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믿음 (2)
“그쪽이 가지고 있는 마병(魔病)을 치료해 주지도 않았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에스텔은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정작 그 내용을 뱉은 당사자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오늘내일 날씨 이야기 정도의 발언이었다는 듯.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마병(魔病).
마기에 감염된 높은 번호 대의 땅에서 종종 아이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병.
배에 나타나는 검은색의 나뭇가지 문양.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은 불명.
전염되지도 않고 증상도 없으나 성년과 서른 사이, 반드시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죽음.
‘내가 이 사람을 밖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단언컨대 그런 적이 없다.
마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아델 사제님은 10년도 더 전에 돌아가셨잖아.’
여러 가능성이 머리를 스치고, 하나둘 지워져 간다.
결론 하나가 남는다.
얼빠진 생각이란 걸 알지만, 순간 닥친 당황감이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내 배 봤어요?”
“…실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 씨.”
에스텔이 얼굴을 붉혔다.
그래. 누군가에게 맨살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사제복이나 갑옷으로 꽁꽁 싸매고 살아왔던걸.
“빨리 말해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대답에 따라서 내가 여기서 당신을 어떻게 할지 달라질 거예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책상에 놓아두었던 성경을 집어 들었다.
신성 마법을 제외하더라도 자신은 수준급의 마나 유저.
마나를 두르기만 하면 책도 훌륭한 무기이자 대화 수단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카인은 그녀의 날 선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가 그쪽 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에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하면 교단의 석학들이 진작!”
“눈을 보면 거짓을 구분할 수 있지 않나. 다시 말하지.”
카인이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마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에스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카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언급도.
치료법을 알고 있다는 말도.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그 방법이라도 말해 봐요. 마병을 어떻게 치료하는데요?”
에스텔의 쿵쾅거리는 가슴이 멈추지 않았다.
삶에 대한 욕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그녀가 종교에 귀의한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신을 믿다 보면 언젠가 정말 구원이 찾아와, 마병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마병으로 돌연사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의지는 점차 꺾여 갔다.
자신의 나이는 현재 25살.
남은 수명은 최대 5년.
치료는 반쯤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에겐 얘기하지 않았어. …입 밖에 내면 정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남자가 치료법을 알고 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정보를 탈탈 토해내게 만들고 싶었다.
“빨리 말해요. 뜸 들이지 말고.”
“이 교도소 안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
“약재 같은 게 필요해요? 그런 건 내가 밖에서 구해 오면 돼요.”
“재료 같은 건 필요 없다. 다만.”
“다만?”
“교도소 밖의 특정 장소로 가야 한다. 그쪽과 나, 두 사람 모두.”
“······.”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친다.
보다 보면 빨려들 것만 같은 카인의 푸른 눈동자.
에스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결국 불가능하단 얘기잖아요.”
형기가 끝나거나, 혹은 죽거나.
그 외 방법으로 죄수가 켄트락 교도소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신 형량, 무기 징역에 가깝다고 들었는데요. 아, 차라리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 위쪽에 말해 보는 게 어때요? 방법을 증명하기만 하─.”
“탈옥한다.”
“탈… 뭐요?”
“탈옥.”
에스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산책하러 나가겠다는 듯이 그렇게 얘기해요. 그게 가능하면 다른 죄수들이 진작 했겠죠.”
그다음 순간, 에스텔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카인의 손 위에 피어오른 불꽃과, 얼음 결정과, 전기 구체를 보고는.
“당신…. 마법사였어요? 근데 어떻게 1동에…. 아 머리 아파.”
카인의 활성화된 마나 회로가 이제야 느껴진다.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건가.
‘대체 몇 번을 놀라야 하는 거지.’
마탑의 장로들도 기껏해야 2개 원소를 다룬다.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난 상황.
에스텔은 더 이상의 논리적 사고를 포기했다.
“그쪽 도움이 필요하다.”
“…제가 뭘 어떻게 도우면 되는데요?”
카인은 팔다리에 마나를 불어 넣어 멀쩡히 움직여 보였다.
“2주 내로 이 사실은 교도소 사람 전체가 알게 된다. 그때 증언을 부탁한다. 끊긴 힘줄을 신성 마법으로 치유했다고.”
파손된 세포 조직이나 신체 부위의 완전한 복구.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표식을 3개 이상 몸에 새긴, 주교급 사제들이 치료를 한다면 말이다.
“일반인들은 신성 마법의 위력이 믿음에 비례한다고 알고 있지.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하면, 충분히 믿을 거다. 소장은 신의 기적이라며 오히려 좋아하겠군.”
신성의 힘은 믿음에 비례하지 않는다.
교단 본부 시험을 통해 추가로 부여받거나 언젠가는 회수당할 표식의 수에 비례할 뿐.
“그래도 완전히 의심을 피하긴 힘들 텐데요. 여기 교도관들은 상급자에 따라 근무 태도가 달라져요. 특히 곧 부임 올 수석 교도관은 수도에서도 엄청 유명한데─”
“자비르 말인가. 알고 있다.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겠지.”
“…….”
카인은 책상 위의 상자들 쪽으로 시선을 슥 옮겼다.
“그래서 그쪽이 가진 물건들이 필요하다.”
에스텔의 시선이 카인을 따라 이동했다.
열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잡동사니 가득한 상자들.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필요한 게 있다면 가져가요.”
카인이 상자를 열어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카인을 보며, 에스텔은 다리를 꼬았다.
‘나도 어떤 용도인지 모르는 물건들이 많은데.’
여신상 설치와 고대 마도 왕국 유적지의 유물 회수.
전투 사제의 주 업무였다.
유물의 형태는 다양하다.
장신구에서부터 무기나 방어구.
간단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대개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 능력이 봉인되어 있다.
오랜 시간 마기가 중첩된 땅에 방치되어 있던 탓이다.
‘제대로 사용하려면 ‘해독’을 해야 하는데.’
해독.
마나를 주입해 마기를 정화하고 유물에 새겨진 술식을 발동시키는 일련의 과정.
다만 유물마다 적용되는 방식이 제각각이라 난이도는 극악이다.
에스텔이 가진 유물들도, 교단에 제출 후 해독이 불가능하거나 숨겨진 능력 자체가 없다고 판정받은 물건들이었다.
드득-
카인이 상자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줄을 뜯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던 교단 목걸이의 줄을, 유물 목걸이의 줄로 교체했다.
결과적으로 팔각별 심볼은 그대로되 줄만 바뀐 셈이었다.
우웅-
카인의 손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의 마나가 목걸이에 스몄다.
팔각별을 제외한 줄 부분이 그에 공명해 빛을 발하다 이내 평소와 같이 돌아왔다.
“······!”
그리고 그 순간, 에스텔은 더 이상 카인의 마나 회로를 감지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해 허공에 발현 중인 마법의 마나는 느껴졌지만, 카인의 신체는 일반인과 다름없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아니, 몰라. 난 더 이상 아무 생각 안 할 거야.”
“뭐라는 거지.”
“됐어요. 하던 거 계속해요.”
카인은 뒤이어 반지 한 쌍을 꺼냈다.
마나를 불어 넣어 순식간에 능력을 개방했다.
하나는 자신이 착용하고, 다른 하나는 에스텔에게 건넸다.
“······?”
“착용자 간에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반지다.”
말 잘 듣는 인형처럼, 에스텔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진짜네요. 당신 기운이 느껴져요. 이걸 제게 주는 이유는요?”
“난 밖에 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쪽 치료보다도 먼저. 내가 탈옥하고 1년. 그 뒤에 나를 찾아와라.”
에스텔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 안에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뭐, 뭐하려고요?”
카인의 양손이 에스텔의 귀를 지나, 목 뒤로 향했다.
“죽지 않는다. 너는.”
귓가에 스치는 속삭임.
카인이 물러났다.
에스텔의 목엔 주홍빛 펜던트가 새롭게 걸려 있었다.
“······.”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지금 거기에 쏠려 있지 않았다.
죽지 않는다.
두근.
묘한 안도감이었다.
이제껏 살며 느껴본 적 없던.
“거짓을 판별하기 쉽게 명제 형태로 말하지. 나는 그쪽이 적어도 2년 내로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거짓이 아니다.
“···알았어요. 이 펜던트는 뭐예요?”
“마기의 침식을 늦춘다. 효과가 극적이진 않지만, 도움은 될 거다.”
“침식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잖아요. 효과가 실제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
* * *
카인이 떠난 뒤, 에스텔은 의자에 몸을 쭉 늘어트렸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아직까지도 정신이 멍했다.
‘카인.’
재미있는 사람 같아 보여 평소 관심을 두고 있긴 했지만, 난데없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탈옥이라고.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궁금한 건 하나도 알려 주지 않고 순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 버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얘기하겠다고만 했다.
‘가능성이 있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땐 제로에 가깝다.
그가 마법사라고 하지만, 잠깐 엿보았던 마나 회로는 그리 높은 레벨이 아니었다.
‘검사에서 안 걸렸으면 안에서 회로를 만들었다는 얘긴데 말이 안 되잖아. 아 머리 아파.’
말이 안 된다.
답답해 죽을 것 같다.
중요한 부분은 죄다 생략된 소설 한 권을 본 기분이다.
“아아아─.”
머리를 마구 헤집자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이 실처럼 입안에 스몄다.
뱉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멍할 뿐이었다.
“무슨 방법을 쓰려고 하는 거지.”
탈옥.
분명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기대감이 부푸는 걸 막을 수 없다.
그가 탈옥을 해야만 자신의 마병을 치료할 수 있어서?
물론 그것도 있지만, 왜인지 그라면 정말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자신의 눈앞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몇 번씩이나 보여 줬으니까.
그 기대감이, 결국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그에게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여신님이 인간의 몸에 현신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기록일 뿐이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전능하고.”
이내 고개를 젓는다.
여신이 남자 몸에 현신할까 하는 1차원적 의문은 뒤로하고서라도, 카인은 이미 신을 부정하는 태도를 수차례 보였다.
“…모르겠다. 에스텔, 머리 쓰지 마. 머리 쓰면 지는 거야.”
마음 한구석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약속하지. 네가 죽음을 비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 한 마디가 자신의 지난 시간을 토닥여 주는 것 같아서, 또 구원의 말처럼 들려서 말이다.
* * *
나는 성당을 벗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목걸이는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풀지 않고 다니는 게 낫겠지. 밑밥을 깔아 둬야 하니까.’
반지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주머니에서 꺼내, 성경 수납공간에 넣어 두었다.
에스텔과 카인의 공통점.
내가 공들여 조형해, 나름의 애정이 깊은 인물들.
주인공에 의해 구원받는 인물들.
“복수를 돕는 것도, 마병을 치료해 주는 것도 원래는 주인공의 몫."
원래는 모두 지금 일어날 일들이 아니다.
내가 짜두었던 소설의 흐름은 이미 어그러졌다.
큰 줄기는 변하지 않겠지만, 각 사건에 이르는 분기들은 어떤 식으로 변모할지 모른다.
“…상관없다.
이미 각오한 일이다.
목표를 위해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기로.
나는 자리에 앉아 회로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회로 레벨: 1]
[마나: 230 / 230]
최근 열쇠를 깎는 데 시간을 투자해 성장이 조금 더뎌져 있던 상태였다.
물론 단순히 노력이란 요소 외에도, 마나 양이 늘어날수록 성장은 정체된다.
특히 400에서 500으로 오르는 구간은 통곡의 벽이라 불릴 정도다.
‘500이 되면 회로 레벨이 상승하니, 마나 운용의 효율 자체가 달라지지.’
회로 레벨은 5배 단위로 상승한다.
500에서 한 번.
2500에서 다시 한번.
블루 서펜트 간부 후보생의 마나 평균이 500 언저리이며 간부들은 2500이 넘는다.
자율 활동 시간이 끝나기 5분 전, 죄수들이 들어왔다.
“아까 교도관들이 8번 방에 데리고 가던 놈, 키프텔 아니야? 원래 쓰던 방도 거기였잖아?”
“독방에서 나오는 날짜가 오늘이 맞긴 한데. 뒷모습도 비슷해 보였고.”
“정신병동 가기 전에 짐 가지러 온 걸 수도 있잖아.”
죄수들은 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이고는 청소 준비를 시작했다.
‘돌아왔나 보군.’
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끼익-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넝마를 연상케 하는 회색 더벅머리.
굶주린 야수 같은 퀭한 눈.
녀석이 말했다.
“이고르. 세금은 잘 모아 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