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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가고 싶으냐? (91/121)

91. 가고 싶으냐?2021.07.16.

“쿠워어어!”

귀를 찢는 포효와 함께 땅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클로이는 저를 쏘아보는 노란 눈알에 시선을 맞댄 채, 천천히 활을 들어 올렸다. 괴수에게 감히 검을 맞대보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매년, 괴수 토벌에 나서는 아르네 공작도 유언장을 쓰고 나가게 만드는 녀석이 아니던가. 클로이는 태생적 육체의 한계를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을 폄하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 아비와 오라비만큼의 근력은 낼 수 없다. 대인전이라면 ‘기술’로 근력의 차이를 메꿔볼 수 있겠으나, 상대는 괴수.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

“후우…….”

숱하게 화살을 얻어맞은 괴수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클로이의 화살통에 남은 화살도 착실하게 줄어 여분으로 챙겨왔던 것도 세 대가 남았다. 딱. 세 대. 클로이와 로지에게 남은 마지막 원거리 무기였다. 그러나 괴수가 덫에 들어오기까지 남은 거리는 아직 꽤 있다. 한 번만 더 뛰어주면 되는데, 그렇게 도발하기까지엔 부족하다. 손 끝에 피가 몰려 검붉게 되도록 시위를 쥐고 있던 클로이가 활을 내린 건 그때였다.

“아가씨?”

의외의 행동에 놀란 로지가 검을 든 채 거리를 좁혀왔다.

“로지. 엄호해라.”

“예?”

“이대로는 둘 다 위험해.”

“그럼, 제가 미끼를 하겠습니다.”

“네게 시선 한 번 안 주는데? 괴수도 미인을 알아보는 법이지.”

로지는 농담에 웃어주는 대신, 클로이의 옆구리를 잠깐 바라보았다. 괴수는 짐승이 무섭도록 본능에 충실하게 변이 한 것이다. 격렬한 움직임 끝에 속 안에서 터진 상처를, 클로이의 날숨을 따라 흩어지는 옅은 비린내를 괴수는 눈치채버렸다. 그는 절대 로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리라. 로지는 인상을 마구 구기며, 입을 열었다.

“……에반님이 주신 약은요?”

“다 떨어진 지가 언젠데.”

클로이는 얕게 숨을 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적당히 치고 빠질 거야. 엄호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넘기는 것과 동시에 클로이가 괴수를 향해 달렸다. 달리는 클로이의 모습에 괴수의 노란 눈알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집채만 한 덩치가 하늘로 날았다. 단 한 번의 도움닫기 만에 거리를 좁힌 괴수는 그대로 클로이를 찢어발기려는 듯 험한 아가리를 벌리며 앞발을 휘둘렀다.

“이크!”

클로이는 저를 향해 무섭게 날아드는 거대한 손톱을 가뿐하게 피하며 가림막 위로 몸을 굴렸다. 뒤이어 다시 짐승이 그녀를 노리며 도약하는 소리가 울렸다. 클로이는 가림막 위에서 구르던 그대로 다리에 힘을 줘 힘껏 박찼다. 마치 개구리가 뛰어오르는 것같이 볼품없는 모양새였으나, 괴수와 함께 떨어져 꼬치에 꿰이는 신세가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와중에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이 역시 날던 그대로 추락했다. 덫을 가리려 덮은 나무판자가 부서지며 클로이를 강타한 것이다.

“아가씨!”

로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어후, 후, 후우.”

클로이는 후들거리는 손끝에 필사적으로 힘을 줘 매달렸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끝을 흙벽에 박아 넣느라 손톱이 깨진 건지 손끝을 타고 계속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고통은 없었다.

“빨리 와. 로지.”

클로이는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자꾸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제 키의 두 배 거리에 빼곡하게 박힌 나무창과 거기에 꿰여 죽은 괴수가 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손을 놓치는 순간, 자신도 괴수와 같은 꼴이 되리라. 떨어지던 중간 가까스로 벽에 튀어나온 곳에 매달렸다. 운은 좋았는데, 매달린 위치는 나빴다. 로지의 손이 닿지 않는 그야말로 약이 오르는 위치였던 것이다. 로지는 뭐든 클로이를 끌어올릴 것을 찾으러 갔다. 이마를 타고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식은땀이 눈으로 타고 들어갔다. 눈알이 따갑고, 아려 절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 원 참. 이게 뭐야.”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깜빡거려 밀어낸 클로이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꼴은 그래도 잡으세요!”

“로지?”

밧줄을 구해왔나? 하던 생각도 잠시. 클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덩이 위에 보이는 로지는 거의 헐벗고 있었다. 그녀가 던진 건 망토와 바지, 그리고 셔츠까지 죄다 벗어 엮은 밧줄이었다.

“옭매듭이라 괜찮아요! 어서 잡으세요!”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얼굴 앞에서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옷으로 엮은 밧줄을 일단 이로 물었다. 길이가 짧아 밧줄은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손이 굳어, 떼는 것과 동시에 제대로 낚아채지 못하면 떨어져 죽는다. 흙과 피가 묻은 옷감을 서슴없이 입으로 문 클로이가 크게 심호흡하는 것과 동시에 손을 뗐다. 체중이 이에 실리며 턱이 빠개지는 고통을 버티며 클로이는 밧줄을 손목에 감아 야무지게 쥐었다. 양 손목에 밧줄을 감아 움켜쥔 클로이가 외쳤다.

“올려!”

딱, 턱이 빠졌는지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얼굴로 울며 그녀를 끌어올리는 로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클로이를 끌어올리자마자 벌벌 떨며, 울며 웃으며 그녀를 살피는 로지의 얼굴이 웃겨서일지도 모른다.

“로지 콧물 나온다.”

“세상에.”

쿨쩍이며 훌쩍이는 로지는 농담을 던져도 알아듣지 못하고 정신없이 클로이의 관절이며 뼈마디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속옷 차림으로 북부의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밧줄에 감아 힘이 들어가지 않고 늘어졌던 손목에 힘이 돌아오자마자 클로이는 제 망토를 벗어 로지에게 둘러주었다.

“아가씨, 세상에. 전. 세상에.”

“로지, 나 안 죽었어.”

로지는 고장이 난 괘종시계처럼 연신 ‘세상에’ 소리만 중얼거렸다. 클로이는 손을 뻗어 로지를 안아주었다. 저라도 로지가 휩쓸려 떨어졌으면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을 것 같다. 다행히 벽에 매달려 있지만 구해낼 물건이 없었다면 더 황망했겠지.

“세상에. 세상에.”

“그래. 세상에! 난 살아났어!”

“세상에.”

로지의 중얼거림이 나직해지더니 클로이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뒤늦게 클로이를 구해냈다는 것이 실감 난 모양이었다.

“로지, 조카가 이걸 보면 질투할지 몰라.”

사 년 전, 어린 조카를 구하고 나서도 로지는 울지 않았다.

“아가씨처럼 괴수와 한 구덩이에 떨어진 게 아니니까요.”

“로지…….”

“위험을 자청해야 했던 게 아니니까요.”

이번엔 클로이의 목이 메었다.

“세상에.”

그래서 또다시 세상에라고 중얼거려도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차게 언 손으로 로지의 등을 툭툭, 두드려준 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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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다른 분들께선 어떻게 하고 계시려나.”

출발 전 상황이 떠오른 듯 옷을 입던 로지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클로이가 완전 무장된 기사만 데려간다고 선포한 후 토벌대의 분위기는 굉장히 흉흉해졌다. 아르네 공작의 부재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이들이 병력까지 줄인다는 소리에 반감을 쉽게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중 가장 격렬한 반응을 내비친 건 정찰조를 자청했던 발칸 남작이었다.

‘역대 그 어떤 공작께서도 토벌대 인원을 즉석에서 감축하진 않으셨습니다.’

‘역대 그 어떤 가신도, 감히 아르네를 가르치듯 고함치진 못했지.’

남작은 클로이의 지적에 입을 다물긴 했으나, 사납게 치뜨인 시선은 그대로였다.

‘발칸 남작, 기사가 부족해서 불안하다면 내 몫의 기사를 내드리지.’

클로이는 제가 통솔하기로 한 기사를 선뜻 내주었다.

‘되었습니다!’

‘가주인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가신인 네 의견은 필요 없어. 그러니 닥치고 출발해.’

결국 클로이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떨어졌다. 백작은 남작과 두 부대의 기사가 모두 떠나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작이 멀어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괘씸하신가요?’

‘개인적으로는.’

‘그럼 공적으로는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발칸 남작은 훌륭한 지휘자지. 기사들의 태도와 그의 공적이 증명하지 않나.’

‘주인에게 반기를 드는 저런 태도가 말입니까?’

‘그의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니잖나? 남작은 그대보다 조금 더 강직할 뿐이지.’

백작은 그녀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친 백작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우호적인 것을 넘어서 로지나 에반보다 따스했다. 저게 뭘까, 라고 생각하던 차 백작이 입을 열어 그만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공녀님, 로지의 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괴수 토벌은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 기사를 내드릴테니-.’

‘거절하지. 백작. 이만 출발하게.’

그렇게 떠난 길이었다. 에반이 준 힉스와 막판 로지의 엄호 덕에 클로이는 제 몫의 괴수를 죄다 처리할 수 있었다. 클로이는 로지가 제 옷을 다시 걸친 것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뽀드득. 잠깐사이 무섭게 쌓인 눈이 종아리까지 쌓여 있었다. 푹푹 들어가는 발걸음을 옮기며 클로이는 저 멀리 아스라하게 보이는 집결 장소를 눈으로 훑었다. 하얀 공터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휴, 그 잘난 분들 아직이시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을 안 로지는 빈정거리며 웃었으나, 클로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저 자신이 빨랐던 걸까. 아니면……. 뽀드득. 옅은 불안을 깨부수듯 맑은 소리가 다시 한번 발아래서 울렸다. * * * 그 시각 아르네 공작저엔 비상이 걸렸다. 북부에서 소식을 물고 날아온 전서구 때문이었다.

“이미, 공작성에 도착했다고?”

공작은 생각지 못한 소식에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도는 클로이가 떠난 날 밤부터 눈이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눈구름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말은, 곧 북부에도 눈이 내릴 거라는 뜻이었다. 아르네의 의무를 생각한다면 호보였으나, 괴수 토벌 경험이 없는 클로이가 긴 여정에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나서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비보였다. 공작의 얼굴은 이내 수심이 가득해졌다. 그는 전서구가 물어온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에반, 엘리오를 불러오게.”

“각하.”

“불러와.”

공작의 말이라면 늘 목숨같이 따르는 에반이건만, 어쩐 일인지 에반은 좀처럼 걸음을 떼지 않았다.

“염려 마라, 에반. 네 걱정처럼 내가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제게 영광된 임무를 허락해주십시오.”

“그건 일단 엘리오를 불러오고 나서 이야기하자꾸나.”

공작이 마치 어린 아이 달래듯 좋은 목소리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약속까지 해준 게 아닌가. 더 버티는 건 무리였다. 에반은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오래지 않아 돌아온 에반은 엘리오와 함께였다. 짤막하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엘리오는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다.

“저를, 보내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날렵하게 빠진 그의 턱을 타고 땀이 뚝, 떨어졌다. 공작은 눈을 뜨자마자 강박적으로 몸을 되살리려는 제 아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가고 싶으냐?”

실로 악마같이 달콤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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