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안녕, 전하2021.07.02.
클로이는 그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
“위중하신 거야?”
“그렇다는군.”
“길롯이 이 일을 곱게 넘길 리도,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지도 않을 텐데?”
“맞아.”
그의 목소리가 고막이 아니라 그대로 가슴에 고이는 것 같다. 클로이는 레이얼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헐떡였다. 온몸이 바스러져 부서질 것 같으나, 오히려 더더더 깊게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믿고 가도 돼?”
“믿고 보내도 돼?”
질문을 고스란히 질문으로 돌리는 그의 말에 클로이는 헐떡이던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 자신이나 궁지에 몰린 건 똑같았다. 그리고 그건 레이얼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까 지금은 미래를 기약할 희망이면 충분했다.
“전하,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올게.”
“나 역시. 그대에게 건넬 고귀한 자리를 마련해 놓도록 하지.”
이별의 말이 자못 강경했다. 그러나 클로이는 이 편이 훨씬 좋았다. 로지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4년 전, 울어서 되는 거였다면 저는 매일 울었을 거예요.’
운다고 괴로워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일은 끝난다.
“잘 있어. 전하.”
“클로이.”
“응?”
“새를 보낼게.”
“그렇게 해. 답장은 내 손으로 가져다줄게.”
전서구에게 답장을 매달 필요도 없이 금세 오겠다는 대답에, 긴장으로 굳었던 레이얼의 얼굴이 봄볕처럼 화사해졌다.
“아아……. 정말 사랑스럽다니까.”
“……!”
무의식중에 나온 혼잣말이 너무 감미롭고 보드라워 클로이는 잠깐 숨이 막혔다.
“붙잡고 싶어.”
어느새 그의 혼잣말은 그보다 또렷해진 속삭임이 되어 있었다. 레이얼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클로이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 손아귀에 딱 들어오는 작은 머리. 그러나 그 작은 머릿속에서 나오는 건 어찌나 거대하고 재기발랄한지. 언제나 짐작도 가지 않았다. 레이얼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클로이의 이마에 맞대었다.
“놓고 싶지 않아.”
“알아.”
그의 두 손을 가지런히 잡은 하얀 손은 생김과 달리 단단하고 거친 편이었다. 뼈대가 굵은 그의 손목을 한 번에 움켜쥐지는 못하지만, 함부로 떨칠 수 없을 만큼 힘은 세다.
“놓으라고 한 적 없어.”
“내가 힘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쉽게 얻는 건 아르네와 어울리지 않아.
레이얼이 하는 말이 자책임을 아는 클로이는 산뜻하게 웃어주었다.
“내가 나고 자란 북부는, 아르네는 그런 곳이거든.”
“…….”
“그래서 레이얼 시오도르, 당신이 적임자라는 뜻이야. 쉽지 않아서 내 몫인 게 너무 분명하잖아.”
사르르 눈을 감으며 하는 말에 레이얼이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클로이의 초대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맞대고 있던 이마를 미끄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맞물렸다. 보드라운 살점이 빈틈없이 꽉. 벌어진 잇새로 한숨이 새어나갈 수도 없이 완벽한 밀착이었다. 클로이의 머리를 감싸 쥔 커다란 손이 머리칼 속으로 자연스럽게 파고 들어 슬쩍 움켜쥐는가 싶더니 슬쩍 비틀었다. 이미 바짝 붙은 두 입술이 한층 더 깊게 맞물리며 드디어 뜨거운 숨이 섞였다. 가지 마. 전하지 못한 진심이 질척한 소리에 뒤엉켜 그대로 목 뒤로 넘어가 버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지. 그림자에 숨어 교대 기사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클로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일이 심각했다. 레이얼에게는 여상하게 굴었으나,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황좌를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레이얼을 끌어내리려 혈안이 되어 있던 길롯에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그전에도 길롯은 악랄했으나, 적어도 이목은 조심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겐 그런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이젠 정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중 클로이가 걱정하는 건 최악의 수였다.
‘찬탈’
다급해지면 길롯은 그러고도 남으리라. 빨리 다녀오려고 마음은 먹고 있었으나, 정말로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계조의 병사가 지나가자마자 클로이는 힘껏 땅을 굴러 몸을 솟구쳤다. 마지막 황궁 담이었다. 클로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빨리 돌아오기 위해 더 빨리 떠나야 할 때였다. * * *
“최대한 빨리 가자는 소리가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 로지.”
빨리빨리를 외쳤던 클로이는 살인적인 일정에 앓는 소리를 터트렸다. 해가 지는 것을 신호로 수도를 빠져나온 클로이와 로지는 단 한숨도 쉬지 않고 내도록 달렸다. 벌써 달이 떴다. 못해도 네 시간 이상은 달린 터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말의 몸에선 뜨끈한 훈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러다 말이 죽겠어!”
“아가씨가 힘든 게 아니고요?”
사람들의 이목이 사라지자 로지는 클로이를 다시 아가씨라고 불러주었다.
“진짜 말이 죽어. 진짜 진짜로.”
“북부의 말은 꼬박 하루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잊은 건 아니시겠죠.”
“수도에 와서 얌전히 마구간에만 있던 얘들 사정도 좀 봐줘!”
다그닥거리는 소리 사이로 삐죽거리는 클로이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럼, 저녁 먹고.”
“오늘은 그만하자.”
로지의 뒷말을 뚝 잘라먹은 클로이가 고삐를 부드럽게 감아 당겼다. 내내 달리던 말이었다. 갑자기 멈추면 오히려 몇 시간을 내내 혹사당한 근육에 무리가 간다. 말은 클로이의 손짓에 천천히 속도를 떨구었다.
“오늘은 이만하자고. 하루만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첫날이니까.”
“내일부턴 꾀부리지 마세요.”
“아무렴.”
전력으로 달리는 말을 모느라 덩달아 상체를 숙여 기수 자세를 취했던 클로이가 천천히 허리를 곧게 세웠다.
“북부에서 준비는 어떻대?”
“이미 밑 작업은 완료래요.”
어느새 말들은 빠르게 걷는 수준까지 속도를 떨어뜨렸고 그들은 길을 벗어나 산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 안전하게 쉴 자리를 찾아야 했다.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는 가운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태평하게 울렸다.
“함정 설치도?”
“예. 다들 돌아간 게 언젠데요. 가서 확인해주시면 금세 가림막 설치도 할 건가 봐요.”
“핑계 대고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착실한 걸?”
“아르네가의 명령이잖아요. 누가 공작 대리의 말을 어길 수 있겠어요?”
“흐응.”
그날 가신들을 야무지게 말로 두드려 패 내쫓긴 했지만, 작은 잡음이 아예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클로이는 너무 순조로운 이 상황이 살짝 의심스러웠다.
“다행이네.”
“그러니까, 빨리 가요.”
재촉하는 로지의 눈이 등 뒤의 수도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수도 상공을 가득 메운 짙은 먹구름에. 바람이 바뀌기 시작했으니, 곧 매서운 겨울 바람을 타고 북부로 저 구름이 밀려 올라가리라. 촘촘하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수도의 모습은 거대한 솜뭉치에 짓눌린 것 같은 형상이었다. 몰려든 구름에 짙게 물린 습기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저 무거운 것을 죄다 흘리지 않고 북부까지 기어이 물고 오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클로이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구름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
“절대 늦지 않을 거니까 조바심 내지 마 로지. 우리는 제시간에 도착할 거야.”
“……네.”
“탈진해서 도착해봐야 짐이 돼. 적당히 서두르자.”
“육포?”
느릿하게 걷는 말 고삐를 감아쥔 로지가 대충 쉴 자리를 찾은 듯 저녁을 물었다.
“좋아.”
불을 피우지 못하는 이들에게 육포는 최고의 식사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작은 개울이 있는 한적한 곳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안장을 벗겨낸 말들은 묶지 않고 풀어두었다. 북부의 말은 주인을 개처럼 따른다. 나는 순간 주인이 정해져 평생을 한 몸처럼 움직이는 사이였다. 묶을 이유가 없었다. 클로이는 아직도 뜨끈한 말의 몸통을 손으로 슬슬 쓸어주었다.
“고생했어. 며칠 더 부탁하자. 가서 물 마셔.”
툭툭, 목덜미를 두드려주는 것으로 인사가 끝났다. 말은 알아서 목을 축이고 저녁을 챙길 것이다. 혹시라도 적당한 저녁거리를 찾지 못하면 달려올 테니 그땐 챙겨온 건량을 먹이면 된다.
“얼른 와서 드세요.”
불을 피울 수 없으니, 몸이 식기 전에 빨리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래.”
클로이는 사이좋게 멀어지는 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로지와 육포를 나눠 먹고 개울물에서 대충 씻고, 낙엽을 끌어모아 잠자리를 준비하는 건 금방이었다.
“잘자.”
“아가씨도요.”
짧은 인사와 함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북한 낙엽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푹신하게 깔린 낙엽 자리는 금세 클로이의 온기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말을 타서인지 허벅지 안쪽이며 허리가 욱신욱신하니 아프고 잔뜩 피곤했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클로이는 낙엽 자리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한번 눈을 떴다 감을 때마다, 망막에 이곳엔 없는 것들이 맺혔다. 깜빡. 엘리오가 보이고. 깜빡. 레이얼이 보인다. 그리고 또 깜빡. 마지못해 그녀를 보내던 아르네 공작이 보인다. 제 처지도 엉망이긴 했으나, 두고 왔다는 자각이 강렬해서일까. 마음이 영 편치 못하다.
“잠이 오지 않으세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로지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응…… 뭐.”
“이대로 돌아가셔도 돼요.”
“아니.”
마치 클로이가 어째서 이러는지 훤히 안다는 말투였다.
“난 아르네야.”
클로이는 슬그머니 등 떠밀어주는 로지의 말을 단박에 잘라버렸다.
“알아요. 하지만 토벌에 한 번 빠진다고 해서 그 긍지가 꺾이는 건 아니에요.”
“양해된다는 거 알아. 사정이 이러니까.”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빠지지 않을 거야. 아버진 어머니를 잃은 해에도 토벌에 나가셨는걸.”
난, 아직 아무도 잃지 않았어.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뒷말은 굳이 소리 내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로지는 알 테니까.
“그리고 내가 북부에 있다는 확인이 좀 필요하기도 하고.”
“……예?”
“황궁 분위기가 안 좋아. 후계싸움이 본격화됐지. 이 시기에 내가 함께 있으면 조금 더 심한 경계를 받을 거야.”
레이얼이.
“아아…….”
아르네와 시오도르의 조합은 위협적이지. 그러니까, 경계를 조금 덜 수 있도록 내가 북부에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해.
“좋은 생각이에요. 어차피 위험할 거라면 차라리 북부에 계시는 편이 좀 낫겠네요. 그런데요 아가씨. 그럴 거면 뭐하러 비밀리에 나온 거죠?”
“……못 가게 붙잡을 테니까?”
내쉬가.
“아아…… 하긴 불안하시겠죠.”
로지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말을 오해했지만, 클로이는 정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토벌이 끝난 후 곧장 수도로 향할 거야.”
“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몰래.”
“…….”
“조금만 더 일찍.”
클로이의 말에 로지가 퍽, 건조해진 낯으로 물었다.
“왜요?”
“……그야 당연히 황태자 전하를-.”
“아가씨.”
채 말을 맺기도 전 로지는 클로이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방금 그건 못 들은 거로 할게요.”
“로지.”
“전, 아르네 가신이며, 아가씨의 전속 시녀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아가씨를 아끼는 사람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로지의 말이 엄숙하게 울린다.
“황궁에 가시겠다면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