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5) >
본부장이 반쯤 벗겨진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고양이 수호령의 대본이 놓여있다.
“이 작품, 복댕이가 가져온 거라고 했지?”
“네. 작품 좋다는 얘길 어디서 들었는지, 지가 알아서 물어왔더라구요.”
3팀장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거참, 복덩이랑 복댕이를 왔다 갔다 하는 놈일세.”
“일하는 거 보면 신통방통한 데가 있다니까요?”
얼굴이 확 피어있는 3팀장과 반대로,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는 2팀장은 이맛살을 깊게 찌푸렸다. 복댕이라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그는 치솟는 울화를 다스리려는 듯 심호흡까지 했다.
“그건 그렇고. 대표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 특히 서지준이 눈빛으로 본부장의 말을 재촉했다.
“계약 진행하자고 하시네.”
서지준과 그의 매니저 이봉준이 테이블 아래로 손바닥을 부딪쳤다.
2팀장은 납득 못하겠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한숨만 내쉬었다. 배우 본인이 원하는 데다가 백한성 대표의 결정까지 떨어졌으니 그가 더 반대한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시청률은 일단 5프로 이상을 목표로 잡자. 뭐, 거기 못 미쳐도 지준이 필모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너 연기 스펙트럼이 좁다는 얘기 자주 듣잖아. 그래서 들어오는 배역도 비슷비슷하고.”
“맞아요, 맨날 무게 잡는 역할 지겨워 죽겠어요.”
“이거 하고 나면 앞으론 너한테 들어오는 배역도 다양해 질 거야.”
“그건 잘 풀렸을 때 얘기고, 잘못하면 애써서 고급스럽게 다져놓은 이미지만 확 깰 수도 있어요. 게다가 신인 작가라 중간에 캐릭터가 산이라도 타면······.”
2팀장이 불만 반 걱정 반으로 중얼거렸을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부술 듯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두 눈에서 불똥이 탁탁 튀고 있는 손채영이었다. 그녀는 본부장과 팀장들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곧장 서지준에게 다가갔다.
“너 1월에 케이블 드라마 들어간다는 거 진짜야? 로코물로?”
“소식도 빨라. 어디서 들었냐?”
서지준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대답했다.
“진짜라고? 너 나 엿먹이려고 그래? 나도 그때 드라마 하는 거 몰라?”
“무슨 상관이야. 같은 요일 동시간대 편성도 아닌데.”
“상관이 왜 없어! 너랑 나랑 동시에, 그것도 장르까지 비슷한 드라마로 나오면 회사 홍보전략이 분산될 거 아냐! 초반에 화제 몰이 하려면 한쪽에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한데!”
“이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우리 회사에 배우가 너 하나냐?”
“겨울 드라마 할 거였으면 차라리 나랑 같은 작품에 들어가지!”
“너랑 로코를 찍느니 군대 가겠다.”
두 배우가 으르렁거리자, 손채영의 매니저인 조실장이 뜯어말렸다.
“채영아 본부장님이랑 다 계시는데 그쯤하고 앉자, 어? 앉아서 얘기해.”
씩씩거리던 손채영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상석에 앉은 본부장은 부드러운 밀크티를 즐기며 두 사람의 언쟁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저 정도야 귀엽다는 듯 실실 웃기까지 하면서.
“본부장님, 저 심각해요!”
손채영의 항의에 본부장이 어이쿠, 하며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 다 회사에서 있는 힘껏 밀어줄 테니까 걱정 마. 아니지, 셋이지.”
그가 3팀장을 돌아봤다.
“송하도 확정된 거 맞지?”
“네, 송하도 합류하기로 했어요. 안 그래도 들어오기 전에 판 프로덕션 대표랑 통화 한 번 했는데, 애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고 아주 극찬을 하더라구요.”
“그래? 오디션보고 하루 만에 바로 연락 온 걸 보면 정말 좋게 봤나 본데.”
“누구요?”
손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합류한다구요?”
“넵튠에 이송하라고, 원래 연기시켜보려다가 한 번 접었던 애야.”
3팀장이 손채영을 힐끔 보고는 말을 꺼냈다.
“그 심경택 선생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니까요. 연기 잘만 하는 애한테 막말을 늘어놔서······ 복댕이가 눈치채서 송하 설득하고, 드라마 물어오고 하면서 다들 알게 된 거지, 아니었으면 애 재능을 묻어버릴 뻔했어요.”
“쯧, 앞으론 그 양반한테 애들 맡기면 안 되겠네. 니가 계속 한번 쑤셔봐.”
듣고 있던 손채영이 조금 전과는 달리 잠잠해진 말투로 끼어들었다.
“왜 심선생님 탓만 하세요? 걔가 선생님 앞에서는 못했을 수도 있죠.”
“그랬다고 해도 애한테 트라우마가 생길 만큼 다그치면 쓰나.”
“선생님은 걔 생각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안되는 연기 계속 하다가 인생 망치는 사람을 어디 한두 명 보셨겠어요? 접어야 할 수준이라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일찌감치 접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겠죠.”
손채영이 계속 레슨 선생의 편을 들자 3팀장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그리고 반대편, 2팀장 역시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가 파한 후 2팀장이 돌아가는 손채영을 붙잡았다.
주위를 살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영아, 너 혹시 심선생님한테 이송하······.”
“아니에요.”
손채영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설핏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저 이제 안 그래요. 예전엔 일이 잘 안 풀리니까 너무 불안해서, 딱 한번 실수했던 거예요. 팀장님은 아시잖아요. 저 그때 수면제 없으면 잠도 못 잤던 거.”
“알지, 그럼. 그래서 덮고 넘어간 거고. 그런데 지금은······.”
“정말 아니에요. 그게 언젯적 일인데요.”
“정말이지?”
“맹세해요. 저 이송한지 누군지 걔 얼굴 본 적도 없어요.”
손채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로소 2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냥 노파심에 물어본 거야.”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손채영이 팔짱을 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케이블 드라마 물어왔다는 게 혹시 저번에 그 사람이에요? 키 크고, 정떨어지게 생긴 넵튠 매니저?”
“맞아. 그놈.”
2팀장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때문에 지준이한테까지 대본이 들어가서··· 어휴. 회사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왜 이렇게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나 모르겠다.”
“제 눈에도 거슬리기 시작하네요.”
“넌 드라마 준비하느라 힘든데 괜한데 신경 쓰지 마. 안 그래도 그놈은 내가 벼르는 중이니까.”
손채영의 불그스름한 입술이 비틀렸다.
“내 작품에 초 치고 가더니 기껏 케이블 드라마, 신인 작가 작품에······ 나 참, 안목 하고는. 그 드라마, 시청률 몇 프로나 나올지 궁금하네요.”
*
툭.
캐스팅 확정 소식을 전해주자 이송하는 먹던 아이스크림을 놓쳤다. 쟤가 먹을 걸 떨어뜨릴 정도면 정말 많이 놀란 거다. 다시 주워 먹을까 봐 아이스크림을 휴지통에 버리고 돌아보자 이송하는 여전히 멍하니 서 있다.
그 대신 다른 애들이 난리다.
“진짜요?! 어제 오디션 봤는데? 원래 이렇게 일찍 결과가 나와요?”
“프로덕션 쪽이랑 작감 두 분도 마음에 들어 하셔서 빨리 확정된 거 같아.”
“웬일이야!”
잔뜩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던 임서영이 이송하의 등과 어깨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이송하! 너 드라마 캐스팅됐대! 오빠, 얘 그럼 여배우 되는 거예요?!”
“그렇지?”
“이게 웬일이야! 단역도 아니고 조연급이잖아! 대본 훔쳐보니까 대사도 많던데, 너 그럼 방송 분량도 엄청 많겠다! PPL 협찬도 막 들어오고 그러는 거 아냐?”
“적당히 해, 멍청아. 누가 보면 드라마는 니가 찍는 줄 알겠다.”
버릇처럼 핀잔을 먹인 엘제이가 이송하의 옆구리를 툭 친다.
“이송하, 축하한다. 근데 붙을 것 같았어.”
이태희도 이송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됐네, 송하. 거기선 넵튠 이송하가 아니라 그냥 신인배우 이송하니까 부담 갖지 말고 도전해 봐.”
애들뿐만이 아니라 김현조와 3팀장도 차례로 이송하에게 전화통화로 축하의 말을 전달했다. 이송하는 그 후에야 좀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묻는다.
“······진짜 된 거예요?”
나는 피식 웃으며 이송하에게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왜 그렇게 놀라? 어제 오디션 보고 나서 거의 확정이라는 소리 들었잖아.”
“그래도 이렇게······ 이렇게 쉽게 될지 몰랐어요.”
“쉽기는. 기본적으로 니가 연기를 잘하기도 했지만, 오디션 보려고 대본분석도 열심히 하고, 인터넷으로 고양이 동영상 찾아보면서 연습도 엄청 했잖아. 노력한 만큼 돌아온 거지.”
“그래도 지금까지는······.”
이송하가 중얼거리다가 입을 닫는다.
하긴, 지금까지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았을 테니까.
애가 멘탈이 약하거나 쉽게 주눅이 드는 성격이 아닌 건 분명한데, 그동안 못한다, 안된다, 뒤떨어진다는 얘기들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다.
앞으로는 못한다는 이야기보다 잘한다는 이야기를,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보다 재능 넘친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될 테니까.
“내가 말했지? 드라마 하나 하고 나면 ‘이송하의 재발견’ 소리 듣게 될 거라고. 어디 두고 봐.”
눈이 두어 번 깜빡인 후, 입술이 거짓말처럼 환한 미소를 그린다.
“감사합니다. 오빠 덕분이에요.”
“어······.”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오랜만, 아니, 본 적이 있던가?
내 머릿속이 잠깐 멈춰있는데 이송하의 뒤에서 엘제이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러게.”
엘제이는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연말에 큰 복이 있다는 게 진짠가? 뱀이 복을 물고 온다더니만.”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더니 양손을 짝 붙이고 둥글게 비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너 지금 뭐 하는 건데?”
“혹시 모르니까 소원 빌려구요. 로또 당첨되게 해 달라고.”
“저! 저는 야외 버라이어티 고정하고 싶어요!”
임서영이 재빨리 엘제이 옆으로 달려와서 합장한다.
“이송하! 태희 언니! 얼른 복뱀 오빠한테 하나씩 빌어!”
복뱀······.
내가 충격에서 벗어나는 사이 이송하와 이태희가 하나씩 대답한다.
“난 내년에는 계속 바빴으면 좋겠어.”
“으음······ 그럼 난 넵튠 단독 콘서트.”
“단독 받고, 이왕 하는 거 월드 콘서트도.”
엘제이가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임서영이 손을 번쩍 든다.
“그 전에 음악 방송 1위도!”
나는 임서영의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오케이. 그 소원으로 접수.”
“아싸, 내 거 접수!”
임서영이 거실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면서 좋아한다. 이송하 캐스팅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애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돌렸는데, 엘제이가 날 한심한 놈 보듯 쳐다보고 있다.
“왜?”
“전 그냥 장난으로 시작한 건데.”
“난 진심인데.”
“하여튼 오빠도 참 희한할 때 많아요.”
엘제이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온 거실을 누비던 임서영이 갑자기 우뚝 선다. 그리고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넥스트 K스타도 하고, 드라마도 찍고······ 내년에는 우리, 뭔가 엄청나게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며칠 후, TVL의 1월 신작 고양이 수호령에 서지준이 캐스팅됐다는 기사가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
지금까지 차가운 엘리트 역할만 해왔던 서지준이 달달한 로맨틱코미디를 찍는다는 사실이 화제가 돼서 드라마 제목이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라갔고, 홍보 효과를 톡톡히 거뒀다.
서지준의 합류를 시작으로 여주인공과 다른 조연, 단역들의 캐스팅도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이송하의 캐스팅 사실은 크게 홍보하지 않았다. 서지준이랑 같은 소속사라 덕을 본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선만 많아질 게 분명했으니까, 넥스트 K스타의 반응을 보고 홍보의 방향과 규모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하루하루 숨 돌릴 틈도 없이 흘러갔다.
넥스트 K스타의 녹화가 몇 번 더 이루어졌고, 다행히 애들이 지치지 않는 폭주기관차처럼 열심히 해준 덕분에 녹화 때만큼은 계속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는 편집본을 봐야 아는 거라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이송하는 안 그래도 부족한 밤잠을 더 줄였다. 팀원들과의 미션 연습, 개인 보충 연습을 끝내고 드라마 대본 분석과 리딩에 매달렸다. 새로 레슨 선생도 구했는데, 리딩을 할 때는 늘 나와 함께였다.
이송하가 지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일 뿐이었다. 이송하는 나날이 연기에 빠져들었고, 그럴수록 물을 듬뿍 마신 새싹처럼 더욱 싱그러워졌다.
11월 중순.
사람들은 얇은 자켓을 집어넣고 두툼한 패딩을 꺼냈다. 길거리 가판에는 목도리와 털모자가 깔렸고, 앙상해진 가로수 가지 틈으로 살을 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고양이 수호령의 첫 대본리딩이 며칠 뒤로 다가왔으며······.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11월 20일. 밤 10시.
넥스트 K스타 첫방까지, 이제 1시간 남았다.
<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5)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