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 아니라 미래 예지 (1) >
김현조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시끄러운 곳에 있는지 계속 자동응답기로 넘어간다.
다행히 고준태 피디는 멀리 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를 앞에 두고 난 잠시 망설였다.
김현조한테 얘기도 안 하고 그냥 들이대도 되나? 어떡하지?
젠장!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예지몽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거기서 최건영은 무작정 달려가서 피디한테 푸시했다잖아. 그래서 결과적으로 넵튠이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고, 최건영은 회사에서 복덩이가 됐고.
밥그릇도 못 챙기는 병신이 될 순 없지. 저지르고 보자.
“피디님!”
“또 뭐···! 아, 조금 전에······.”
“넵튠 매니저 정선웁니다.”
고준태 피디의 얼굴이 스르르 풀어진다.
“제가 아까 멤버들 소개를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요.”
“데뷔 2년 차라고 하셨죠? 블랙아웃이 W&U 소속인 건 알고 있었는데 걸그룹도 있는 줄은 몰랐네요. 거긴 원래 배우 매니지먼트만 했잖아요.”
“그래서 멤버들이 다 배우 비주얼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가방을 메고 다닐걸. 그 안에 프로필이 있는데.
아쉬운 대로 고준태 피디에게 내 핸드폰에 있는 앨범을 보여줬다. 아까 인터넷 검색하면서 멤버들 사진 저장해 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다.
“흠······ 저기 라운지 있으니까 잠깐 앉죠.”
사진을 몇 장 넘겨본 고준태 피디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작은 라운지로 안내한다. 나는 뒤따라가며 경직된 어깨를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긴장해서 그런지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간다.
의자에 앉아서 고준태 피디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그는 진지하게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다.
그래, 봐라. 더 자세히 봐. 보면 볼수록 예쁠걸.
“W&U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그룹이에요. 대형 기획사에서 연습생 생활하던 애들 고르고 골라서 뽑아온 거라 실력도 안 빠지고, 말도 잘하고, 캐릭터 좋고, 의욕도 넘치구요.”
내가 지금까지 했던 수많은 발표, 프레젠테이션, 면접, 통틀어서 지금보다 더 마음이 급했던 적이 없다. 지금보다 더 멘붕이었던 적도 없었지.
말투나 자세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도록 계속 의식했다. 너무 절박해보이면 안 되니까 그것도 신경 쓰고. 그리고 한마디라도 더 입 밖으로 쏟아내기 위해 계속 머리를 굴렸다.
리더인 태희는 폭발적인 가창력에 작사 작곡 실력까지 뛰어난 능력자고, 엘제이는 겉모습만 보면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라고 말할 것 같은 스타일이지만 사실 멤버 놀리는 재미로, 특히 서영이 약 올리는 재미로 사는 애고, 서영이는 예능 체질이라 케이블 예능에 여러 번 출연했었고, 막내인 송하는 반박불가급의 비주얼 깡패고······.
중간부턴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쉬지 않고 떠들었다.
차 안에서 본 프로필, 샵과 대기실에서 계속 찾아봤던 인터넷 기사들을 떠올리며 긍정적으로 들릴 만한 것들은 전부 얘기했다.
“넵튠. 넵튠이라······ 괜찮은데요. 비주얼은 오히려 레몬걸즈보다 좋고.”
다행히 피디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나는 침을 삼키며 그가 결정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왜 리스트업에 없었지? 곧 3년차 되는 그룹이라서 뺐나? 혹시 이 친구들 프로그램에 섭외하면 W&U소속 배우들 얼굴도 좀 비춰줄 수 있어요?”
“예?”
“W&U에 예능 잘 안 나오는 비싼 배우님들 많잖아요. 많이 바라는 건 아니고 예고에 떡밥으로 쓸 만큼만··· 어때요?”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실장님께 확인해보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장님?”
“제가 신입이라서요.”
오늘이 첫날이라는 얘기는 뺐다.
빼길 잘했다. 신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준태 피디가 허탈해하면서 웃는다. 내가 너 같은 햇병아리 매니저랑 무슨 얘기를 더 하겠냐는 듯이.
“그래요? 난 또······ 오늘은 음방하러 온 거예요?”
“예.”
“그럼 멤버들은 있겠고, 위에 실장님도 같이 왔어요?”
“지금 생방 무대중일 겁니다.”
“그럼 무대 끝나고 잠깐 볼까요? 멤버들하고 다 같이. 직접 보고 그다음에 얘기하죠. 이거 제 명함이니까 연락 다시 주세요.”
“알겠습니다.”
명함을 양손으로 받아드는데 뭐가 등을 쿡 찌른다.
“여기서 뭐 하세요?”
돌아보니 임서영이 숨을 할딱거리며 서 있다.
“지금 현조 오빠가 오빠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는데. 하루 지나기도 전에, 그것도 생방송 중에 잠수를 타냐고, 뭐 그런 놈이 다 있냐고 난리 났어요.”
“너는 여기서 뭐 해? 무대는?”
“벌써 끝났죠. 저는 대기실 옆에 화장실이 꽉 차서 이리로 온 건데. 근데 지금 제가 아니라 오빠가 문제라구요! 네쌍둥이 먹여 살려야 하는데 첫날부터 잘리면 어떡하려고. 팬 잃어버려, 잠수 타, 아까부터 아슬아슬해요.”
“잠깐, 조카들을 내가 왜 먹여 살려?”
“어쨌든 제가 거들어 줄 테니까 빨리 변명거리나 생각해 보세요!”
얘 왜 이러지? 생방송 무대에서 내려온 직후라 그런가? 엄청 흥분해 있다. 술 한 병 걸친 사람처럼.
갑자기 임서영이 눈을 깜빡인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헉! 방치할 게 따로 있지!
급히 돌아보니 고준태 피디가 눈을 빛내며 임서영을 쳐다보고 있다. 그 눈빛을 본 임서영이 알겠다는 듯 소리친다.
“아! 혹시 아까 잃어버린 제 팬 찾으러 다닌 거예요? 못 살겠다, 진짜!”
“아니, 저분은···.”
“안녕하세요! 넵튠의 임서영이예요! 지금 사인해 드릴까요?”
“피디신데.”
“꺅!”
임서영이 비명을 지르더니 박력 넘치게 머리를 아래로 처박는다.
큰절하는 줄 알았네.
“어떡해! 죄송합니다, 피디님!”
“하하하. 캐릭터 풋풋하고 귀엽네. 반가워요.”
임서영이 큰 사고라도 친 사람처럼 울상을 한 채 발을 동동 구른다. 보호본능이라는 걸 가진 남자라면 저걸 보고 화낼 수 없지.
고준태 피디도 좀 전보다 훨씬 풀어진 얼굴로 진정하라며 작은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나한테 전화하라는 시늉을 한다.
“그럼 위에 있는 분하고 얘기해 보고 연락 주세요.”
“바로, 10분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임서영을 데리고 또 뛰었다. 복도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사이를 헤치면서, 무슨 달리기 시합하는 사람처럼 달렸다. 뒤에서 임서영이 왜 뛰는 거냐고 묻는데 대답할 겨를도 없다.
금방 대기실에 도착했다. 멤버들은 다 안에 들어가 있는지 안 보이고, 김현조와 최건영만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김현조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서영이 너 안에 들어가 있어.”
“오빠.”
“빨리. 애들 옷 갈아입고 있으니까 너도 들어가서 갈아입어.”
임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길래 먼저 들어가라고 등을 밀었다. 고준태 피디랑 얘기도 잘 됐는데,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어?
“화장실 간 놈이 어디서 뭘 하다가 무대 다 끝나고 기어들어와?”
어떡하지. 날 죽일 것 같은데.
임서영이 들어가자마자 김현조의 목에 핏대가 쫙 선다.
“중요한 일? 그래 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게···.”
“애들 공연하는 거보다 중요해? 이 새끼야, 이거 생방송인 거 몰라? 나중에 너 혼자 일할 때도 이렇게 애들 내팽개치고 돌아다닐 거야? 그러다 방송사고라도 나면 어쩔거야! 내가 널 믿고 애들 맡겨놓을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화장실 갔다가 고준태 피디님을 만났어요.”
버럭버럭 화내던 목소리가 뚝 끊어진다.
“뭐? 누구?”
“넥스트 K스타 고준태 피디님이요. 거기 출연하기로 한 걸그룹 멤버가 사고를 크게 쳐서 급하게 대타로 들어갈 걸그룹을 찾는 거 같더라구요. 실장님한테 전화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연결이 안 돼서······.”
“방송 전이라 매너모드로··· 아니. 그래서?”
“일단 제가 고준태 피디님을 잡아서, 멤버들 사진 보여주고 소개했어요.”
“자, 잘했어. 그래서?”
“실장님이랑 애들 직접 볼 수 있겠냐고 하더라구요. 명함 받아왔어요.”
들고 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김현조가 명함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새벽에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까칠하고 피곤해 보였던 얼굴 위로 얼빠진 표정이 차오른다.
“볼 수 있지. 당연히 볼 수 있지.”
렉이 걸린 컴퓨터처럼 몇 초간 멈춰있던 김현조가 내 팔뚝을 친다.
“선우씨, 일단 피디한테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어보고 당장 가서 잡아요. 다른 걸그룹 매니저랑 만나기 전에 가서 몸으로 막고 있으라구요. 그동안 나는 팀장님이랑 본부장님한테 전화해서 상황 전달할 테니까. 그리고 건영씨, 피디한테 인사하러 갈 거니까 애들 의상 도로 입히고, 메이크업 번진 것만 고치고 얼른 나오라고 전해요. 뭐해요, 둘 다! 뛰어!”
“예, 예!”
나는 다시 고준태 피디를 만나기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었다.
그 뒤의 일은 내 손을 떠났다.
급물살을 탄 것처럼 모든 일이 정신없이 진행됐다. 내가 고준태 피디를 붙들고 있는 동안 회사랑 연락을 끝낸 김현조가 최건영과 함께 넵튠 멤버들을 데려왔다. 애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피디 앞에서는 공손하게 구십도 인사를 했다.
멤버들은 고준태 피디와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중간에 음방 1위발표가 있어서 다시 무대에 올라갔다가 돌아온 후에도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다행히 분위기도 좋았고, 피디도 애들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애들한텐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멤버들을 대기실로 돌려보내고 나서 김현조가 나와 최건영을 붙잡고 당부했다.
“괜히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까이면 애들 밤에 잠도 못 자니까. 확실해질 때까지는 입 다물고 있어요.”
그 후 김현조는 고준태 피디에게 열정적으로 넵튠의 장점을 피력했다. 베테랑 세일즈맨처럼.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나까지 홀리고 있다. 내가 보기엔 고준태 피디도 반쯤 홀려서 넘어온 거 같다.
“작가들하고도 얘기해 봐야겠지만 저는 마음에 드네요. 기본적으로 비주얼이 좋고, 애들 성격도 좋아 보이고. 그런데 지금 음주운전 사고 친 걔들도 겉으로 봐선 아주 괜찮았다구요. 요즘 애들 진짜······.”
“피디님. 저희 W&U예요. 저희 소속 연예인들이 사생활 문제로 물의 일으키는 거 보셨어요?”
“하긴 W&U 일 잘하기로 유명하죠.”
대화에 농담이 섞이면서 분위기가 살살 풀어진다.
“그럼 피디님, 어떻게······.”
“아무리 급해도 당장 결정할 수는 없죠. 내부에서 회의도 해야 되고. 부장, 국장님 오케이도 받아야 되고.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음주운전 기사 터지면 기자들 문의 전화 빗발치기 시작할 거라서 우리도 여유 없어요. 여론 악화돼서 프로그램 이미지까지 나빠지기 전에 대안을 찾아야 되니까.”
“프로그램 씨피님이 최성호 부장님 맞으시죠?”
“맞아요, 성호형.”
“저희 대표님이 최부장님 오늘 밤에 시간만 괜찮으시면, 오랜만에 직접 만나서 얘기하면 어떻겠냐고······.”
“그래요? 사적으로 아는 사인가?”
“옛날에 몇 번 뵀다고 하시던데요.”
“그럼 잠깐만요. 일 빨리 진행되면 저도 좋죠.”
씨피와 통화를 하던 고준태 피디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온다.
그렇게 어어 하는 사이에 속전속결로 양측의 회동이 이뤄졌다. W&U에서는 대표와 매니지먼트사업본부장, 매니지먼트 3팀장이, Knet 측에서는 넥스트 K스타를 총괄하는 씨피와 메인피디인 고준태가 참석하는 회동이 말이다.
< 꿈이 아니라 미래 예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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