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당신이 남긴 훈장2021.09.14.
“거기 있어?”
“예예, 폐하. 여기 있습니다.”
클로이는 욕실 문에 기댄 채 목청을 돋워주었다. 황태자 궁을 벗어나 황제가 쓰는 본궁으로 온 것까진 좋았는데 레이얼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상처 치료를 해야겠으나 당장에 목숨이 오락가락할만한 상처는 없었으니 목욕이 먼저다 싶었다. 검댕과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꼴로 치료를 받아봤자다. 그런데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레이얼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씻어야지. 손 놔요.’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아.’
‘폐하. 그 꼴로 다닐 거야?’
‘난 상관없어.’
‘난 싫으니까 씻고 와주면 좋겠어.’
‘그럼, 같이 들어가는 건 어때?’
레이얼은 뒤늦게 불안감에 떨었다. 이 밤 목숨을 잃을 뻔했고, 눈앞에서 화살을 맞을 뻔한 클로이를 보지 않았나. 어째 덤덤하게 잘 넘긴다 싶었건만. 이제와서 코끝까지 들이닥쳤던 죽음을 실감할 건 뭐람. 클로이는 진지한 얼굴로 같이 들어가서 씻고 싶다는 레이얼의 말에 그를 후려치지 않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 했다. 제아무리 놀랐다 한들, 이건 안될 소리지. 클로이는 이런 쪽으론 아주 엄격한 편이었다.
‘나와 함께 욕실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시녀뿐이야.’
‘그럼 목욕시중을 들어주지.’
꽉 쥐어진 주먹이 금방이라도 그의 매끈한 뺨으로 날아들 것 같았다.
‘이따 황의가 오면 반드시 폐하의 머리도 살펴달라고 할 테니, 일단 들어가서 씻어주겠어, 폐하?’
아득. 이를 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나. 내내 매달리던 레이얼이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그 뒤로는 내내 이 상태다.
“클로이.”
“여기 있습니다. 폐하.”
나 여기 있다고 오백 번쯤 더 외쳐주면 끝날까. 클로이는 눈을 끔뻑이며 작게 하품을 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정말 굉장한 하루였다.
“폐하. 씻고 있는 거 맞죠?”
“그럼. 넌 거기에 있는 거 확실하고?”
“그럼, 그럼.”
대충 대꾸하며 클로이는 또 한 번 하품을 했다. 레이얼은 모르겠지만, 아니 알고는 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못 하는 쪽이려나. 클로이는 북부령에서 눈길을 타고 무려 나흘 만에 주파해서 수도에 오자마자 이 난리를 겪었다. 정말 힘들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제 와서 팔다리가 흐물흐물해진다. 팔다리에 돌덩이 하나씩 달고 끝도 없는 수렁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클로이는 붉어진 하늘가로 시선을 매어둔 채 또 한 번 목소리를 내주었다.
“폐하, 따갑다고 건성으로 씻지 말고 싹싹 씻으세요. 안 그럼 이따 소독할 때 배로 아파요.”
“그럼, 그럼.”
기분 탓일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느긋해졌다. 따뜻한 물이란 그런 거지.
“하암.”
클로이는 하품 끝에 찔끔 난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방금 로지가 왔다.
“싹싹 씻으시라고요.”
잠깐 시간을 벌려는 욕심에, 레이얼에게 한마디 더 외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오해할 것 같아요.”
창밖의 나무를 딛고 선 로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해는 무슨, 검댕이 잔뜩 묻었는데 안 떨어지려고 해서 욕실 앞을 지키는 거야.”
“……이후 일정은요?”
“이후 일정? 그건 내가 물어야지. 그림자 기사단원들은 어떻게 됐어? 다들 귀택했나? 크게 부상 입은 사람은 없고?”
“사소한 부상은 좀 되지만 치명상은 없고요 아직 봉문을 풀어주지 않으셔서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전……아니 폐하께서 봉문을 풀어주시면 기사들은 귀택할 예정이고요. 전 미리 돌아가서 준비를 해둘 거고요.”
“좋아. 그럼, 배불리 먹고 쉴 수 있게 준비 좀 해줘.”
“아가씨 몫도요?”
“……왜 이래. 내가 멀끔해 보여도 간밤 열심히 뛰었어. 몰라서 그렇지 아주 힘들었다고.”
클로이의 말에 로지가 문득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폐하의 고생길이 눈에 훤해 전 갑자기 마음이 몹시 흡족해졌어요.”
“뭐? 지금 내 욕한 거야?”
“그럴 리가요.”
“거짓말 하지……!”
빙글거리는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얄미웠다. 클로이가 막, 한마디를 더하려는 순간 욕실에서 그녀를 찾는 레이얼의 목소리가 울렸다.
“로이! 거기 있지?”
“가보세요! 그럼 나중에 뵈어요!”
“알았어!”
간다 간다. 클로이는 냉큼 욕실 앞에 앉아 능청스럽게 목청을 돋웠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계속 말한다고 늦는 거 아니야?”
“싹싹 씻으라며.”
“알았어. 싹싹.”
로지도, 기사들도 괜찮다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이젠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녹작지근해진다. 클로이는 욕실 문에 기대앉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붉게 물든 하늘을 가르고 올라오는 태양이 너무도 눈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로이?”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레이얼은 가져다 두었던 셔츠 대신 가운만 대충 걸친 채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이런!”
그는 문을 당겨 열자마자 뒤로 쓰러지는 클로이를 받았다.
“로이?”
손아귀에서 부드럽게 늘어지는 가는 몸.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심장이 얼음물에 처박히기라도 한 듯 전신이 싸늘해졌다.
“로이? 로, 로이.”
레이얼은 얼굴이 희게 질려선 쓰러진 로이를 잡아당겨 안았다. 상처가 없는 건 알고 있었는데. 불러도 모르고 늘어진 모습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태연한척하던 그의 레이디가 말이다. 또, 숨긴 건가. 낭패감에 심장이 옥죄는 기분이 들며 숨이 막혀왔다. 레이얼은 클로이를 안은 그대로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어디든 축축하면 곧장, 황의를 부르려는 생각이었는데 허리께를 쓸며 상체가 바짝 붙던 순간 너무도 익숙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새액. 길게 늘어지는 평온한 숨소리. 일루미넴을 먹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졌을 때 들려주던 바로 그 숨소리였다. 레이얼은 그제야 온몸에 더운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안도감이 이렇게 자극적인 거였나. 손발 끝에 전기가 올라 찌릿찌릿하다.
“하…….”
한숨을 터트린 레이얼은 그대로 클로이를 안아 들곤 침대로 향했다. 내내 불안하고 걱정했으면서 정작, 클로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진 깜빡하고 말았다. 북부령에서 막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내 말을 달려 왔을 텐데, 쉬지도 못하고 이 밤 내내 황궁을 헤집고 뛰어다녀야 했다. 내쉬와 캐서린 황후도 찾지 못했던 인장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곳을 얼마나 절박하게 뒤졌을까. 새삼 그 처절했을 마음이 떠올라 착잡하고 고맙고 애틋하다. 레이얼은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클로이를 침대에 내려주었다. 황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온몸이 먼지투성이이기도 했지만, 레이얼은 맹세코 오늘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못 본 것 같았다. 피어나는 햇살을 두른 채 잠든 클로이는 옅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착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 모습이 전설 속에서 말하는 여신 같기도 했고, 동화책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요정 같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세상을 등질 생각을 했다니. 자신은 미쳤던 게 분명하다. 레이얼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클로이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따끈하고 보드라운 피부에 입술이 뭉개지듯 눌리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점잖게 남기려던 입맞춤은 이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잦아졌다. 쪽, 쪽. 깊게 잠든 클로이가 눈을 뜰 정도였으니, 얼마나 집요했는진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어? 언제 나왔어?”
피로에 전 여자는 동공이 풀려 까만색에 가까운 눈을 하곤 물었다.
“방금.”
“아, 그럼 나도 좀 씻을까.”
“자고 일어나서.”
“싫어. 찝찝하단 말이야.”
“그럼, 시녀를 불러주지.”
“됐어.”
아이그, 침대가 더러워졌잖아. 툴툴거리며 일어난 클로이는 제가 휘청거리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레이얼은 작게 한숨을 쉬곤 설렁줄을 당겨 목욕 시중을 들 시녀 둘을 불러들였다. 어째서 둘이었느냐면.
“도중에 잠이 드셨는데 일어나지 않으셔서…….”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랄까. 빨개진 얼굴로 클로이를 업고 나온 시녀를 치하하며, 레이얼은 곧장 그녀를 건네받았다. 잠은 들었을지언정, 시녀들은 클로이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씻겨 데리고 나왔다. 침대보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두었으니 이제 다시 눈을 뜬대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진 않으리라. 시녀를 내보낸 후 레이얼은 무척 만족한 표정으로 클로이를 안은 채 누웠다. 밤 내내 검을 휘두르느라 그 역시도 정말 딱, 죽을 것같이 피곤했다. 게다가 이건 잠깐의 휴식이 될 것이다. 아주 잠깐의. 간밤의 일을 수습하려면, 그는 한동안 꽤 바빠지리라. 그러니 얼른 자야 했는데 금방 잠이 들 거라는 생각과 달리 레이얼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정말로 겁쟁이가 되어버린 건지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봐. 사실은 수십 개의 검이 쏟아지던 순간 자신은 이미 죽어버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착각하는 걸까 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에 누가 모래를 한주먹씩 뿌려놓은 듯 쓰라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던 그때, 그는 문득 클로이의 어깨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아차 했다. 씻고 나서 대충 붕대로 손을 감아두었더니 지혈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었다.
“황의를 잠깐 부를까.”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손바닥 가운데를 솜씨 좋게 뚫어둔 덕에 움직인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뻥 뚫린 상처의 고통만은 선명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클로이가 뚫어준 구멍. 화살이 지나가고 남은 자리엔 인장이 남아 있었다. ‘꿈’이 아닐까 두려워서 했던 남자는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러자 안도감 뒤로 찾아든 피곤이 해일처럼 일어 그를 덮치려 했다. 하지만 레이얼은 무겁게 감기는 눈에 힘을 준 뒤 설렁줄을 당겨 황의를 불렀다. 이게 꿈이 아니니까. 눈을 뜨고 나서 클로이가 손을 보게 되면 미안해하고 걱정할 테니까. 그가 툭툭 떨어지는 무거운 눈꺼풀을 끝까지 버텨 치료를 받은 건 그래서였다. 품 안을 채운 이 어여쁜 분이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상처 받을까 봐서.
“어떤가?”
진찰을 마치고 손등과 손바닥에 세 바늘씩 꿰맨 의사에게 레이얼이 물었다.
“정말 운이 좋으셨습니다. 힘줄과 뼈 아무것도 상한 게 없이 그저 살만 뚫려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운이 아니라 솜씨가 좋았지.”
“예?”
“자국은?”
“베인 정도가 아니라 관통할 만큼 깊은 상처라 흉은 남을 것 같습니다. ”
“수고했네. 나가보게.”
간단한 손짓으로 황의를 물린 레이얼은 이번에 시종장을 불러 정오를 기해 봉문을 풀어두라 지시를 내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주변을 모두 물린 레이얼이 잠든 클로이를 당겨 안고 속삭였다.
“이제 자도 돼.”
“…….”
“그리고, 이거…….”
잠든 클로이에게 붕대에 감긴 손을 들어 보인 레이얼이 작게 웃었다.
“이건 흉이 아니라 훈장이야. 황제가 되기 위해 고된 날을 보내고 얻은 훈장. 그렇지?”
네가 남긴 것이 흉일 리가 없잖아. 쪽. 레이얼은 작게 웃으며 곤히 잠든 클로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에 그의 눈꺼풀이 감기며 숨소리가 늘어졌다. 색색거리는 두 숨소리가 따스한 햇살을 타고 느릿하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