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35화 (35/218)

< 재능이 발아하는 순간 (2) >

“왜 그 배역이 좋아?”

“불쌍하잖아요.”

맞는 말이다. 이 정해원이라는 캐릭터는 불쌍하고 가시가 많은 캐릭터다.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서 혼자 힘으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고, 좋은 대학에 붙었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

이제 세상이 그 보답을 해줘도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온 여자. 그런데 이 여자한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가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귀신이 눈에 보인다는 거다.

그걸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정해원은 귀신 그림자만 봐도 몸이 굳을 정도로 귀신을 무서워한다. 극복하기 위해 안 해본 노력이 없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결국에는 그 문제 때문에 떡하니 붙은 대기업에서도 제 발로 걸어 나왔고, 프리랜서로 시간제 통역사 일을 하다가 주인공과 만나게 된다.

“이 배역이 불쌍해서 좋다고?”

“정해원은 열심히 하는데도 안 돼서 힘들어하잖아요. 그런데 이 드라마는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라고 돼 있으니까, 드라마 마지막에는 이 사람도 행복해질 거 아니에요.”

“아아.”

“그게 보고 싶어요.”

말하면서 이송하가 시놉시스를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그럼 줄거리에 나와 있는 정해원 대사, 한 번 쳐볼래?”

던지듯이 한 말에 이송하가 흠칫한다.

내가 연기해 보라고 할 때마다 슬금슬금 도망치던 그 표정이다.

빌어먹을 트라우마. 레슨 선생 개새끼. 가만 안 둘 거다, 진짜.

“송하야, 그 레슨 선생이 너한테 무슨 말을 더 지껄였는지 모르겠지만 너 발연기 소리 들을 만큼 연기 못하는 건 절대 아냐. 내가 지금까지 본 드라마가 몇 편이고, 영화관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그러고도 발연긴지 아닌지도 못 알아볼 눈이면 일찌감치 매니저 때려치워야지.”

“아…….”

“그냥 부담 없이 한번 슥 읽기만 해봐. 여기 나밖에 없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이송하의 눈빛에서 서서히 머뭇거림이 사라지고, 모양 좋은 입술이 달싹거린다. 긴장과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재촉하지 않고 머핀 상자 뚜껑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정은 잘 알겠는데, 전 못하겠어요.”

귀를 기울여야 할 만큼 작은 목소리.

“일단 전 고양이가 정말 싫어요. 그리고 귀신은 끔찍하게 싫구요. 고양이 귀신한테 붙어서 통역을 하느니, 차라리 제 목을 조르는 게 낫겠네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조금 전까지 머핀을 먹어 치우던 이송하 대신, 이십 대 중후반의 지친 여자가 냉랭하고 가시 돋친, 하지만 허탈함과 체념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건 사실 제대로 된 연기라고 할 수도 없는데.

몇 걸음만 떨어져도 들리지도 않을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짧은 대사를 줄줄 읽고 있을 뿐인데도…… 그런데도 내 눈에는 마치 이송하가 아니라 정해원이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배우가 눈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아니면 내가…… 뛰어난 재능이 막 발아하는 순간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송하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송하야.”

“……네?”

“너 연기 잘해. 진짜 잘해. 내가 아무리 봐도 넌 춤이나 노래보다, 아, 물론 춤이나 노래를 엄청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연기 쪽으로 재능이 확 쏠린 것 같아.”

아, 또다.

흥분 때문에 제대로 필터를 거치지도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간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가 보는 눈이 더럽게, 정말 더럽게 없는 게 아닌 이상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쟤 정말 연기 잘한다고.

이송하가 진짜, 제대로 준비하고 연기를 하게 되면 어떨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될 만큼.

“……잘해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이송하가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 진짜로. 그 미친 레슨 선생 말 믿지 말고 내 말을 믿…… 기는 좀 힘들겠구나. 내가 어떻게든 다른 레슨 선생님 찾아서 증명해줄게.”

그리고 다시 시놉시스를 가리켰다.

“계속 한 번 해봐.”

아까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바로 입을 뗀다.

나도 거의 외우다시피한 텍스트가 감정을 담은 채 들려온다.

이송하는 대사를 치면서도 한번씩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나를 힐끔거렸다. 그래서 나는 입꼬리에 쥐가 날 정도로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면 안심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대사가 넘어 갈 때마다 이송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표정은 훨씬 풍부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송하가 마지막 대사를 끝냈다. 시놉시스의 줄거리에 정해원의 대사가 몇 줄 없는 게 너무 안타까울 정도다.

젠장, 빨리 대본을 받아보고 싶다.

아니 이송하를 촬영장에 밀어 넣고 싶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송하 역시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어때? ……재밌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이송하가 시놉시스를 양손으로 꼭 쥐고 고개를 끄덕인다.

“연기하는 건 처음부터 재밌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선생님이, 다른 멤버들이 제가 연기로 잘 되서 팀 인지도를 높여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을 텐데 딱하지 않으냐고. 안 될 일에 매달리는 건 팀에도 민폐니까 그 시간에 춤이랑 노래 연습을 더 하라고 하셔서…… 그만둔 거예요.”

레슨 선생, 아니, 선생이라는 말도 아깝다. 사이코 같은 놈.

“후우, 내가 그 사람 멱살 잡으러 갈 거야.”

“아서라.”

흠칫 놀라서 돌아보니 회의실 문이 2센티쯤 열려 있고 그 사이로 김현조와 3팀장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

문을 활짝 열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오전에 그 선생 찾아가서 얘기하고 왔어.”

김현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가 진짜로 심각하게 연기를 못했더라도, 선생이라는 사람이 제자한테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막말하면 안 되지. 가서 지랄했더니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결국엔 자기도 말이 심했다는 건 인정하더라고. 그 부분은 송하한테 따로 사과하기로 했어. 그리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심증은…….”

그래, 입 바른 사과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

“반응이 좀 미심쩍기는 했는데, 증거가 없어서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네.”

김현조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그냥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애가 연기를 못했다, 이래 버리니까.”

“혹시 손채영이랑 연관은…….”

“그건 예민한 문제라 뭔가 확실한 게 있지 않으면 얘길 못하지.”

3팀장이 말을 받았다.

“무턱대고 심증만으로 따질 일이 아니야. 2팀장도 들고 일어날 거고, 손채영도 난리가 날 텐데.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게 있어야지. 이대로 덮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알아볼 테니까, 그건 좀 기다려 보고.”

이럴 때 미래 예지 능력이 힌트를 주면 참 좋을 텐데…….

생각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몇 번 크게 덕을 봤더니 조금만 답답한 일이 생겨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 이러다가 중독자처럼 능력에 과하게 기대게 되면 그것도 문제다.

어쨌든 나도 내 힘으로 계속 알아봐야지.

“일단…….”

3팀장이 갑자기 장난스럽게 웃는다.

“송하는 그 레슨 선생 보란 듯이 대중한테 좋은 평가를 받아봐.”

“네?”

“내가 발연기인 게 아니라 니 눈이 개 눈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레슨 선생 할 거면 눈깔부터 갈아 끼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해서 좋은 평가 받아보라고.”

저 말은…….

“밖에서 보니까 송하 연기 괜찮던데. 겨울이랑 봄 라인업 작품 중에 괜찮은 거 있나 보고, 지금부터 오디션 알아보자.”

지금이다. 갑작스럽지만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내가 서둘러 고양이 수호령 시놉을 들이밀려는 순간.

3팀장이 중얼거린다.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제일 괜찮기는 한데.”

“나도 그게 제일 먼저 생각났어. 우리 회사 배우가 주인공으로 들어간 작품이니까…… 그런데 하필 그게 손채영이라 좀 그러네.”

“뭐 다른 건 들은 거 없냐?”

“IBC 수목에 편성된 타임슬립. 그게 괜찮다던데? 작감 둘 다 전작 여럿 같이해서 대박 낸 사람들이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랑 같이 겨울 최고 기대작이래. 그런데 손채영이 깐 거라서 반응이 안 좋을 수는 있겠다. 아 참, 성도원이 고민 중인 드라마 하나 있대.

이건 백 프로 사전제작이라 내년 여름 시즌 방송인데, 제작비 150억짜리 대작. 오디션 경쟁률은 이게 제일 높겠네.”

“그래? 송하랑 복댕이 생각은 어때? 세 개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넣어둬.

제발 셋 다 넣어둬.

“저는…….”

나는 이송하와 눈을 한번 마주친 후, 두 사람 앞에 고양이 수호령 시놉시스를 슥 내밀었다.

“팀장님, 실장님. 이 작품 한번만 봐주세요.”

김현조와 3팀장이 머리를 맞대고 시놉시스를 뒤적인다.

“이거 방금 송하가 읽은 거 아냐? 이것도 새로 들어가는 작품이야?”

“찍어놓은 게 있었으면 진작 얘기를 하지. 어디 건데?”

“TVL에서 1월 편성 받은 작품이구요. 지금 주조연 캐스팅 진행 중이에요. 감독은 TVL 신태균 피딘데 연출력도 좋고, 전작이 킬링미라고 미스터리 로맨스였는데 최고 시청률 5프로까지 찍고 순항했어요.”

“아, 나 그거 몇 편 봤어. 쫄깃쫄깃하게 연출 잘했더라.”

흥미가 생긴 듯, 김현조가 좀 더 자세히 시놉시스를 훑는다.

3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블에서 최고 5프로 찍었으면 잘 나왔네.”

“홍주미 작가는 처음 보는 이름인데, 이 작가는 전작이 뭐냐?”

“아, 신작은 TVL 자체제작이야?”

두 사람이 앞다투어 질문을 던진다.

대답하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는 이 작품이 케이블에서 대박난다는 것과, 중국 시장으로 수출돼서 주조연들을 한류스타로 만들 만큼 히트를 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 알고 있는 미래일 뿐이다.

드라마는 덩치 큰 사업이고, 나 혼자 우격다짐으로 밀어 붙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작품에 이송하를 집어 넣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당사자인 이송하를, 그리고 두 번째로는 눈 앞에 있는 김현조와 3팀장을 설득해내야만 한다.

다행히 철벽을 치고 있던 이송하는 거의 넘어온 것 같으니까, 이제 이 두 사람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면 되는거지.

문제는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거지만.

“자체제작은 아니고, 판 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작품이에요.”

“아, 외주야? 외주 제작사는 부실한 데가 많아서 잘 알아봐야 되는데. 제작비 떨어졌다고 배우들 출연료 지급 안하고 배째라고 나오는 데도 많잖아. 거기서 다른 거 뭐 만들었는데?”

“TVL에서 독립한 김판석 대표가 차린 회산데, 이게 첫작품이에요.”

“어…… 그래? 신생이야? 작가는?”

“홍주미라고, 로맨스 소설 두 편 집필해서 호평받은 작간데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구요. 제가 소설 읽어 봤는데 일단 글빨이 좋고, 캐릭터를 굉장히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표현하더라구요.”

예상은 했지만 김현조와 3팀장의 반응이 상당히 안 좋다.

< 재능이 발아하는 순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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