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90화 (90/227)

#090. 소문 (1)

탁.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둘이 접이식 의자를 펼쳐 바닥에 놓았다.

역시 같은 차림의 사내들이 주변에 나뒹굴어 있던 철제 탁상 하나를 낑낑거리며 날라 왔다.

쿵! 짤그락!

바닥에 흩어져 있던 유리 조각이 탁상 다리에 밟혀 잘게 부서졌다.

벨포트가 말했다.

“앉으시죠.”

나는 의자에 앉았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를 마주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막했다.

벽면에 가득한 총알과 검 자국.

무너진 천장과 외벽.

바닥 가득한 온갖 파편들.

그것들만이 간밤에 이곳에서 벌어진 전쟁을 증명하고 있었다.

“날씨가 썩 나쁘진 않군.”

나는 책상을 보며 말했다.

부서진 벽 틈을 통해 내리쬔 햇빛이 책상 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예. 간밤에 그렇게 세찬 비가 내렸다고는 믿기지 않는 날씨군요. 먼저 제대로 쉬실 틈도 없이 이렇게 일정을 잡게 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시간은 상관없다.”

간밤 용병을 해산시키고 몇 가지 후속 조치를 취하느라 새벽 늦게 잠들었다.

하지만 몇 시간의 숙면만으로 체력과 정신력은 충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약간의 상처와 촉매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걸 제외한다면.

“사실 실감이 잘 안 나기는 합니다. 그런 괴물 같은 자가 죽었다는 게 말입니다. 물론 에반 님이 당연히 해내시리라 믿고는 있었습니다만.”

그의 시선이 흘긋 뒤를 향했다.

거대한 구멍이 바닥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구멍은 일직선으로 아래층에도, 그 아래층으로도 이어져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번개가 쳤다고 하더군요. 마치 분노한 신이 내리치는듯한 그런 번개 말입니다. 마나의 움직임이 마법의 그것과 유사했다고도 하던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 손끝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그만한 규모의 번개를 한 명의 마법사가 단독으로 생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소문이 조금 부풀려진 감이 있지 않느냐고.

파직.

“직접 확인해 보고 싶나?”

“아, 아닙니다. 하,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손 위에 흐르는 서슬 퍼런 전류에 그가 움찔했다.

이내 식은땀을 흘리며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 전쟁의 승리는 모두 에반 님 덕입니다. 파르테르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적 모두 꼬리 빠지게 내빼더군요.”

일대를 주름잡던 제왕의 죽음.

그 둔중하고도 거친 전보는 간밤 빠르게 전 구역으로 퍼져나갔다.

전쟁을 주시하고 있던 아군과 적 진영의 정보원들에 의해서.

“47번 구역 외의 다른 구역에서도 교전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고 했나.”

“예. 블루서펜트에 붙었던 여러 하위 조직이지요. 어느 정도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휘관 역할을 하던 블루서펜트 조직원들이 모두 본진으로 송환된 상황이었으니까요.”

적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혹은 도주하다 붙잡혀 목숨을 잃거나.

“일단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벨포트가 눈짓을 보냈다.

직원들이 서류 가방 몇 개를 책상 위에 올려 펼쳤다.

딸깍.

안에는 두꺼운 서류뭉치가 가득했다.

“47번 구역을 제외한 전 구역, 파르테르가 운영하던 시설들과 관련된 서류입니다. 운영 기간이나 현 소유권자, 수입 내역 같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을 보니 확보하느라 꽤나 고생했겠군.”

“하하, 적이 빠지자마자 온 구역 사무실을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서류 뭉치 몇 개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주워 먹을 게 없나 목숨 걸고 빈 사무실에 숨어든 뒷골목 양아치들도 간혹 있더군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탁상 위에 양 팔꿈치를 얹고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노획한 건물과 땅 모두 매도할 생각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치안국에서 조사가 나올 거라 생각하는군.”

“예, 맞습니다. 47번 구역에서 벌어진 전쟁은 규모가 너무 컸습니다. 애초에 손을 빌릴 생각도 안 했습니다만, 구역 경찰들이 덮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지요. 수사가 진행되면 전쟁에 관여했던 이들이 줄줄이 엮여 나갈 겁니다.”

조사관이 파견되기 전 자산이 될 만한 것을 모두 팔아 치우고 현장을 뜬다.

지금 상황에 할 수 있는 것 중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농지로 쓸 만한 땅은 모두 헥사메디컬로 넘어가겠군.”

“예.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매입의 형태를 거칠 겁니다.”

“무얼 재배할 생각이지?”

“당연히 신약에 필요한 약용식물들 아니겠습니까.”

“마병의 치료제 말이군.”

“에반 님 덕이지요. 뜻깊은 일에 일조하신 겁니다. 치료제가 보급되고 몇 년만 지나도 마병으로 고통받는 이를 찾아볼 수 없을 테니까요.”

내 눈빛이 냉랭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계속 입을 열었다.

‘…치료제가 가짜라는 폭로는 언제든 가능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증거가 필요하겠지.’

폐기된 실험 결과.

혹은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이들.

꼭 폭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폭로와 동시에 내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존재했다.

‘터트린다면 증거를 확보한 후, 최대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시점에.’

그때가 되면 지금 느끼는 이 역한 감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리라.

“어쨌든 슬슬 우리의 계약을 마무리 짓지.”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서류 가방을 가지고 올라왔다.

퉁.

책상 위에 올린 뒤 내 뒤에 도열했다.

슈트와 총으로 무장을 갖춘 모습에 벨포트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소문을 듣긴 했는데, 경찰 혹은, 황실의 군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군요.”

감탄과 놀라움 섞인 그의 목소리를 흘리며, 나는 가방의 버튼을 눌렀다.

딸깍.

옆에 놓인 다른 가방들과 마찬가지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서류 뭉치가 나타났다.

“47번 구역에 있는 시설 관련 전부다. 주점과 투기장, 총포상, 경매장, 농장 인수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 모두.”

파르테르의 본진이 있던 곳인 만큼 시설의 종류와 숫자 역시 다른 구역보다 월등히 많았다.

“안 그래도 이 건물을 모두 뒤져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미리 모두 챙겨 주셨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빠르게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그리고 퍼틸랜드 말입니다만. 목적을 달성했으니 모든 시설의 매도가 끝나면 해체할 생각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뒤를 밟힐만한 꼬리는 아예 남겨 놓지 않는 것이 좋았다.

애초에 떠돌이 용병들로 구성된 집단이기에 반발도 그리 심하지 않을 터였다.

단, 47번 구역에서 전투를 치렀던 이들만 제외한다면.

「저희는 계속 에반 님 밑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용병들을 해산시키던 새벽.

그들은 거처로 돌아가기를 망설였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은 상황이 마무리되면 퍼틸랜드가 해체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소문이 되어 다른 경험 부족한 용병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거둬 주십시오.」

「거둬 주십시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서로 위에 포개져 중첩된 목소리가 빗속을 울렸다.

살아남은 이는 총 250여 명.

부상자를 포함하지 않은 숫자.

그것을 감안하면 첫 인원의 70퍼센트 이상에 해당하는 인원이 살아남았다.

상황에 맞는 최선의 전략, 또한 전선 전진의 효율보다는 최대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데에 방점을 둔 결과였다.

「아시다시피 용병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이가 대다수입니다. 지속해서 운용할 병력이 필요하시다면 차라리 따로 모집을 하시는 것이….」

밀시안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굳힌 상태였다.

「저마다의 싸움방식으로 살아왔겠지. 굳어진 사고와 행동 양식을 고치는 데 품이 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뜯어고칠 수 있을 때, 썩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 나올 거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수많은 의뢰를 받으며 살아가는 용병으로서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무의식중에 바랄 수밖에 없다.

누군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 줄 나침반이자 흔들리지 않는 키가 되어 주기를.

「떠돌이 생활 때보다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계산이 큰 녀석도 분명 존재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충성심이란 원래 자신에게 주어진 이득에서 피어나는 감정이니까.」

당장 쓸 수 있는 병력이 필요했다.

함께 전장을 거쳐 이미 내 지휘에 익숙한 이들이기도 하며, 심화 교육을 거쳐 더 쓸 만한 집단으로 탈바꿈시킬 자신이 있었다.

“농장의 경비를 맡을 인원은 필요하지 않나?”

“모두 새로 고용할 생각입니다. 조사가 나왔을 때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하에서 발견된 파르테르의 개인 자산 말입니다만.”

그가 다시 뒤쪽 구멍을 보았다.

시선이 닿는 가장 아래, 쌓여 있는 돈과 경비를 서는 용병들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양이 워낙 많아 아직 모두 거처로 옮기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계약서에 명시가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라 말입니다. 밤새 회의를 거쳤습니다만.”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모두 에반 님께 양도하는 것으로 결정 났습니다.”

“…….”

선심을 쓰듯 이야기하지만, 불가피한 결정임을 알고 있었다.

“제가 아주 강력하게 의견을 냈지요, 하하. 이번 전쟁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분이니 꼭 관계를 이어 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맹약의 거래 조건에 해당하는 시설 전반과 농토는 확실하게 넘겼다.

하지만 도중 획득한 전리품까지는 그 조건에 포함되지 않는다.

돈을 쌓아둔 비밀 공간이 전쟁 중 발견될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직 용병들이 해체되지 않은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겠지.’

지휘권은 아직 내게 있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포기할 것은 확실하게 포기한 것이다.

어쨌든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인 만큼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내가 준비해 둔 몇 가지 수는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47번 구역의 서류를 모두 확인한 그가 덮개를 닫고 가방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돈은 모두 가까운 은행 지점으로 옮기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조사관이 나오기 전…?”

가방은 검은 마나에 감겨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당황한 눈빛으로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돈을 옮기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 될 것 같군. 농토를 제외한 47번 구역의 모든 시설, 내가 매입하지. 발밑, 지하에 있는 돈으로.”

* * *

똑똑.

“들어와라.”

내 허락과 함께 문이 열리고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17-2번 거리 유흥시설의 숫자와 조직도, 그리고 3-5번 거리 총포상의 재무지표입니다.”

쿵.

‘탁’이나 ‘툭’ 따위가 아니라 ‘쿵’이었다.

책상 위에는 방금 내려놓은 것 외에도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취합이 빠르군. 고생했다.”

“귀히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인수인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시설을 모두 직접 운영하실 생각입니까?」

「둘 것은 두고, 바꿀 것은 바꾼다.」

그는 내가 47번 구역에 남는다는 사실이 탐탁잖은 눈치였지만, 공시된 금액보다 훨씬 높은 내 제시액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용병들 역시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인수하겠다는 말씀은….」

「시설을 운영하려면 그것을 지킬 인원이 필요할 테니까. 물론 퍼틸랜드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헥사메디컬이 자신들의 뒷배였다는 사실을 아는 용병은 아무도 없다.」

「…….」

「나 역시 전쟁의 주모자였기에 경찰에 떠들 수는 없는 입장이다. 오히려 용병들의 입단속을 하고 철저히 은폐하겠지.」

「…….」

「겁이 많군. 물증은 모두 없애 둘 생각 아닌가? 아니, 이미 작업을 마쳐 놓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자로 재듯 선택에 따른 득과 실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몇 대의 차량이 돈을 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음 날 곧바로 인부를 고용해 시설의 복구를 시작했다.

지금 내 임시 집무실이 있는 투기장 건물을 포함해서.

「저, 정말 계속 에반 님 밑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용병들도 열성적으로 복구에 참여했고 시설이 어느 정도 원래의 모양새를 갖추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설 운영과 관련된 비전투인원은 모두 그대로 흡수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고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이기에 굳이 그 자리를 새 인원으로 채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계약 관계로 이루어져 있을 뿐 조직에 깊이 관여된 자들이 아니었다.

‘끝이 없군.’

그리고 지금 나는 47번 구역 곳곳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중간 관리자를 거치지 않고, 시설 하나하나의 운영 흐름을 파악하고 모든 변동 사항을 직접 체크했다.

‘보고를 여러 단계에 걸쳐 올린다는 건 그만큼 뒤로 공작을 꾸미기도 좋다는 얘기이니.’

누락한 회계 내역 몇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고, 자금을 빼돌린 이들은 모두 용병들의 손에 끌려가 영원한 휴가를 떠났다.

그밖에도 처리할 것들이 많았다.

건물과 토지의 명의 이전이나 새로 노획한 자금의 처리, 운영을 일시 중단, 혹은 속행할 시설들의 선정, 그리고 살아남은 용병들의 보수에 대한 정산.

툭.

잠시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었을 때,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똑. 똑- 똑-.

특이한 템포의 노크였다.

그 노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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