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살아 남아주길 바라2021.09.03.
지금 이게 무슨……. 황후가 황제를? 쿵쿵쿵. 끔찍한 소리에 클로이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향초를 꺼내 태우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황후의 모습엔 조바심 따윈 없었다. 속사정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향유병을 깨뜨렸을까 하는 정도의 여유로움이었다. 결코 제국의 황제를 시해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저 느긋함.
‘진짜 미쳤어.’
입을 틀어막은 클로이는 작은 소리 하나라도 샐까 봐 숨을 끊어 쉬며 눈을 굴렸다.
“그런데 좀 아쉽긴 하네요.”
죽은 사람에게 말하지 마! 무섭단 말이야. 황후는 정말 미쳤나 봐.
“당신이 그렇게 아득바득 쥐고 있던 그 황좌. 그 자리가 눈 끝으로도 봐주지 않던 우리 황자님이 거머쥐는 걸 보았어야 했는데.”
고요한 밤. 코끝을 스치는 겨울바람엔 썩은 내와 향초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태생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작은 웃음소리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따위 건 돈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금, 내가 돈으로 산 기사들이 우리 황자님에게 ‘황좌’를 바칠 거예요.”
흥얼거리며 속삭이는 캐서린 황후는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내쉬가 기사를 몰고, 레이얼을 제거하러 갔으니까. 자신의 말처럼 돈으로 산 기사가 그녀를 위해 오늘 죽도록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까. 곧 온 세상을 제 발아래 둘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저 입이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마구 떠드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서린 황후는 모르는 게 있었다. 아직, 내쉬는 황제가 아니었고. 결코, 레이얼은 죽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아르네는 그들의 시오도르를 반드시 지키고 말 거라는 것을. 클로이는 이 미친 소리에 제 귀가 더 더럽혀지기 전, 가만히 몸을 빼냈다. 경악은 심호흡 몇 번에 말끔히 가셨다.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건 이미 오래전 끝나버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 그러니까.
“황금으로는 살 수 없는 긍지를 보여드려야겠네.”
이백여 년의 세월 동안 단 일 센티도 늘어나지 않은 영지. 단 한 번도 사사로이 빼 들지 않았던 검. 척박한 북부에 자처해 틀이 박힌 채, 매년 유서를 쓰고 나가 괴수를 잡는 아르네의 긍지를. 긍지를 논하는 황후는 알고 있을까. 황실에서 승전 연회를 열어주었던 그 날. 충성을 맹세하던 클로이 아르네는 단 한 번도 시오도르, 황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단 것을. 그날 클로이가 조아린 건 황제도, 그 옆에 선 황후에게도 아닌 제국이었다. 그러니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기사의 긍지도 살 수 있다고.
“흥.”
그렇게 자리를 빠져나온 클로이가 황후궁 담장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바라본 하늘은 새빨갰다. 황태자 궁이 아침을 맞을 수 있을까 싶게 큰 불이었다. 온 하늘이 붉어 보이고 아릿한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불에 한숨 같은 탄식이 절로 터진다.
“하…….”
울컥,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아 클로이는 훌쩍 뛰어내려 황태자 궁으로 달렸다. 레이얼의 궁을 빙 돌아 호위하듯 서 있는 것은 근위대였다. 클로이를 발견한 이들이 ‘레이디!’라고 외치며 발검했으나, 근위대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허공을 가른 칼이 텅 빈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둔탁했다. 퍽! 그 모습에 클로이가 새된 웃음을 터트렸다.
“긍지를 팔아먹고 길롯의 개가 되었다더니, 땅을 기어다니는군?”
서늘한 조롱에 기사들의 표정이 단번에 흉흉해졌다.
“누가-!”
그중 하나가 포악한 소리를 내지르며 클로이에게 달려들려던 그때였다.
“개는 주인에게 돌아갔지.”
무뚝뚝하게 생긴 남자가, 기사를 붙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척 보기에도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으나 강직한 눈매와 굵직한 얼굴선이 그를 퍽 무게감 있게 보이게 했다.
“……그럼, 남은 건?”
“보시다시피 기사.”
남자는 쥐고 있던 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보통 기사들이 쓰는 것이 아닌 투핸드소드였다. 그렇게 근육이 튼실해 보이진 않았는데 저 무거운 걸 레이피어처럼 돌린다고? 클로이는 남자를 빠르게 훑으며 한발 살짝 뒤로 물러섰다. 남자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얕은 도발에 넘어오지 않을 만큼 영리했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마냥 참을 머저리 같지도 않았다. 이런 유형이 상대하기 제일 짜증 나는데. 쉽게 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 그만큼의 크기로 호승심이 솟았다. 남자의 다갈색 시선은 황실을 드나들며 본 것 중 가장 맑고 제일 반듯했다.
“모르는 척하라고 하면, 눈 감아 줄 건가?”
“뭘?”
“나.”
남자는 클로이의 말에 가볍게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깊게 꽂으며 입을 열었다.
“무얼 하러 왔지?”
가볍게 묻지만, 더없이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건 기회다. 남자는 저를 덮어놓고 공격하지 않았다.
“……물건을 좀 주웠지.”
“물건을…….”
“주웠어.”
남자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건 찰나의 고민이었을까. 아니면……. 여차하면, 남자의 뒤에 포진한 기사들에게 단검을 날리고 몸을 내뺄 생각으로 클로이는 손을 슬그머니 허리께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제 일신의 위협에 굴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땐 비열하게 주변을 공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후끈했고, 귓가를 울리는 병장기 소리는 끈질겼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돌려주려고?”
막 단검을 움켜쥐려던 찰나 때맞춰 남자가 물어왔다.
“단장, 레이디예요. 하루가 멀다고 귀족가를 털어대던 도둑놈이요.”
개라고 조롱하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나올법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슬리지 않는 건 아니다. 클로이는 바짝바짝 타는 속을 감추려 입매를 밉게 비틀었다.
“분명 기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위아래도 없고 감히 단장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질 않나, 그거로 부족해 단장에게 무려 충고까지 한다고?”
“……물러서게.”
남자는 얼굴이 벌게진 기사를 물리고 다시 물었다.
“돌려주려고?”
“주인을 아니까.”
“주인을 안다고…….”
“당신도 나도 아는 명백한 주인.”
“…….”
여태 짧게나마 대화를 이어가던 남자가 불현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였다. 무서운 소리와 함께 바람이 몰아쳤다. 날개뼈 있는 곳이 따끈하게 달궈질 만큼 뜨거운 온도에 뒤를 돌아보니, 황태자 궁을 잡아 삼키던 불길이 더 거대해져 있었다. 클로이는 열풍과 함께 남은 인내심도 모조리 타버렸음을 인정했다. 허리띠에 박아둔 단검을 빼든 클로이는 곧장 남자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셋. 세 명 정도 쓰러뜨려 놓으면 저 녀석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겠지? 어림을 끝낸 그녀가 티 없이 단검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던 그때. 남자가 땅에 박아둔 검을 뽑았다.
“근위대는, 황제의 명에만 따르지.”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
“폐하께서 그대를 잡으란 명을 내려주지 않으셨으니, 기다릴 수밖에.”
귀족 놈들. 클로이는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못 본 체해주마 하는 소리를 이따위로 길게 하다니. 네 주인, 인장 기다리다 숨넘어가겠다.
“그대는 혀를 좀 접어두는 법을 배워야겠어.”
눈감아 주는 건 고마웠지만, 미적거리는 건 별로였다. 그를 타박하듯 새치름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고 몸을 돌리려던 차 묵직한 목소리가 클로이를 붙들었다.
“하지만, 주인이 부르신다면 바람처럼 달려가겠지요.”
“…….”
그의 말에 클로이의 시선이 화려하게 불길을 피워내는 황태자 궁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귀경의 말을 믿어보지. 부디, 청력이 좋길 바라오.”
대답을 기다릴 시간 같은 건 없었다. 훌쩍, 황태자 궁 안으로 뛰어들자 복면 사이로 스미는 공기가 뜨끈했다.
금방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겨우 스무 명이지 않았나. 백여 명의 기사를 비등하게 받아내는 저것들은 대체 뭐지? 다섯 배의 전력 차라는 것은 수치상의 이야기다. 실제로 저것을 감당해야 하는 기사에겐 열 배 스무 배의 부담이 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황태자 궁의 직속 기사들도 아닌 것들이 이걸 버틴다고? 급하게 끌어모은 기사인데, 레이얼에게만 꼭 저렇게 유능한 것이 붙는다고? 어떻게 매번 이럴 수가 있나! 내쉬는 끝까지 자신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이를 아득 물었다. 하나 저들도 사람이었다. 괴물같이 버티고 있으나, 하나씩 낙오되고 있다. 백 명 중 네 명이 쓰러지는 것과 스무 명 중 네 명이 쓰러지는 건 엄연히 그 무게가 다르다. 그러니까 이건 시간 싸움이다. 사람이라면 지치는 게 당연하니까. 한계는 분명히 있는 거니까.
“뭐 하는 건가! 저쪽은 고작 스무 명뿐인데!”
내쉬는 주춤거리는 기사들에게 신경질 내듯 목청을 돋웠다. 이 머저리들이!
“누구든 저것의 목을 잘라 오는 자에겐, 작위를 내리겠다!”
일순 기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실, 이런 일에 끌려올 정도라면 기사라고는 해도 귀족가의 차남, 혹은 삼남으로 작위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후계를 보내겠나. 가서 결과가 좋으면 가문의 영광이 될 테고 결과가 나쁘면, 서임을 받아 기사로 나가버렸다고 꼬리를 잘라버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작위’를 준다고?
“전승 작위를 주지.”
열풍을 타고 흐르는 내쉬의 속삭임이 악마처럼 교활하고 달콤했다. 내쉬쪽 기사들의 기세가 열풍과 함께 무섭게 일어난 건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결이 다른 악랄함이 깃드는 것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레이얼은 그 모습에 옅게 웃었다. 팔다리가 남의 것인 양 감각이 없었다. 쉴 새 없이 휘두른 어깨는 금방이라도 똑,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 것 같았다.
“하…….”
“뒤로 물러나시지요.”
무섭게 달려드는 내쉬의 기사를 보면서도 아르네의 기사들은 덤덤하게만 굴었다.
“무섭지 않나?”
“어디 괴수만 한 게 있으려고요.”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대답이 여지없이 가벼웠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까지 그럴 테다.
“함께해줘 고마웠다. 하지만, 이만 뒤로 물러나지.”
레이얼은 자신을 보호하듯 둘러싼 기사들을 불렀다.
“아르네는 이미 충분했어.”
괜한 목숨을 스러지게 할 이유는 없잖나.
“이제 더는…….”
나직한 레이얼의 이야기가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모르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더 버텨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 죽는 건 개죽음이었다. 죽어서 얻는 것 역시, 불명예뿐.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아르네의 기사, 바로 시오도르와 등을 맞대었던 바로 그 아르네의 기사라는 것을. 그래서 기사들은 레이얼의 말에 물러서는 대신 지친 팔다리를 다그치듯 힘을 줘 몸을 바로 세웠다.
“저희들은 아르네의 이름을 이었습니다.”
“알아. 그래서 살아남아 주길 바라네.”
시오도르가 사라질 이 제국을 아르네라도 남아 보살펴야 할 테니까. 다정하고도 결연한 레이얼의 말에 그림자 기사들은 일순 말문이 막혀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훙-. 화염을 타고 몰아치는 열풍이 뺨을 따갑게 스치는 사이로 청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하!!!”
끝을 예감한 후 내내 단정하던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깨지고, 미간이 일그러졌다.
“오지 마!”
이미 그들에겐 수십 개의 검이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