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7화 (7/218)

< 음악방송이라는 건 (3) >

“누가 사인 좀 해달라는데 가서 해줄 수 있어?”

“사인이요?”

“응.”

“당연히 해 줘야죠. 얘들아, 나 갈게!”

임서영이 바로 손을 흔든다. 나도 고개를 숙이는데, 여자애들이 나보다 더 공손하게 인사한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엔 엄청 착하고 밝은 애들로 보이는데.

하지만 돌아서는 임서영이 안도하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었나 보다.

역시 내 눈이 동태인 걸로.

“어딨어요? 누구한테 사인 해주면 돼요?”

엄청 기대하는 목소리. 양심이 좀 아프다. 다른 핑계를 댈걸.

나는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다가 머쓱하게 말했다.

“…어디 갔지?”

“헐.”

“조금 전까지 저기 있었거든. 남자였는데.”

“뭐예요, 나 사인 해주고 싶었는데! 이 오빠 안 되겠네! 내 귀하디귀한 팬을!”

임서영이 반달눈으로 생글생글 웃는다.

“언니! 태희 언니! 누가 나한테 사인 받고 싶다고 그랬대.”

“그래?”

“근데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뭔데.”

“이 오빠가 그분 잃어버렸어!”

“안타깝네.”

이태희가 임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그리고 슬쩍 나한테도.

한참 동생인데 형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누가 너한테 사인해 달라고 했다고? 저 오빠 방송국 귀신 본 거 아냐?”

엘제이가 놀리고, 둘은 또 티격태격하기 시작한다.

김현조가 먼저 돌아가 있으래서 나와 최건영이 애들을 데리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지친 몸을 막 소파에 기대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프리티 프리티 프리티걸입니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여덟 명이 밀려들어온다. 아까 봤던 에이프런 밑에 교복 입은 여자애들이다.

함께 들어온 매니저가 나랑 최건영을 번갈아 보더니 나한테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데뷔한 애들이에요. 평균 나이 열여덟 살이라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나한테 부탁할 게 없을 텐데.

근데 평균 나이 열여덟 살인 애들한테 뭘 입혀 논 거야. 이 파렴치한 어른들아.

“네, 안녕하세요.”

“이거 받으세요.”

뭘 내밀길래 받아보니 미니앨범이다. 껍질에는 사인까지 돼 있다.

그 뒤로 프리티걸은 한참을 넵튠 애들과 명랑하게 떠들다가 갔다.

“인사하는 것만 힘들 줄 알았더니 인사 받는 것도 만만치 않네.”

내 말에 임서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사 받는 게 더 힘들어요.”

“그래? 왜?”

“우린 데뷔하고 연차 올라가는 동안 이뤄 놓은 건 하나도 없는데, 우리보다 훨씬 어린 애들이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러 오면 얼마나 불안한데요.”

“아…….”

“쟤들이 우리보다 먼저 뜨면 어떡하지. 우리도 회사에서 언제까지 밀어줄지 모르는데, 밑 빠진 독에 계속 물 붓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나는 몇 번이나 입만 열었다 닫았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표정을 본 임서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내가 처음 온 오빠한테 별 얘길 다 하네.”

분위기는 금방 다시 밝아진다. 멤버들은 시끌시끌 떠들면서 안무 연습을 반복한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좀 놀랐다.

2년차 무명. 뜨지 못하는 걸그룹.

그래도 솔직히 심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저 애들이야 운이 없어 뜨지 못하더라도 나이 어리고, 예쁘고, 성격도 좋으니 다른 일을 하더라도 잘 살 텐데 뭘. 그런 생각이었지.

아이돌 걸그룹은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제품 같다고 생각했던, 그 편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게 미안해진다.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의 고민은 내 것보다 절대 가볍지 않았다.

나한테 능력만 있다면 저 애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에서 보내는 하루는 진짜 대기의 연속이었다. 리허설을 하고 대기하고, 오늘 컴백하는 그룹이 사전 녹화를 뜨는 동안 대기하고. 생방송 시간이 될 때까지 대기하고.

스마트폰 없을 땐 사람들 이 안에서 뭐 했나 몰라.

넵튠의 차례는 앞에서 세 번째다.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멤버들은 분주해졌다. 스타일리스트들이 가져온 무대의상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수정한다. 잠깐 몸이 자유로워지면 쉬지 않고 안무연습을 한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왜 쟤들보다 내가 더 긴장한 것 같지.

굳은 다리를 끌고 대기실을 나왔다. 대기실 통로는 여전히 붐비고 있다. 간신히 뚫고 화장실에 도착했는데 안에서 한 남자가 엄청난 기세로 나온다.

“에이, 시발! 미치겠네!”

얼굴은 벌겋고, 뭐에 화가 났는지 욕을 줄줄 하면서 씩씩대고 있다.

피해가야지.

옆으로 돌아가려는데 남자 가슴에 걸린 게 딱 보인다. 직원 고준태. 방송사 사원증이다. 사원을 보면 반드시 인사하라던 김현조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저건 미친갠데. 피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라이, 죽기야 하겠냐 싶어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하세요, W&U 정선웁니다. 지금 넵튠이라는 걸그룹 데리고 활동 중인데 잘 부탁드립니다.”

나 지금 열심히 웃고 있는데. 웃는 사람한테 욕은 안 하겠지.

다행히 사원은 나를 훑어보고 좀 진정한다. 처음으로 정장 덕 좀 보는 건가.

“W&U엔터? 거기 걸그룹이 있어요? 처음 듣는데, 신인이에요?”

“데뷔한 지 2년 됐습니다. 네 명이고요.”

“그래요? 그룹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넵튠입니다.”

“혹시 명함 있으시면…….”

아직 명함은 없는데. 핸드폰 번호를 알려줘야 하나.

“명함은 없고….”

“피디님!”

누가 허겁지겁 뛰어온다. 운동선수처럼 덩치가 큰 젊은 남자다. 그는 사원 앞을 막고 머리가 무릎에 닿을 만큼 숙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 됐어요.”

“정말로, 제가 애들을 더 확실히 점검했어야 했는데…!”

매니전가?

“됐으니까 혈압 오르게 하지 말고 가세요. 나 지금 댁 회사에서 싸질러 놓은 똥 치우느라 바쁘니까!”

“피디님, 피디님!”

“하아……!”

“저희 녹화하기로 한 건 그럼…….”

“녹화는 무슨 녹화야! 스무 살짜리 걸그룹 멤버가 애인이랑 술 퍼먹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렸는데 출연을 어떻게 시켜! 내일 되면 기사 뜨고 난리 날 텐데! 어휴, 다 차린 밥상에 똥물을 끼얹어도 유분수지. 스케줄 맞추려면 당장 이번 주부터 녹화 들어가야 되는데 돌아버리겠네……!”

“노, 노이즈 마케팅으로 가면 프로그램에도 좋은….”

“이건 범죄잖아! 개시도 하기 전에 욕 처먹을 일 있어?!”

결국 피디가 욕을 하면서 자리를 피해버린다. 남겨진 남자는 화장실 문짝을 쾅쾅 걷어찬다.

“망할 년! 걸레 같은 년,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횐데!”

말 참 곱게 한다. 저런 사람이 있으니까 아직도 매니저라고 하면 양아치, 조폭이 연관검색어처럼 연상되는 거지. 저 사람하고 비교하면 김현조는 천사네.

“뭘 봐요?! 구경났어요?!”

남자가 찌릿 나를 노려본다. 깜짝이야.

“그쪽이 지금 길 막고 있잖아요.”

“시발…….”

괜히 불똥이 나한테 튀는 거 아닌가 했는데, 그는 금방 다른 쪽으로 가버린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그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또 꿈을 꾸나?

나는 다시 사십 대의 내가 돼 있었다. 매니지먼트사의 대표. 겁나게 큰 사무실을 쓰고, 고급진 정장을 입고 있는 성공한 나. 새벽에 꾼 꿈과 똑같다. 눈앞에는 여전히 박국장과 송기자가 웃는 얼굴로 앉아있다.

분명 꿈인데……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고.

그럼 꿈이 아니면 이게 뭐지?

뭐냐고, 대체.

“출근 첫날에 고준태 대표님을 만나셨다구요?”

송기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이 익숙하다. 고준태 대표. 조금 전에 화장실 앞에서 만난 남자. 그 남자의 사원증에 써 있던 이름이다. 대표는 아니었지만.

“그때 Knet이 넥스트 K스타를 막 론칭한 때였어요. 신인 아이돌 여덟 팀 모아서 경쟁하던 프로그램 있잖아요. 너무 옛날 거라 송기자님은 모를 수도 있겠네요.”

넥스트 K스타?

“저도 알아요. 첫 시즌 시청률 대박치고 여러 시즌 나왔던 프로그램이죠?”

“맞아요. 그때가 첫 녹화 며칠 전이었는데…… 출연하는 걸그룹 팀 중 한 팀이 사고를 쳤었어요. 그래서 고준태 피디가 당장 대타로 나갈 새 걸그룹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 제가 고준태 피디를 만났던 거죠.”

“세상에. 운이 정말 좋으셨네요. 그럼 대표님은 처음 출근한 날 그런 대형프로그램을 따신 거예요? 넵튠이 그 프로에 출연했잖아요.”

잠깐만, 뭐? 넵튠이 출연했다고?

상황은 혼란스러웠지만,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야 할 것 같다.

“하하하. 송기자님, 그게 그렇게 잘 풀렸으면 제가 왜 첫날부터 고생문이 열렸다고 했겠어요.”

“그럼요?”

“그때 저는 예능 피디 잘 몰랐어요. 당연히 고준태 피디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 사람이 그런 대형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죠. 그래서 그때 같이 일하던 친구한테 얘기했어요. 고준태라는 피디를 만났는데 그 사람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걸그룹 하나가 펑크 난 것 같더라. 다른 팀 찾을지도 모르니까 넵튠을 소개해보면 어떨까. 그랬죠.”

“아…….”

“그 친구가 안 될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고준태 피디가 하는 프로는 신인 애들이 나오는 프로인데, 넵튠은 데뷔 2년 차 중고신인이라 안 될 거라고. 그리고 대타로 들어가는 거면 회사에서도 안 된다고 할 거라고.”

“설마 그걸 믿으신 건 아니죠?”

그래. 아니지?

그런데 왜 믿었을 거 같지.

“믿었죠.”

그렇지. 나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

“그리고 제가 믿고 있는 동안 그 친구가 고준태 피디를 찾아가서 푸시를 한 거죠. 넵튠이 이런 애들이다, 스케쥴 된다, 당장 합류할 수 있다. 그게 성사가 됐어요. 그 친구는 신입이 첫날부터 대박을 물어왔다고 그날부로 완전 복덩이가 됐고, 저는 괜히 억울하다고 털어놨다가 지 밥그릇도 못 챙기는 미련한 놈 됐고.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네요.”

“세상에…….”

“하하. 출근 첫날 다이나믹했다고 그랬잖아요.”

“혹시 그 친구 분, 저도 아는 사람일까요?”

“오프 더 레코드로?”

“그럼요.”

“최건영이요. 최건영.”

“어머머, 그분…….”

“맞아요.”

“그분은 그때부터 그러셨구나.”

“정선우!”

눈앞에 최건영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 앞에 서 있다.

“여기 서서 뭐해? 우리 순서 다 돼 가. 실장님이 너 빨리 불러오래.”

“……아이씨, 소름 돋아.”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 소름이 왜 돋아?”

“어…….”

내가 뜻하지 않게 네 본성의 일면을 봤다고나 할까. 분명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닌데 반드시 일어날 것 같은 일이라고나 할까.

“너 혹시 고준태 피디라고 알아?”

“알지. 넥스트 K스타. 지금 핫하잖아. 왜? 봤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 소름이 돋아서 손발까지 쩌릿쩌릿하다. 비 오는 날 감전되면 이런 느낌 아닐까.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왜 그러냐니까?”

“내가 지금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겼거든.”

“뭐?”

“실장님한테 이거 먼저 해결하고 간다고, 죄송하다고 좀 전해줘.”

“뭐?! 무슨 일이길래, 좀 있으면 애들 무대 올라가!”

머리는 뒤죽박죽이었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뭔지는 알겠다.

나는 조금 전 고준태 피디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 음악방송이라는 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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