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43화 (43/218)

<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4) >

김판석 대표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혹시 정장 스타일로 입고 온 거, 정해원 역에 맞춰서 준비한 거예요?”

“네. 정해원은 늘 커리어우먼처럼 입고 다닌다고 나와 있어서요.”

이송하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포멀한 블라우스에 코트, 늘씬한 다리가 돋보이는 팬츠 차림이었다. 발목 길이의 부츠는 뒷굽이 아찔하게 높다.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는 자기 관리에 엄격한 성격임을 짐작하게 했다.

“준비성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꾸미고 와서 그런지 정해원의 이미지와 흡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스무 살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송하를 쭉 훑어본 김판석 대표가 양옆의 두 사람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둘은 좀 어때?”

“대표님, 저분 대본 좀 보세요.”

홍주미 작가가 속삭였다.

이송하가 들고 있는 대본에 시선이 모였다. 두툼한 A4용지 뭉치는 여러 번 손을 탄 흔적이 역력했고, 캐릭터 분석도 열심히 했는지 정해원의 대사 옆에 빼곡하게 필기한 흔적이 있다.

악필이라 무슨 글씨인지는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준비를 꽤 한 모양인데?”

“자세는 좋네요.”

신태균 감독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송하의 적극적인 자세 때문에 세 사람의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가볍게 오디션을 본 후에 왜 정해원 역은 안 되는지를 알려주고 조언해주는 정도로 끝내려던 것이 아까까지의 마음가짐이었다면, 지금은 제대로 연기를 지켜볼 준비 정도는 되었다.

김판석 대표가 대본을 펼치며 말했다.

“내가 씬을 짚어줄 테니까, 그 부분을 한번 연기해 봐요.”

“네.”

“자, 1부 36페이지. 51씬. 이거부터 해봅시다. 상대역 대사를 쳐줘야 연기하기 편할 테니까…… 신감독이 할래? 아니면 내가 할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해도 될까요?”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김판석 대표가 시선을 돌렸다. 이송하의 옆자리, 이름을 정선우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어느새 본인의 대본을 꺼내 들고 있었다.

“연습할 때도 제가 상대역을 했으니까, 송하도 더 편할 것 같아서요.”

확실히 이송하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풀어져 있다. 안심이라도 한 것처럼.

김판석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정…… 어, 실장님인가요?”

“매니접니다.”

“그럼 매니저분이 읽는 걸로 하고 가 봅시다.”

사인이 떨어지자 매니저가 제삼자의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김판석 대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딩이 능숙하고 매끄럽다. 한두 번 읽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가 매니저라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통 매니저라고 하면 로드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실장이든 팀장이든 부장이든, 직함만 다를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다 매니저니까.

겉보기만 동안이고 혹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가?

의구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이송하의 연기가 시작됐다.

“다른 사람이 열심히 사는 만큼, 나도 죽도록 열심히 살았어.”

김판석 대표가 고개를 휙 들었다.

이송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 같은 것들 때문에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나만.”

발성이야 가수 출신이니 기본은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다. 호흡도 좋고, 딕션도 나무랄 데가 없이 한 마디 한 마디 귀에 꽂힌다. 목소리 톤도 아주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연기 톤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 신인 특유의 과장도, 나쁜 버릇도 없이 아주 매끄럽다. 호흡이나 발성 따위를 일일이 의식하면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거, 생각보다 아주 제대론데?

김판석 대표가 내심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이송하의 연기가 이어질수록 김판석 대표의 눈도 점점 커다래졌다. 한참이 지난 후, 그는 혀를 내두르며 생각했다. 저건 제대로인 정도가 아니었다.

W&U에서 괴물을 하나 키워놨구나.

대체 몇 살 때부터 레슨을 시켰길래 저 나이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연기가 나오는 거야?

이송하의 연기는 사무실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좁은 공간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다. 이송하의 목소리 빼고는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 정도로 모두가 눈앞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다.

김판석 대표는 힐끔 이송하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능숙하게 상대 멘트를 쳐주고 있는 매니저. 그는 본인의 대사가 없을 때는 연기하는 이송하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지금 이 현장의 분위기가 몹시 기껍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어쩐지 오디션을 목적으로 온 것치고는 과하게 여유로운 느낌이다 했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김판석 대표가 옆자리를 돌아봤다. 홍주미 작가는 뚫어져라 이송하만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표정에는 창작자의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어때, 홍작가?”

“…….”

“홍작가, 홍작가! 어떠냐니까?”

속삭임을 뒤늦게 들은 홍주미 작가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 네?”

“아니야. 계속 봐.”

물어보지 않아도 답을 들은 것 같다. 홍주미 작가의 어깨를 두드린 김판석 대표가 이번에는 왼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빈 의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신태균 감독은 이송하의 정면과 측면에 설치해놓은 테스트용 카메라 앞에 서서 모니터에 고개를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애초부터 이번 오디션이 탐탁지 않았다. 이송하의 외모에는 감탄했으나 그것뿐이다.

그는 배우의 비주얼보다는 내면적인 것을 더 중요시했다. 뛰어난 비주얼로 잠깐 시선을 붙들 수는 있겠지만, 정말 좋은 배우라면 보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확 몰입하게 하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저 걸그룹 멤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신태균 감독은 모니터에 담긴 이송하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고 의욕 없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욕심이 차올랐다. 이런 좁은 공간과 테스트용 카메라 따위가 아니라, 완벽한 세트장에서 제대로 된 촬영 장비까지 갖추고 찍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이윽고 김판석 대표가 마지막 씬 넘버를 불렀다.

“2부 48페이지 79씬.”

가장 까다로운 씬이었다. 정해원에게 고양이 귀신이 쓰이는 장면.

정해원 역을 연기력이 좋은 배우로 캐스팅하려 했던 이유 중 하나다. 저걸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임팩트 있는 장면으로 남느냐, 아니면 시공간을 오그라들게 하는 장면으로 두고두고 대중의 비웃음거리가 되느냐가 갈리니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있던 이송하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앉은 상태로 미동도, 소리도 없이 눈동자만 천천히 움직였다. 기묘한 긴장감이 실내를 팽팽하게 조여왔다. 곧 주위의 모든 것을 파악한 듯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시선을 돌린다. 손을 올려 다섯 개의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보기도 하고, 발에 힘을 주었다 뺐다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살짝 비틀거리는 한 걸음. 자세를 추스르는 두 번째 걸음.

세 번째부터는 완벽하게 균형을 잡았다.

등줄기를 꼿꼿하게 펴고 선 그녀가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본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잠깐, 잠깐만.”

김판석 대표가 정적을 깼다. 그는 대뜸 반말로 질문했다.

“왜 그렇게 웃었어?”

“네?”

뭔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송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문에는 디테일한 표정 지시는 없잖아. 그냥 고양이었을 때와 시선의 높낮이가 다르니까 바닥을 잠깐 쳐다본다고만 돼 있는데, 왜 웃었어?”

“아…….”

김판석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이송하의 입만 쳐다봤다. 그녀는 힐끔 옆자리의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매니저가 걱정하지 말고 대답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비로소 침착하게 입을 연다.

“이 고양이는 보은하겠다면서 여주인공을 도와주고 있지만, 원주인에게 버림받은 경험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간을 싫어하잖아요. 자존심도 굉장히 센 편이고. 제가 이 고양이라면 인간에게 쓰인 다음 처음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았어요.”

이송하가 다시 고개를 아래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시선…… 생각보다 낮구나.”

그 순간 김판석 대표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오늘의 오디션이, 고양이 수호령이라는 작품에 신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상을 뒤집은 오디션이 마무리되고, 김판석 대표는 이송하와 매니저를 커피 한잔 하고 가라는 말로 붙잡았다. 홍주미 작가와 신태균 감독은 대본 작업을 하겠다며 급히 작업실로 사라졌고, 판 프로덕션 대표와 피디 셋만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피디들은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송하를 힐끔거렸다. 방금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끝냈기 때문인지,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덕분에 사람처럼 안 보이던 외모가 조금은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고생했어, 송하야. 과자 먹어.”

“감사합니다.”

매니저가 간식으로 내놓은 과자를 건넨다. 이송하가 과자를 우물거리며 살짝 웃었다. 새삼 이송하의 나이를 떠올린 김판석 대표가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정해원 역으로 오디션 안 봤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이렇게 연기력이 좋은 배운 줄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우리도 내부회의를 하긴 해야겠지만 다들 긍정적으로 본 거 같으니까 거의 확정이라고 생각해주면 될 것 같고. 오늘내일 중으로 바로 연락할게요.”

이송하와 매니저가 서로 눈을 마주친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두어 번은 오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곧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손을 내저은 김판석 대표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왜 우리 작품이었어요? W&U 정도면 국내에서 제작하는 작품 시놉시스는 어지간하면 다 들어갈 거고, 이송하씨 연기력에 비주얼이면, 인지도가 없어도 충분히 공중파 작품에서 좋은 배역 따낼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제작 피디 박수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요. PBS 월화 편성된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W&U 소속인 손채영씨가 주연하는 작품이니까 거기 들어갈 수도 있었을 거고.”

커피를 마시던 매니저가 멈칫했다. 박수경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인어공주랑 우리랑 판타지가 가미된 로맨틱 코미디 장르라는 것도 똑같고, 그쪽은 월화, 우리는 금토긴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잖아요. 왜 굳이 우리 작품을 골랐는지…….”

답을 찾는 시선이 모이자, 이송하가 스윽 매니저를 바라본다.

매니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엄지로 입술을 살짝 쓸며 말했다.

“그 드라마보다 이 작품이 더 잘될 것 같았거든요.”

너무 당연하다는 투였기 때문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던 판 프로덕션 쪽 사람들이 멈칫했다. 그리고 전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저기,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한데요…….”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이 좋은 작품 찾는 건데요.”

“잘못 찾으신 걸 수도…….”

박수경이 반대쪽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신 같은 청력으로 주워들은 김판석 대표가 눈을 부라렸다.

“뭘 벌써부터 지고 들어가? 우리가 그쪽보다 더 나을 수도 있잖아!”

“대표님, 저희 드라마가 공전의 대히트를 치더라도 그건 좀…… 그쪽은 공중파에 겨울 시즌 최고 기대작 중 하난데요. 원작 팬들 화력도 어마어마할 거고. 업계 사람들은 그 작품 시청률 20프로 이상 예상하고 있어요.”

“……그 정도래?”

“투자금도 어마어마하고, 첫방 전에 광고 완판될 것 같다던데요. 그리고 그쪽 대본도 대박이래요. 그냥 저희는 GTBN에서 동시간대에 붙는 작품이랑 경쟁하는 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매니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커피를 마시고 사레라도 걸렸는지 큼큼 헛기침까지 한다. 막내 피디가 티슈를 챙겨줄까 말까 고민하며 힐끔거렸을 때.

매니저의 얼굴에 도통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표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막내 피디는 잘못 봤나 하고 뒷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커피잔이 비자 이송하와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판석 대표가 매니저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확정되면 다음 달에 대본리딩하고 바로 촬영 들어갈 거예요. 스케줄 조정 좀 잘 부탁해요.”

“네. 매주 넥스트 K스타 녹화가 있는데, 그날만 스케줄 빼 주시면 나머지는 문제없습니다.”

“그건 그쪽이 먼저 잡힌 스케줄이니까 당연한 거고. 그게 Knet에서 새로 하는 예능 프로 맞죠? 아이돌들 엄청 나오는 거.”

“네. 맞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잘 돼서 이송하씨 인지도도 쑥 올라갔으면 좋겠네. 혹시 알아요? 이 바닥이야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게 드문 일도 아닌데. 대본리딩 할 때는 무명 신인이 아니라 스타가 돼서 나타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물론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공치사였다.

한주에 예능프로그램이 수십 편씩 쏟아지는데, 흥행할 거라는 보장도 없는 신규 프로그램, 그것도 케이블 예능프로에 출연한다고 인지도가 쑥 올라갈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김판석 대표의 말대로 예능프로 하나로 빵 뜨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 있었다는 스토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게 이 바닥이지만, 그런 행운을 누리는 건 어디까지나 선택받은 소수일 뿐이니까.

판 프로덕션의 피디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긍정적이고 듣기 좋은 말로 인사했다.

“저희도 본방 꼭 챙겨볼게요.”

“우리 드라마랑 넥스트 K스타 둘 다 대박 터질 겁니다.”

“이송하씨도, 넵튠도 앞으로 진짜 잘될 거예요.”

사무실을 떠나기 전, 매니저가 묘한 미소를 띠며 응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4)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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