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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북부에 내리는 눈 (90/121)

90. 북부에 내리는 눈2021.07.13.

이베트 후작은 창밖을 통해, 한참 훈련 중인 신입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터진다.

“각하.”

“……한숨 정도는 쉴 수 있지 않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해는 됩니다만,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이베트 후작은 야무지게 말을 맺는 부관의 말에 고개를 잘게 털었다.

“10년 넘게 검을 잡은 기사들과 비교하면 눈에 차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들도 똑같이 십 년이 주어지면 본 기사단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훌륭한 기사가 될 겁니다.”

“맞아. 하지만 문제는 이거지. 레이얼에겐 시간이 없어. 당장. 당장 보내주어야만 해.”

“부족한 기사를 대신해, 용병단까지 수배했잖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이베트 후작은 부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버릇 같은 한숨만 다시 한번 내쉬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매둔 그대로 이베트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무사히 입궁했고?”

“예, 티 없이 잘 섞여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베트 후작은 후작가와 가신들,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중립 귀족가의 정예기사 일부를 레이얼에게 보내주었다. 최근, ‘레이디’덕에 수도의 귀족은 물론이고 황실에서도 계속해서 기사를 충원하던 중이라 이베트 후작의 지원은 티 없이 깔끔하게 묻힐 수 있었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다만 걱정은 내쉬 황자뿐만 아니라 황후궁에도 기사를 두둑이 모으고 있다는 건데,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다들 ‘황제’의 병에 정신이 팔려 모르는 걸까?

“황후궁에 추가된 기사가 이미 백을 넘었다고?”

“아닙니다. 백여 명이 보내졌는데, 그중 선발 된 건 사십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사십.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숫자다.

“추리고 추렸겠어.”

“그랬겠지요.”

“남은 건?”

“길롯 백작이 거두었다고 합니다.”

담담한 부관의 말에 이베트 후작은 찬물을 뒤집어서 쓴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그 뱀 같은 여자가 부릴 잔꾀다웠다. 황궁에 놀러 왔다던 ‘레이디’를 핑계로 삼아 황후가 제 사병을 늘리고, 남은 기사를 자연스럽게 길롯이 이어받는. 결국은 길롯의 무장세력을 한없이 늘릴 핑계, 혹은 그럴싸한 눈가림. 때마침 황제의 병환에 황궁의며 시종들까지 죄다 불러 조사를 하고 있다니 제정신일 사람이 몇 되랴. 이베트 후작은 언제나처럼 매끄럽게 판을 짜는 캐서린 황후의 계략에 진저리를 쳤다.

“수도가 아니라도 좋다. 최대한 빨리, 길드를 수배해.”

“예.”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그의 부관은 절대 반문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여 바쁘게 나서는 부관을 바라보는 이베트 후작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둑해져 있었다. 깜빡했다. 캐서린 길롯, 아니 캐서린 시오도르가 그 옛날부터 얼마나 매끄럽고 영악하게 사람들을 홀려 황성을 장악했는지를. 그 뱀 같은 여자가 결코 황제 간호에만 매달려 있을 리가 없는데,

“하.”

한번 당해봐 놓고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것은 명백히 그의 실책이었다.

  수도만큼이나 북부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빨리 왔다고 눈 부라리던 분 어디 가셨나.”

클로이는 사냥 신발에 설피를 한 겹 더 껴 신으며 로지에게 슬쩍 속삭였다. 밤사이 달려온 여독이 미처 풀리기도 전, 이른 새벽부터 말레사가 들이닥쳐 그들을 깨웠다.

“바람에 습기가 물렸대요.”

“……어어.”

곧 눈이 온다는 의미였다. 기를 쓰고 달려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는지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끈으로 야무지게 몇 번이고 설피를 동여맨 클로이가 바닥을 탁탁 구르며 걸음을 옮겼다. 타박, 타박. 설피가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길 한참 만에야 클로이는 공작성 문을 열고 나설 수 있었다. 묵직한 문을 온몸으로 밀어 열자, 폐부를 단숨에 알려버릴 것 같은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흡!”

들이켠 숨이 무겁다. 공기에 눅진하게 습기가 물렸다는 의미였다. 과연 말레사가 보챌 만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미리 나와 있던 말레사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늦었다고 시위하는 거야?”

새벽에 자기가 깨워 놓고선. 들리게 투덜댄 클로이가 말레사가 건넨 말 고삐를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올라탔다.

“그럼 이왕 하는 김에 조금 더해도 될까요?”

“좋아. 어디까지 하나 궁금하던 차였어.”

“말 궁둥이 차도 돼요?”

“이렇게?”

클로이는 말레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 앞에 있던 기사의 말 볼기를 손으로 짝, 두드려주었다. 북부는 말을 부릴 때 채찍을 쓰지 않는다. 추위에 언 살은 채찍질을 했다간 대번에 터지고 만다. 그래서 북부인들은 고삐로만 다루었는데, 급할 땐 더러 말 볼기를 뒷사람이 손으로 쳐주기도 했다. 바로 클로이처럼.

“으어어!”

“아가씨!”

“다들 출발!”

갑작스러운 출발에 말레사가 빽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클로이가 출발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왁자한 출발에 다들 키들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말레사 님의 잔소리를 이렇게 피하시다니! 역시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수도 가시더니 더 예뻐지셨네요.”

말을 몰아 스쳐 지나갈 때면 다들 어김없이 허물없는 한마디를 남겼다. 수도에선, 아니 다른 귀족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나 이곳 북부에선 일상이었다. 그들에게 클로이 아르네는, 아르네 공녀이기보다는 기사들과 사냥꾼들과 함께 어울려 북부를 보살피는 사랑스러운 분이었기에 클로이는 주인 이상, 동료 미만일 수 있었다.

“다들, 순순한 게 수상한걸?”

고삐를 바짝 쥔 클로이가 저를 지나치려는 기사들을 따라잡으며 말을 바짝 붙였다.

“말해봐, 덫. 제대로 안 해둔 거야?”

“……땅 파다가 손아귀가 세 번이나 찢어졌는데, 한번 보여드려요?”

“안쪽 장치는?”

“겨울에 나무 해보셨어요? 나무도 추위에 딱딱하게 굳고, 도끼는 도끼대로 얼어 있고 정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어요.”

요는 다 해두었단 말이었다. 클로이는 과장되게 훌쩍이는 기사를 보며 눈을 흘기던 것도 잠시, 해가 떴음에도 여전히 어둑한 하늘의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정말 제대로 한 거 맞아?”

“말레사님이 다 확인하셨어요.”

“오늘 밤에 바로 써도 돼?”

까딱거리는 클로이의 턱짓에 그녀의 곁에서 나란히 달리던 기사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꿀꺽.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바람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눈구름이 다가올 줄은 몰랐다. 아직은 색이 옅으나, 이 시기의 바람은 강하고, 질기게 분다. 그 말은 눈구름이 금세 두껍게 쌓일 거라는 뜻이었다. 안부를 전하려 몰려들었던 기사들이 조금 전 클로이의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어느새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죄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말발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어디선가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말을 얼마나 달렸을까. 민가가 끝나는 큰 길 어귀에 서 있는 한 무리의 기사들이 클로이의 시야에 잡혔다. 선두에 선 것은 그 언젠가 수도에서 클로이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던 니칸 백작이었다.

“오랜만이야. 백작.”

“언제 오셨습니까?”

“어젯밤.”

“생각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응. 올해는 눈구름이 일찍 생기기에, 출발을 서둘렀지.”

인사를 가장한 가벼운 대화와 함께 그들은 말머리를 나란히 두고 이동했다.

“발킨 남작은?”

“그는 산맥 쪽에 들어가 있습니다.”

“……저런, 고생이 많군.”

정찰을 말도 없이 갔다고? 괘씸하다고 생각할 법했으나 클로이는 지적하지 않았다. 매년 아르네 공작이 선두에 나서서 괴수들을 도륙하는 방식의 토벌만 보다가, 자신과 함께 애완토끼 잡듯 구덩이나 파니 근심할만했다. 여러 번 되짚어 보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클로이는 언짢아하는 대신, 가신들이 조심성 많고 기사를 아껴서라고 애써 이해해보려 했다.

“그래서, 확인은?”

“저희가 한 번, 말레사가 한 번. 그리고 공녀님이 오늘 둘러보시면 총 세 번입니다.”

“덫을 표시한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그는 클로이가 지도를 요구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한 듯 주저 없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야기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산맥 초입에 다다라 있었다. 만년설로 뒤 덮힌 산맥 정상을 빼곤 아직 사방은 초겨울에 묶여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설치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각 위치에 위장 가림막을 설치하던 중이었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눈?”

그녀의 말에 기사들 사이로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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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림막 작업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진눈깨비나, 본격적으로 눈이 오기 전 가볍게 날리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로 기다렸건만, 애태우는 사람들의 얼굴로 떨어지는 눈송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덩치가 불어나고 있었다. 설탕 알갱이같이 희미하던 것들이, 굵은 소금만 해지고 완두콩만 하게 불어나 버렸다. 차마 곧 그칠 거라는 말도 할 수 없게 하늘은 어두워졌고, 발밑으로는 하얀 카펫을 깔아둔 듯 눈이 엷게 쌓였다.

“……남작을 불러.”

클로이는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뒤에 있던 로지가 품에서 새를 꺼내 뭔가를 써서 매달아 날렸다. 새는 빠르게 멀어졌다.

“오늘 움직이실 겁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장이 덜된 기사는 빠져라.”

“덫을 사용하실 거잖습니까?”

말을 돌린 클로이가 기사들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대꾸했다.

“괴수가 얌전히 덫에 들어간다는 보장은?”

말고삐를 틀어쥔 클로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에워싼 기사들 모두에게 시선을 맞대어주었다.

“무장이 덜된 기사는 빠진다.”

“무장하고 돌아와도 됩니까?”

그녀의 말에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아니, 안 돼.”

고민하는 기색은 없었다. 클로이의 산뜻한 거절에 질문한 기사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오늘은 확인만 한다고 해서 무장을 완벽히 챙기지 못했습니다. 이건, 개인의 결격 사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토벌에 목매는 기사를 바라보던 클로이는 입꼬리를 비틀어 사납게 웃었다.

“대대로 편성해 움직여도 사상자가 나오는 판에, 무장하고 돌아와 따로 합류한다고? 경이 아르네 공작만큼이나 무위가 출중하고, 아르네 소 공작만큼이나 체력이 좋은가?”

그녀의 말에 기사의 입이 꾹 다물렸다.

“무장이 안 된 이들은 예외 없이 모두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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