더블 타이틀. 녹음하고 믹싱하려면 너도 바빠지겠다.”
“맙소사.”
이태희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그러면 뭐하나. 귀가 빨간데. 손 밑으로 드러난 입꼬리도 움찔거리고. 좋아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반응이 크다.
하하. 미친놈처럼 동분서주했던 게 보람이 있네.
몇 분 동안 혼자 흥분을 가라앉히던 이태희가 입을 열었다.
“계속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는 정말…….”
“감사는 무슨.”
“개처럼 연습할게요.”
뭐라고?
“아냐. 그러지 마.”
연습량은 지금도 넘쳐. 컴백무대를 링거 달고 할 생각이냐.
“어쨌든 애들한테도 전해주고.”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 말하는데, 이태희가 나를 덥석 붙들었다.
“맥주 한잔 하고 가세요. 지난번에 사오신 거 아직 남았어요.”
“응? 실장님이나 건영이도 없고 너희뿐인데, 그건 좀…….”
“비밀로.”
이태희가 손가락으로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여전히 팔을 붙들린 채로 생각했다.
일단 난 어제 밤을 샜다.
오늘 여러모로 심력 소모가 커서 어깨가 천근만근이고. 내일 일찍부터 이송하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스케줄도 있지.
이성은 술 처먹을 생각 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말하는데도, 내 육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어이 숙소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그다음이야, 뭐.
애들이랑 새벽까지 맥주캔을 부딪치다가 숙소 앞에 받쳐둔 차 뒷좌석에서 쪽잠을 잤다.
그리고 난생처음 가위에 눌렸다.
일어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지. 위가 묵직하더라고. 이송하가 촬영 때마다 입고 다니는 침낭 같은 패딩에 극세사 이불, 그리고 담요가 세 겹이나 덮여있었다.
누가 나 얼어 죽지 말라고 덮어놨나 본데, 질식사 안 한 게 다행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김현조에겐 비밀로 하기로 다들 입을 맞췄다.
김현조가 알면 날 죽일 테니까.
타이틀이 확정되자 앨범 작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안 그래도 넥스트 K스타와 고양이 수호령 촬영으로 바쁜 일정에 녹음준비까지 더해지자, 하루가 흡사 한 시간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몸은 힘들어도 버티게 된다. 그만큼 돌아오는 게 있으니까.
“시청률 추이 보면, 10프로는 기정사실이지.”
이봉준 실장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전염처럼 하품하고 대답했다.
“그렇죠. 홍보팀에서 벌써 시청률 공약 지킬 준비 하던데요.”
이틀 전에 방송된 3화, 4화까지, 연속으로 최고시청률을 갈아치우고 있다. 관계자들은 10프로를 넘어 얼마나 더 올라갈지에 초점을 맞추는 중이고. 촬영 현장에는 끊임없이 밥차나 선물, 먹을거리들이 들어온다. 덕분에 고양이 수호령 팀은 늘 축제 분위기였다.
“둘 다 잘도 잔다. 짠한 것들.”
이봉준 실장이 옆을 보며 혀를 찬다.
서지준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소파에 푹 파묻혀 자고 있다. 물론 내 옆에도 이송하가 꾸벅꾸벅 졸고 있고. 내 코트 자락을 꽉 붙들고서. 무슨 꿈을 꾸는지 아까부터 억세게 잡아당긴다.
새벽부터 시작한 촬영이 밤늦게야 끝나서 마음 같아선 바로 숙소 침대에다 눕혀주고 싶지만, 아직 스케줄이 하나 남았다. W&U소속 연예인들의 신년 인사 브릿지 영상을 제작한다나. 그것 때문에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휴게실에서 촬영팀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넵튠 멤버들이랑 한번 찍었는데, PBS에도 내보낸다고 해서 송하만 따로 추가촬영이 잡힌 거다. 뭐, 아직 넵튠은 공중파에서 신년인사할 급은 아니라는 거지.
사실 이송하가 서지준 옆에서 투 샷으로 인사하는 것도, 지금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라 핫한 상태니까 가능한 거다. 아직은 반짝 뜬 쌩 신인이니까.
“참, 송하는 광고 좀 안 들어와?”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얘기되는 건 있어요.”
안 그래도 기대 중이다. 성사되면 이송하의 첫 광고가 되겠지.
“지준씨는 광고 무지 들어온다고 들었는데요.”
거의 쓸어담는 수준이라던데. 아마 고양이 수호령이 끝나면 당분간은 TV 틀면 서지준 얼굴만 나오지 싶다. 이번 배역을 딱 맞는 옷처럼 소화해서 연기 스펙트럼도, 팬덤도 엄청나게 커졌으니까.
내 말을 들었는지, 서지준이 한쪽 눈을 뜬다.
“사실 선우씨 덕분이라 내가 뭔가 보답하고 싶긴 한데. 몸으로 갚을게요. 나 데려다 쓸 일 없어요?”
소름 돋게 잘생긴 사람이 은근하게 물어오니까 더 소름 돋는다.
쓸 일이라…….
고민하는데 서지준이 다시 묻는다.
“넵튠 출연하는 프로그램, 넥스트 뭔지하는 그건 어때요. 섭외전화 왔었다던데, 거기 한 번 나갈까요?”
“아뇨.”
누구 좋으라고.
“그 프로그램은 상종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정색하고 대답했더니, 나한테 사정을 들어 알고 있는 이봉준 실장이 킬킬 웃어댔다.
지난번 일 이후로 고준태 피디는 이송하를 불쏘시개로 쓰는 짓거리를 일시중지했다. 밉살맞은 작자 같으니라고. 매번 녹화 날마다 나를 붙들고 쪼아대고 있지만 계속 시간을 끄는 중이다.
회의 중이라서, 생각 중이라서, 설득 중이라서.
둘러댈 말이야 많다. 일하면서 제일 많이 배운 게 이거거든. 어쨌든 고준태 피디가 성질머리를 삭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피로가 싹 가신다. 내 에너지 드링크가 됐달까.
요즘은 ‘설득해 봤는데 결국 안 됐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고준태 피디의 울화통이 터질까를 즐겁게 고민 중이다.
그런데 서지준을 거기다 넣어주다니, 절대 안 될 말이지.
“그럼 다음에. 빚 하나 달아놔요.”
서지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을 때였다. 휴게실 문이 열렸다.
촬영팀인 줄 알고 이송하를 흔들어 깨웠는데, 막상 문 안으로 들어온 건 고준태 피디 뺨치게 상종하고 싶지 않은 작자들이었다.
이 구역의 미친년 외 1명.
손채영과 조 실장.
“뭐야?”
우릴 보자마자 손채영이 도끼눈을 뜬다. 시선이 서지준과 나, 이송하에게 콱콱 찍듯이 박힌다.
유난히 나를 노려보는 시간이 긴 것 같은데.
자다 일어나서 멍한 이송하가 손을 더듬거리더니 아까 먹던 곰 젤리를 움켜쥔다. 손채영이 또 달려들면 젤리라도 투척할 기세다.
물론 말릴 생각은 없다. 강하게 키워야지.
“돌겠네. 오빠. 스케줄 이렇게 잡을 거야?”
조 실장에게 짜증을 낸 손채영이 손에 쥔 종이를 꽉 움켜쥔다.
어딜 보나 쪽대본이다.
지난주,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3회까지 시청률이 쭉쭉 올라갔다. 4회도 현상 유지했고. 그래선지 쪽대본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손채영의 안색은 만개한 독초처럼 생생했다. 성질머리는 더 생생하고.
“나 신경 쓰이는 거 있으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 거 몰라?”
“그게 채영아, 드라마 스케줄이 오락가락해서 어쩌다 보니까…… 30초짜리 인사 하나 하고 바로 들어가면 돼.”
“이거 끝나자마자 밤새 또 대본 외워야 하는데, 이래서 그게 눈에 들어오겠어? 꼴 보기 싫은 인간 1위, 2위, 3위가 눈앞에 드글드글 모여있는데?!”
누가 1위지?
나도 잠이 부족하긴 한가보다, 이 와중에 그게 궁금한 걸 보면.
“누가 1윈데?”
대신 서지준이 물었다. 꼰 다리를 느긋하게 까딱거리면서.
손채영이 코웃음을 친다.
“왜, 1위였으면 좋겠니?”
“네가 꼴 보기 싫은 순위면 당연히 1위인 게 좋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신랄하게 비아냥거리기 시작한다. 둘이 사이가 안 좋다고 듣긴 했지. 뭐, 손채영이랑 사이좋은 사람이 심경택 선생 말고 누가 있겠느냐마는.
둘이 물고 뜯고 싸우는데 이봉준 실장은 말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조 실장 혼자만 안절부절못하며 말리는 게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나는 모처럼 강 건너 불구경이라, 이송하랑 같이 팝콘 대신 젤리를 씹으면서 관람 중이고.
“채영아, 채영아, 본방, 드라마 본방 시작했어.”
“뭐? 언제?”
마침내 조 실장이 손채영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지금이 10시 15분이니까,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5회가 시작한 지 15분쯤 지났다.
그동안 신나게 서지준이랑 물고 뜯은 건 기억도 안 나는지, 손채영이 왜 이렇게 늦게 알려줬느냐며 투덜거린다.
그리고는 맞은 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핸드폰으로 본방 틀어줘.”
“어, 잠깐만.”
조 실장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만진다.
그사이 손채영은 턱을 올리고 우리 쪽을 돌아본다.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익숙한 표정인데. 아. 네쌍둥이들이 뭔가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낼 때마다 짓던 표정이다.
젠장, 하필 손채영을 보고 쌍둥이들이 떠오르다니.
“내 드라마 시청률 추이는 봤나 모르겠네?”
손채영이 툭 던지듯이 물었다.
“안 봤어.”
“안 봤어요.”
“내가 그걸 왜 봐. 내 작품 체크하기도 바쁜데.”
“저도요.”
서지준과 이송하가 번갈아가며 대답했다.
“누가 니들한테 물었어? 나도 니들 드라마 시청률 안 봤어!”
코웃음을 친 손채영이 다시 묻는다.
“그쪽은 봤어요?”
나한테.
저 여자는 왜 저번부터 날 붙잡고 저러는 거지. 왠지, 아까 말했던 꼴 보기 싫은 사람 1위도 내 자리일 것 같은데. 이쪽도 마찬가지다.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의 시청률은 매번 체크하고 있지만, 아닌 척 고개를 저었다. 조 실장이 순순히 봤다고 대답하라고 입을 벙끗거리는데 나는 못 봤다, 못 본 거야.
“저도 못 봤는데요.”
“그래요?”
지난번처럼 소리를 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하다.
오히려 손채영은 느긋하게 팔짱까지 끼고 웃었다.
“하긴, 안보는 게 정신건강에는 좋겠네. 격차가 그렇게 큰데 봐 봤자 기분만 상하지. 4회 만에 수도권 15프로 넘었으니까, 이 흐름으로 가면 무조건 20프로 찍을 거예요. 고양인지 쥐새낀지 그거랑은 지금도 5프로가 넘게 차이가 나는데 앞으로는 뻔하지.”
그러면서 케이블 시청률 10프로면 공중파로 따지면 몇 배를 해야 한다는 건 옛날 얘기다. 요즘 케이블 안 달린 TV가 어딨느냐. 지금은 동급으로 봐야 한다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한참 떠든다.
아니, 그런데 고양이 수호령 시청률 모른다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더니, 아차 싶었는지 손채영이 홱 조 실장을 쳐다본다.
“오빠, 뭐해? 안 줄 거야?!”
“아니, 저, 채영아. 이건 일단 브릿지 촬영하고 들어가서 보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조 실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수정된 부분 급하게 찍느라 현장에서 제대로 모니터링도 못 했단 말이야. 확인해야 돼.”
“어, 그런데 이번 편은 끝나고 한꺼번에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왜! 뭐 문제 있어? 내 씬 잘렸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시청자 반응이 좀…….”
조 실장의 얼굴은 공포영화라도 본 것처럼 허옇다. 어떻게든 손채영한테 핸드폰을 안 보여주려는 것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까지 친다.
아. 강렬한 직감이 든다.
드디어.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드디어 발을 삐끗했구나.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9)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