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이기적인 어리광쟁이2021.08.31.
“정말 구역질 난단 말이야.”
거의 한 시간째 이어진 난전 끝에 상황이 서서히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달은 훌쩍 기울었고, 밤은 지독히 깊어졌다.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던 날 선 병장기 소리도 잦아들었고 많은 숨도 사그라들었다. 내쉬는 제 검을 털며 차게 읊조렸다.
“지금 제가 죽게 생겼는데, 누굴 살리겠다고 검도 제대로 안 써?”
철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구둣발이 질척한 것을 밟으며 젖은 소리가 울렸다.
“고결한 척, 자애로운 척. 척, 척! 정말 지겨워 죽겠어.”
레이얼의 기사들은 무척 끈질겼다. 급하게 어디서 끌어온 티는 났는데, 하나같이 악착같다고 해야 할까? 지금도 핏물이 흥건한 손으로 자신의 바짓단을 붙드는 기사를 내쉬가 신경질적으로 차버렸다. 제대로 붙들지도 못할 만큼 엉망이 되어서도. 제 핏줄도 아니고. 제 긍지도 아닌데. 저깟게 뭐라고 목숨을 걸어가며 이렇게 발악을 하는 거야!
“죽여버리십시오! 빨리!”
검상을 입은 오른팔을 감싸 쥐고 뒤에 숨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길롯 백작을 보자니, 더 짜증이 난다. 자신에겐 늘 이따위 것만 주어졌다. 남들이 보기엔 넘치도록 화려하고 거대했겠지만, 실상은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기생해 단물을 빨아보려는 저 버러지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을 황좌에 올릴 수 있는 유용한 패쯤으로 생각하는 모친이며, 늘 자신을 미친개쯤 취급하며 벌벌거리는 아랫것들까지. 그 누구 하나 자신에게 진심인 건 없었다. 그런데 언제나 핍박받고 있다는 저것에게 주어진 건 어째서 이렇게나 탐스러운가. 저것 때문에 딸을 잃고도 충성을 맹세하는 미친 작자들이 여섯. 제 딸을 잡아먹었다는 말을 듣고도 마지막 순간에 혈육이라며 기꺼이 손을 내미는 후작에. 비실거리는 보좌관은 일주일을 악으로 버티며 제 주인을 지키려 하지 않았나?
“하…….”
어쩌면 이렇게 불공평할까? 내쉬는 어쩐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레이얼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데도, 그는 핏물에 절어서도 절대 궁색해지지 않는다. 항상 그랬다. 황후가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으로 자신을 입히고 먹여도 레이얼의 앞에만 서면 초라해졌다. 몇 번쯤 으스대듯 자랑도 해보았다.
‘어때요? 5캐럿에 브릴리언트 컷이래요.’
‘잘 어울리는구나.’
그에게 주어진 예산은 언제나 빠듯했기에, 크라바트를 고정하는 브로치는 언제나 무늬도 없는 핀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다이아몬드를 물려 화려하게 꾸민 브로치를 한 자신보다 기품 넘쳐 보였다. 아아, 천박하게 빛나던 다이아몬드의 광채라니. 그날의 모멸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쉬는 자신이 어째서 움츠러들었던 건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정하고, 기품있는 의붓 형의 옆에 천박하게 번쩍이던 제 꼴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느낀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찰나에 스치고 지나간 황제의 시선. 그는 마치 보석 감평사처럼 빠르게 값어치를 매겼다. 황제의 시선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경계조차 필요 없는 하품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기분을 누가 알까? 눈치 없이 자신을 자꾸 황제 앞에 끌어다 놓는 모자란 내 모친? 그저 굽실거리며 돈푼이나 줍고 하루살이 같은 것들에게 위세나 부리는 숙부? 그도 아니면, 날 선 자신에게 빌빌거리는 아랫것들? 아무도 모른다. 그저 모두가 자신에게 성질이 더럽다고만 할 뿐, 어째서인지는 알아봐 주지 않았다.
‘황후께서 굉장히 고심해 고르신 티가 역력한걸? 네 눈 색과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찰나에 스친 무안함, 모멸감을 읽은 그가 건넨 위안이 평생에 유일했다면 누가 믿을까.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가지지 않던 희박한 호의를 오직 그에게 품었다면 믿을 수 있겠나. 레이얼 시오도르, 그는 알았을까. 그가 ‘레이디 아르네’에 관해 물은 자신의 질문을 그렇게 차게 쳐내지만 않았더라도, 자신은 그에게 맞서지 않았을 거라는 걸. 머리 한구석이 어둑해지며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녀도 힘들었겠지.’
그날처럼 자신이 무안하지 않게 짧게라도 레이얼이 속삭여주었다면 충분했단 말이다. 그랬다면 배신감에 눈이 돌지 않았을 거다.
‘난 황태자의 피앙세예요.’
자신이 배덕한 놈이라도 되는 듯 첫 만남부터 질색하며 밀어내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거란 말이다. 무턱대고 밀어내니 흥미가 오기가 되었고 그게 결국 집착이 되고 말았잖아! 모두 너희 탓이야. 잘 있던 나를 너희가 이렇게 만들었어. 내쉬는 시큰거리며 검을 바투 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 스민 핏물이 굳어 폼멜을 쥔 손아귀가 진득하고 뻐근하다. 눈을 깜빡이는 시야로 여지없이 검을 휘두르는 레이얼이 보인다. 한껏 젖은 그의 머리칼은 은빛도 그렇다고 붉지도 않아 어여쁘게 빛나고 있었다. 갸름한 턱선을 타고 흐르는 붉은 궤적이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과, 널브러진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곳에서 그는 홀로 고아하다. 고작 이십여 명의 기사밖에 남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에겐 아직도 백여 명이나 남아 있는데도 레이얼의 얼굴에 두려움이나 절망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 빡! 그를 호위한 틈을 비집고 달려드는 기사를 레이얼이 힘있게 쳐내는 소리와 함께, 내쉬는 정신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머리가 멍하고 귀가 먹어 그만 세상에서 유리된 기분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붉고 비리고 구역질 난다.
“뭐 해! 빨리, 레이얼을 죽이라니까!”
그 순간 길롯 백작의 악다구니가 쩌렁하게 울렸다. 충견이 되어주겠다고 하더니……? 잠깐 넋 놓은 사이 더러운 본성을 드러내며 소리 지르는 백작의 꼴에 내쉬는 한숨을 쉬며 검을 고쳐 잡았다.
“저걸 죽이지 못하면 내쉬, 네가 끝장이 컥…….”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길롯 백작의 입에서 핏물이 푹, 솟아올랐다. 내쉬는 제 어깨를 뜨끈하게 적시는 길롯 백작의 핏물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검을 회수했다.
“닥쳐.”
“어떻게, 나를……읍.”
길롯 백작은 내쉬가 자신을 찔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주인도 못 알아보는 걸 계속 데리고 있을 순 없잖아.”
내쉬가 검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길롯 백작은 무너져내렸다. 철퍽. 길롯 백작이 쓰러지며 바닥에 고인 붉은 웅덩이가 사방으로 튀었으나, 내쉬는 미간을 한번 구기는 것으로 소회를 다했다.
“…….”
흠뻑 젖은 손을 터는 와중 레이얼과 눈이 마주쳤다.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레이얼의 검은 여전히 맑았다. 둥그렇게 눈을 뜬 레이얼을 보자 내쉬는 문득 웃음이 났다.
“왜 그렇게 봐요?”
“어째서?”
“어째서라뇨.”
그의 말에 레이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난 저런 버러지 같은 걸 끼고 살아야 합니까?”
내쉬는 저벅거리며 걸었다. 레이얼과의 거리는 아직 상당했다.
“제 주인을 위해서 일주일을 버티는 독한 보좌관도 없고, 제 아비와 오라비를 잃고도 ‘피앙세’를 지키겠다고 바짝 날을 세우는 레이디도 없는데…….”
처벅.
“주어진 게 온통 저런 거뿐이면 너무 했잖아요.”
내쉬는 끌 듯이 들고 있던 검을 들어 곧게 겨누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던 황후의 목소리가 어째서 이 순간 머릿속에서 맴도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하나쯤은 괜찮은 것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
레이얼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고, 욕을 하거나 그를 조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쉬는 문득 콧날이 얻어맞은 것처럼 시큰했다.
“그게 다야?”
“……그럼?”
내쉬는 고요한 레이얼의 말에 기껏 가라앉았던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레이얼 시오도르!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이기적인 어리광쟁이.”
쾅. 그의 말이 뒷머리를 후려치는 기분에 내쉬는 작게 입을 벌리고 헐떡였다.
“이기적인 어리광쟁이?”
“그래, 너. 내쉬 시오도르, 너 말이야.”
레이얼이 웃던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네 행동을 이해하라 내게 강요하고 있지 않나.”
“내가 언제.”
“소신이 없으니 ‘면죄’를 바라는 거겠지. 아닌가? 너 자신조차 이것이 죄라고 생각해서 내게 이해를 구하고 있어. 이런 걸 주군이라고 따라야 하다니 네 기사들이 딱하군.”
이어지는 말이 너무 잔인해 내쉬는 작게 숨을 헐떡이고 말았다.
헉, 헉. 클로이는 허리띠에 인장을 쑤셔 넣고는 힘껏 뛰었다. 황태자궁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불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경계병이 근무를 서고 있는데도, 아무도 불이 났다고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죄다 눈이 먼 것도 아닌데. 무려 황태자 궁에서 불이 났는데도. 이 궁 안에는 말장난에 짓눌린 머저리만 가득한 건가! 이가 아득바득 갈리지만, 한가지 위안이 되는 건 무섭도록 고요하다는 거다. 레이얼이 잘못되었다면 벌써 난리가 나도 단단히 났을 터다. 제 손에 떨어진 황관을 조용히 기뻐할 길롯이 아니지 않나. 클로이는 그림자 기사단이 레이얼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을 거라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뛰었다. 로지가 아주 화려하게 헤집어 놓은 듯 서쪽 경계가 잔뜩 흐트러져 있다. 멀찍이 유인한 건지 레이디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살짝 염려는 되지만, 클로이는 지금은 ‘인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로지는 제 스승이고 항시 저보다 훌륭했으니까. 잘 버텨줄 거라고 믿으며 무겁게 떨어지는 다리에 힘을 올려 땅을 박찼다. 경계가 느슨한 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황후궁이었다. 직선거리로는 살짝 돌아가는 셈이었으나, 황태자궁으로 곧장 달리기엔 그사이에 빼곡한 경계병이 부담이었다. 클로이는 비어 있는 본궁보다 한층 삼엄한 경계를 느끼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제아무리 위험한들 레이얼의 궁만 하려고? 정 안되면 황후라도 인질로 잡지 뭐.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
클로이는 숨을 참으며 몸을 작게 움츠렸다. 좀 쉽게 가려고 경계병이 없는 화원으로 발을 돌린 게 실수였나. 대체 어떻게 오게 된 건진 모르겠는데 클로이는 지금 제 머리 위로 열린 창문 너머가 황후의 침실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진짜 이번에 들키기라도 하면 황후를 인질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 일을 키우는 건 절대 안 되는데. 낭패감에 바짝 긴장한 클로이가 무릎걸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림자 아래로 움직이던 그때였다.
“냄새가 고약해서 살 수가 있나.”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조금 더 활짝 열렸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선이 곱다. 황후다! 클로이는 제 머리 위에서 한가로운 숨소리를 내는 황후를 발견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순간 코끝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가 스몄다. 클로이도 익히 아는 냄새였다.
“겨울이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뻔했어. 패트릭. 당신은 죽어서까지 날 너무 힘들게 하네요. 아, 머리 아파.”
역시, 죽었던 건가! 반쯤 예상하긴 했으나, 콩콩콩 가슴이 거세게 뛴다. 인장, 인장을 빨리 가져다줘야 해. 클로이가 몸을 추슬러 다시 움직이려던 그때 열린 창틈을 타고 황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이건 전부 당신 탓이에요. 알죠? 당신이 나를 그렇게 대한 게 문제야. 그러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죽일 생각까진 하지 않았을 건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