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8) >
“잠깐 줘봐.”
핸드폰을 받자마자 짧은 기사를 읽어내렸다.
걸그룹 넵튠이 넥스트 K스타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먼 리와 손을 잡았다는 내용, 아직 세부적인 일정은 나오지 않았으며 실력파 걸그룹이라는 평판을 쌓아가고 있는 넵튠과 스타 작곡가 사이먼 리가 어떤 곡으로 컴백할 지 기대된다는 내용이 줄줄 쓰여있다.
정보의 출처는 ‘복수의 가요계 관계자’다.
어떤 자식들인지 눈앞에 있으면 입을 쭉 찢어놨을 텐데.
곧장 김현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사이먼 리랑 기사 난 거 보셨어요?”
-좀 전에 봤어. 관계잔지 나발인지. 아예 확정적으로 나불거린 거 보면 내부 관계자는 아닌 것 같고, 건영이 말론 넥스트 K스타 녹화장에서 사이먼 리랑 얘기하는 걸 누가 들었을 수도 있다더라고.
문득 낮의 일이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던 배신자의 눈빛도.
한순간, 복수의 관계자에 배신자가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스쳤다. 사이먼 리의 곡이 타이틀 곡으로 확정되길 바랄 테니까. 이렇게 언론에서 먼저 터져버리면, 회사 쪽에서는 당연히 사이먼 리의 입장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고.
-영훈이 형 말로는, 내일 A&R팀이랑 내부 스텝회의 하고 최대한 빨리 확정 짓게 될 것 같단다. 정정보도니 뭐니 시간 끌었다간 괜히 적극적으로 나오는 사이먼 리랑 분위기만 이상해질 테니까.
그럼 사이먼 리의 곡이 타이틀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다.
“이 일이 더블 타이틀 전략에 영향을 미칠까요?”
귀를 기울이며, 눈으로는 백미러를 바라봤다.
거울 속에서 이태희와 눈이 마주쳤다. 초조함 때문에 표정이 경직된 나와는 달리, 차분한 눈빛이다.
-영훈이형한테 니가 태희 자작곡을 더블 타이틀로 열렬히 밀어붙이더라는 얘긴 해놨어. 너야 고양이 수호령 밀어붙여서 좋은 결과를 낸 전적도 있고 하니까. 어쨌든 오래 안 걸릴 테니까 기다려봐.
전화를 끊자마자 임서영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오빠, 우리 더블 타이틀로 갈 수도 있어요? 태희 언니가 만든 곡 말하는 거 맞죠?”
“확실한 건 아냐. 결정 나면 알려줄게.”
그렇게만 말해두고, 숙소로 차를 몰았다.
임서영과 엘제이가 앞다투어 내리고,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계속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이송하도 인사를 하고 내렸다.
이제 남은 건 이태희뿐이었다.
“언니, 뭐해. 안 내려?”
“먼저 올라가. 난 잠깐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
이태희가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애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이 느린 이송하를 다른 두 명이 질질 끌고 사라진 후에야 이태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죄송해요. 쉬시는데 갑자기 일을 만들어서.”
“응? 아냐, 너야말로 놀랐을 텐데.”
기사 터진 거에 신경 쓰느라 아까 일은 아예 잊어먹고 있었는데.
“좀 더 주의했어야 하는데, 저도 깜빡 그 분위기에 젖었었나 봐요. 길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우릴 알아보고 다가온 것도, 넵튠이라고 제대로 불러준 것도 처음이라서요.”
되새기는 듯, 이태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나를 쳐다본 이태희가 계속 말했다.
“넵튠이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불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다음 앨범이 잘돼야죠. 전 다른 욕심은 없어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절 위해서 더블 타이틀로 밀어붙이시는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뭐?”
“현조 오빠 목소리 다 들렸어요.”
돌아보자, 은은한 불빛 아래서 이태희가 미소를 짓고 있다.
“저는 제가 만든 곡이 앨범에 실리기만 해도 충분히 뿌듯할 테니까. 타이틀 못됐다고 실망해서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거나 알콜중독자가 되거나 그럴 일 없어요.”
잔잔한 목소리로 농담을 섞어 말한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대꾸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나한텐 그 곡이 사이먼 리 곡보다 좋았다니까.”
“……지난번엔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린 줄 알았는데.”
얇은 눈매가 살짝 접힌다.
“감사해요. 그렇게 들어주셔서.”
할 수만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내가 본 미래에서는, 이태희가 만든 그 곡이 넵튠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고.
만약 내가 현재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래서 배신자가 사이먼 리의 곡을 들고 오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그 미래를 마주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속에서 다짐이 굳어졌다.
어긋난 길을 어떻게든 바로잡아야겠다는 다짐이.
해가 밝자마자 전투적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3팀장이 회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달라붙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스텝들 앞에서 떠들어 봤자 성과 없이 미친놈 소리나 배 터지게 얻어먹을 것 같고. 일단은 3팀장을 확실하게 설득하는 게 최선이겠다 싶어서.
고양이 수호령 건도 있고. 3팀장이 내 감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내 말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팀장님, 제 생각에는 역시 태희 자작곡은 지금 공개하는 게 적기일 것 같은데요. 자작곡을 더블 타이틀로 밀면 사이먼 리랑 예능에 나갔을 때 싱어송라이터, 아티스트다운 이미지를 더 받쳐줄 수 있을거구요. 실력파 걸그룹 이미지에 아예 쐐기를…….”
밤사이 생각했던 것들을 모조리 꺼내서 투척했다. 한참 동안 질린 표정으로 듣고 있던 3팀장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끙, 하는 소리를 낸다.
“거참, 그 곡에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네. 저도 그렇지만 다른 애들도 호평이었어요. 특히 송하가 그 노래가 꼭 넵튠 노래 같다고,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애들하고 이송하 이름까지 팔았다.
3팀장이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난 턱을 긁적인다.
“알았어, 알았어. 지난번엔 고양이 수호령에 꽂히더니 이번엔 태희 자작곡에 꽂혔구만. 안 그래도 그때 일 때문에 니 말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긴 한단 말이야.”
“정말, 승산 있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더블 타이틀 쪽으로 최대한 밀어볼게. 그런데 다른 스텝들 의견이 다르면, 나도 별수 없다.”
회의실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닫힌 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궁리했다. 만약 회의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별의별 미친 생각이 다 떠오른다.
진짜 박수무당 흉내라도 내볼까. 내 감으로는 이태희의 자작곡이 대박 날 것 같다고 떠들어볼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정말 진지하게. 내 소문이 얼마나 퍼져있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스텝 중에서도 3팀장처럼 내 말을 무시하는 걸 찜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매니저라는, 지금의 내 위치가 참 무력하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모든 걸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럼 이렇게 애를 태울 일도 없었을 텐데.
끝없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도 태희 자작곡 때문에 고민 중인가보네.”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배신자가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배신자의 느긋한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바닥에 들러붙는다. 어째 어제보다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제 기사까지 터져준 덕분에 사이먼 리의 곡은 확실하게 타이틀로 자리 잡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뇌리에 떠올랐다.
배신자가 이태희의 자작곡을 밀어붙여서 성공시킨 그 미래.
그 미래에서는 이태희의 자작곡이 더블 타이틀로 결정됐던 걸까.
배신자가 계속 말했다.
“난 니가 굳이 더블 타이틀을 미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
“곡이 좋잖아. 요즘은 곡만 좋으면 더블 타이틀, 트리플 타이틀까지 내는 가수들도 많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배신자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 난 확실한 거 하나를 제대로 미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거기에 총력을 기울여야지, 괜히 모험적인 시도를 했다가 잘못되면 이도 저도 안 될 수도 있잖아.”
“확실한 거?”
“내 생각엔 사이먼 리의 곡이 넵튠의 첫 번째 히트곡이 될 것 같거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내 감이 맞을 것 같은데.”
배신자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한순간 저 얼굴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스텝들이 웅성거리며 쏟아져나온다. 벌떡 일어나서 3팀장에게로 다가갔다. 뒷목을 긁적거리고 있던 3팀장이 날 보더니 혀를 찬다.
젠장. 잘 안됐구나.
“태희 자작곡이 괜찮다는 건 다들 동의했어.”
3팀장이 내 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사이먼 리와 작업 중이라는 기사가 먼저 터지기도 했고, 화제가 될 곡이 있는데 굳이 더블 타이틀 전략을 내세워서 대중의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을까 하더라고. 그래서 태희 자작곡은 다음 앨범에 넣는 걸로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어. 어쩔 수 없게 됐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길이 없다.
이제 미친 짓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싶었을 때였다.
3팀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표님이 더블 타이틀로 가라고 하시면 또 모를까.”
“대표님이요?”
고개를 홱 들고 묻자, 3팀장이 입맛을 다시며 끄덕였다.
“좀 전에 대표님 도착하셨다니까, 가서 말씀드리고 대표님까지 결정 내리시면 확정되는 건데. 아마 그렇게 될 거야. 블랙아웃 앨범도 그렇고, 넵튠 지난 앨범들도 대부분 스텝들 의견에 맡기셨었으니까.”
순간 백한성 대표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리고 그가, 나한테 직접 전화를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뜬금없이 고양이 수호령이 중국에서 반응이 괜찮을지를 물어봤었지. 그전에도 날 보고 운 좋은 사람은 곁에 둬야 한다고 말했었고.
어쩌면. 어쩌면 넵튠의 다음 앨범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나를 보면, 이번에도 내 의견을 물어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고양이 수호령이 성공하고 나면 바라는 걸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도 떠오른다. 손채영과 심경택 선생에게 이를 득득 갈고 있던 때라, 손채영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 중요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팀장님. 대표실에 가실 때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너 설마 대표님한테…….”
3팀장이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훑어내리더니, 내 등을 철썩 때린다.
“큰일 낼 놈이네, 이거. 대표실 몇 번 들어가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대표님이 니 친구야? 안돼, 임마!”
“입 딱 다물고 그냥 팀장님 뒤에 서 있기만 할게요.”
“안 된다니까!”
씨알도 안 먹혔다.
3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자 6층으로 사라졌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내가 3팀장이었더라도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미친 짓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현재를 내가 아는 미래로 연결할 수만 있다면.
한참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저장해놨던 전화번호를 찾았다.
딱 한 번 걸려왔던 번호. 백한성 대표의 개인번호를.
*
백한성 대표는 묘한 눈길로 책상 위에 놓인 시놉시스를 바라봤다.
고양이 수호령의 초기 시놉시스였다.
“이게 성공할 드라마로 보여?”
물음에, 소파에서 홍차를 마시던 본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만 봐서는 그저 그런 신생 프로덕션 작품이죠, 뭐. 대본이랑 캐릭터가 괜찮지 않았으면 지준이한테 하라고 권하지도 않았을 텐데요. 그리고 솔직히, 대본 보고 나서도 목표 시청률은 5프로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대체 뭘 봤을까?”
백한성 대표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3팀장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방금 넵튠 다음 앨범 타이틀 곡 스텝회의 끝났습니다.”
“음, 그래.”
“사이먼 리가 만든 곡이랑 이태희 자작곡을 놓고 어떤 전략으로 갈지 말이 많았는데, 이번엔 사이먼 리의 곡을 타이틀 곡으로 가지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정선우는 어느 쪽을 골랐어?”
백한성 대표가 불쑥 물었다.
3팀장이 눈을 껌뻑였다.
“……네?”
손끝으로 책상을 몇 번 두드리고, 백한성 대표가 다시 물었다.
“정선우 말이야. 난 걔가 뭘 선택했는지가 궁금한데.”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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