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그대가 씌워 준 황관2021.09.10.
“아니, 전하가 이리 와.”
“폐하라니까. 그대가 씌워 준 황관을 잊은 거야?”
피범벅인 손으로 굳이 텅 빈 머리 위를 가리킨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서라고는 하지만, 레이디는 수도를 뒤집었던 도둑이었다. 그건 평생 아르네 공녀를 따라다닐 꼬리표가 될 것이었다. 레이얼은 지금 그것을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황관을 내린 것이 바로 그 레이디라는 명분으로. 이미 숱한 말장난에 스러졌지 않았던가. 웃기지도 않은 명분이 사람을 얼마나 무섭게 옥죄는지 레이얼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뻔히, 황위 찬탈을 하려는 게 보이는데도 ‘황제’에 위해를 가한 범인을 잡겠다는 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니, 그도 그의 피앙세를 똑같이 지킬 작정이었다. 황후가 즐겨 쓰던 그 방법으로.
“정말이지, 우리 폐하께선 계산이 확실하시다니까.”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이는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쿵. 무섭게 자라난 화마를 못 이기고 무너져내리는 궁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시 한번 발끝을 타고 울리는 진동이 선명하다.
“그럼, 내게 씌워 줘야 할 관이 있는 것도 잊지 않았겠지? 그러니, 이만 이리 와.”
“오라고 부르는 거야?”
재촉하듯 잡아당기는 손길이 의미를, 태양을 담은 듯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눈에 담긴 초조함을 뻔히 보며 레이얼은 되물었다. 맞잡은 손이 가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리 와. 어서.”
작은 손에 뼈마디가 도드라지게 힘을 줘 잡아당긴다.
“네. 부르시니, 가야지요.”
레이얼은 클로이를 따라 발을 떼며, 공손하고도 단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목청이기도 했다.
“누구의 말씀인데.”
저벅. 크게 뗀 걸음에 단번에 곁에 선 레이얼이 당연하게 클로이를 이끌었다. 보여주기는 끝났다. 황제인 자신이 이토록 극진히 모시는, 레이디. 이곳에 남겨진 수백의 인원이 보았으니 충분했다. 몇 걸음인가 걸었을까. 쿠웅. 묵직한 굉음과 다시 한번 발끝을 타고 진동이 전신으로 번진다. 황태자궁은 무너지고 있었다.
“빨리 와 전하.”
클로이는 거리가 좀 떨어졌다고 생각하자마자 초조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까도 내, 내가 오라고 했잖아.”
목소리가 그를 붙든 손보다 가냘프게 떨린다.
“그런데 말장난이나 하고. 위험하게 말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기나 해?”
“그러게.”
잘 걷던 레이얼이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클로이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순식간에 그에게 잡혀 몸이 돌아간 클로이는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레이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내가, 그대는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고는 있어?”
“나? 뭐……?”
인장 때문인가?
“화살에 맞았으면 어쩔뻔했어?”
“아…….”
그제야 클로이는 아까 내쉬와의 대치를 떠올렸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켜보는 레이얼은 놀랐을지도 모른다.
“아?”
레이얼은 숫제 약 오른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목 아래를 울려내는 목소리가 낮고도 위협적이다. 하지만, 레이얼은 알까. 진심으로 분노하는 모습에서 가리지 못한 진득한 애정이 느껴져 그가 몹시 귀여워 보인다는 걸. 클로이는 흥분에 겨워 제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쥐고 있는 레이얼을 보며 마치 아프기라도 한 듯 ‘아!’ 하고 짧게 소리쳤다. 눈짓으로 잡힌 제 어깨를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남자는 제 실수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떼곤 안절부절못했다. 이것 봐. 귀엽잖아. 클로이는 웃지 않으려 몹시 노력하면서, 그에게 잡혔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아…….”
“로이, 미안하다. 내가 그만 정신이 나갔지.”
허둥거리는 목소리라니. 더 이상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클로이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가렸다. 푸들푸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전신이 떨렸다. 긴장과 희미한 불안은 이미 온 간데없었다.
“로이, 로이. 응 미안해. 아깐 내가 너무…….”
“……해줘 그럼 용서해줄게.”
“그래.”
“해 줘 그럼.”
클로이는 고개를 들어 입술을 뾰족이 모아 내밀었다. 생글거리는 미소가 가려지지 않아 수시로, 입술이 풀렸지만 클로이는 꿋꿋했다.
“오애?”
입을 모아 중얼거리느라 ‘뭐 해?’ 발음이 바보처럼 울렸지만, 상관없었다. 마주한 남자의 얼빠진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고, 찰나에 진득하게 바뀌는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으니까. 쪽. 잔뜩 부르튼 레이얼의 입술은 거칠었지만, 역시 떨어지는 건 아쉬웠다. 클로이는 발끝을 세워 멀어지는 그를 따라잡았다. 쪽쪽. 잠깐사이 두 번이나 쪼는 소리에 레이얼의 눈이 동그래지나 싶더니, 이내 부드럽게 감겼다. 그리곤 조금 전은 마치 착각이었다는 듯 몹시 농밀하게 숨을 얽어왔다. 거칠고 보드랍지 못했건만 점막을 뭉개버릴 듯 강하게 겹쳐오는 순간, 익숙한 추락감이 뇌를 관통했다. 발끝이 허물어지는 것 같고 등줄기를 할퀴어내리는 전율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절로 신음이 터질 만큼 아찔한 감각에 클로이는 맞잡은 그의 손을 힘줘 움켜쥐었다. 허덕이는 클로이를 배려하듯 잠깐 틈을 벌려준 레이얼이 자신을 갈고리처럼 잡아대는 손을 풀어 제 목에 감으며 속삭였다.
“잡아. 꽉.”
젖은 입술을 미끄러뜨려 겹쳐오는 남자의 눈은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린담.”
캐서린은 생각보다 길어지는 대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잘근 잘근 씹었다. 내쉬에게 붙여준 병력은 어마어마했다. 급하게 끌어모으느라 정예라 부르지는 못하겠으나 그래도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가 아니겠나. 다소 실력은 떨어지더라도 절대 부족하진 않았다. 기사를 끌어모으느라 퍼부은 돈이 얼마던가. 허전한 목을 손으로 쓸며 캐서린이 작게 웃었다. 돈이 될만한 것은 죄다 쓸어 넣었기에, 지금 그녀는 그 흔한 목걸이 하나 반지 하나 가지고 있지 못했다. 황제는 늘 그런 자신에게 귀여운 시위를 한다며 무안하지 않게 타박하며 새로이 장신구를 보내주었다.
“…….”
문득 캐서린은 몹시 외롭고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간소하다 못해 이 추레한 모습을 보고도 내쉬는 빈말로라도 아는 체해주지 않은 게 이제야 생각난 탓이었다. 황제라면 날 이렇게 두지 않았을 텐데. 고운 목덜미가 어쩌면 이렇게 휑하냐며, 뭐가 됐건 반짝이고 예쁜 것으로 걸어주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내내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향초 연기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침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잠든 듯 누워있는 황제가 보인다.
“패트릭.”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캐서린이 작게 속삭였다.
“패트릭.”
그날 밤 왜 그랬던 거예요. 항상, 다 들어주었잖아요. 언제나 무안하지 않게, 통박 놓으며 다 들어주었잖아요. 안 된다고 거절할 때도 날 비참하게 만들진 않았었잖아요. 그날 조금만 더 좋게 말해줬으면 좋았잖아요. 날 버러지 보듯 하지 않고, 좋게 말해주었다면. 윽박지르지 않았더라면……. 캐서린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께로 걸음을 옮겼다. 패트릭이 숨을 거둔 후 실수로도 근처에 가지 않던 침대였다.
“패트릭.”
부연 연기 사이로 그가 보인다. 끔찍한 몰골일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캐서린은 쾅, 하고 요란 소리를 내며 무언가 제 속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건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 눈에 익도록 봐온 익숙한. 익숙한…….
“패트릭, 시오도르…….”
사랑하는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주제를 지키라며 자신을 을러대던 황제가 아니라, 귀여운 분이라며 웃어주던 남자가 하얗게 세 누워 있었다.
“맙소사.”
독을 마시고 쉴 새 없이 피를 토해냈기에 풍기는 썩은 내가 아니었다면 잠들었다고 믿을법한 모습. 그제야 캐서린은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감했다.
“폐하?”
‘폐하. 차 한 잔 하시겠어요?’
눈이 돌아 그에게 독을 건넸다. 제 아들은 언제나 눈 끝으로도 담아주지 않는 모습에 눈이 돌아버렸었다. 저를 남들처럼 경멸했기에 정신이 나가버렸다.
“아아…….”
캐서린은 작게 앓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분노하며, 그에게 제 손으로 독을 먹였더랬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자신을 위협하던 황제가 아니라 저를 귀여워해 주고 사랑해주던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백 번의 밤. 수천 번의 낮. 그와 함께한 세월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귀여운 분.’
언제나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며 웃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캐서린은 그제야 자신이 무얼 잃었는지 깨달았다. 여전히 그날 밤의 일은 패트릭 시오도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저 역시 잘하지 않은 것 같다는, 그야말로 미약한 후회가 가슴에 동그랗게 맺혔다. 문득 시야가 일그러진다고 느낀 순간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명이 아니었다.
“무슨…….”
캐서린이 고개를 돌리자 침실문을 열고 들어선 근위대 기사들이 있었다. 찰랑찰랑 차올랐던 감정이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과 함께 단번에 기화했다. 캐서린은 젖은 눈꼬리를 빠르게 닦아내곤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내쉬는?”
그녀의 질문에, 뭉쳐진 기사들 틈으로 근위대장이 나섰다.
“……모시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아하니 일이 해결된 모양이었다. 캐서린은 그 모습에 짜증스럽게 부채를 팔랑였다. 진작부터 이러면 좀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제가 쓸데없이 감상에 젖을 이유도, 이 냄새를 며칠째 참고 맡을 이유도 없었을 텐데.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쯧. 혀를 찬 캐서린이 부채를 접어 손바닥을 탁, 소리 나게 두드렸다.
“앞장서렴. 우리 황자님. 아니 우리 폐하를 기다리게 해서야 될 일이겠나.”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기사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꼭, 웃음을 참는 것같이. 캐서린은 저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황후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연회장에 들어설 때면 귀부인들이 부채로 가리는 시늉을 하며 곧잘 보여주었던 표정이었다. 비웃음. 주제 모르고 나선 변방 출신의 황후라고 업신여길 때 종종 보았던 그 표정 말이다. 캐서린은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차올라 발끈한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표정이야!”
썩은 내와 향초 향이 잔뜩 뒤엉킨 침실을 쨍하니 울리는 목소리가 자못 표독스러웠다. 그런데, 겁을 먹긴커녕 실실 웃으며 기사 하나가 다 들리게 근위대장에게 중얼거렸다.
“대장, 가엽잖아요. 빨리 말해줘요.”
말없이 서 있는 근위대장의 모습에 기묘한 불안감이 차오른다.
“무슨 일이지? 빨리 대답해!”
근위대장은 그녀를 향해, 조금 전보다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죄인을 압송하라는 레이얼 폐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뭐? 방금, 뭐, 뭐라고?”
근위대장의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내쉬! 우리 폐하는 내쉬…….”
잔뜩 흥분한 어조로 ‘내쉬’를 찾던 그녀는 갑자기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돌연 쓰러져버렸다. 버겁도록 기가 막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었다.
“……어쩌죠? 그래도 ‘전황후’인데 기사들이 손대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시녀를 불러와라.”
쓰러진 캐서린을 두고 처우를 논하는 기사들의 목소리엔 요만한 온기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침대에서 풍기던 시취를 맡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