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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 이렇게 갑자기 (86/121)

086. 이렇게 갑자기2021.06.29.

  단둘뿐인 출발은 단출했다. 누구의 눈이 이곳을 향해 있는지 알기에 클로이는 공작저 사용인들의 배웅조차 거절했다. 사용인들은 클로이의 명령을 몹시 불만스러워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는 말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예?”

“이거, 가시는 길에 입이 심심하시면 씹으세요.”

“손이 시리시면 요것 하나 더 끼세요. 크게 떴어요.”

그러나 언제고 ‘클로이 아르네’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배웅은 하지 못해도 틈틈이 준비해둔 선물을 건네줄 수 있었다. 북부산 가죽으로 만든 장갑과 육포 그리고 솜을 두둑하게 넣어 지은 겨울 담요가 하나 둘 클로이에게 쥐어졌다. 전력으로 달려야 하기에 분명 짐이었다. 하지만 클로이는 사용인들이 건네는 선물을 마다치 않고 착실하게 걸치고 신고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제 들어가 봐.”

“아직 본관 안인데요.”

“……이제 가서 일하라는 뜻이야. 사악한 주인이 가열차게 일을 부리는 게 느껴지지 않아?”

“좋아요. 사악한 주인님. 저희는 돌아오실 때까지 타운 하우스를 반짝반짝 빛이 나게 쓸고 닦을 테니, 곧 돌아와 두 눈 부릅뜨고 검사하세요.”

“그래.”

“꼭이요.”

“알았어. 방심하지마. 내가 에반의 모노클도 빌려서 구석구석 뒤져볼 거거든.”

“고대하겠습니다.”

시답지 않은 으름장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정말로 본채 현관이 코앞이었다. 누구의 시선이 어디에 심겨 있을지 알 수 없기에, 함께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들어가.”

클로이의 말에 누군가 투정인 듯 염려같은 당부를 전했다.

“많이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어허. 이거 보게? 주인을 이렇게나 재촉하는 시녀들이라니?”

“그러게, 평소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아쉬운 이별을 내내 말없이 지켜봐 주던 에반이 울먹이는 시녀를 다독여 돌려보내고 다가왔다. 이거 보세요. 라며 혀를 찬 에반이 헐겁게 매인 로브 끈을 풀어 꽉 묶어주었다. 옭매듭으로 단단하게. 클로이가 일부러 풀지 않는 이상, 절대로 두 번 다시 풀리지 않을 매듭이었다.

“이건, 에반 선물?”

아르네가에 속한 모든 이들 중 클로이의 차출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그중 가장 근심하는 건 에반이었다. 핵심 전력인 공작과 소공작의 부재로 부족해, 그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에반까지 죄다 빠졌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토벌에 나선다고는 하나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리라는 건 쉽게 짐작가능했다. 그는 임무와 죄책감이라는 양쪽 짐에 눌려 있었다.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 꺼낸 농담에 에반은 코웃음을 쳤다.

“설마, 제 것이 이렇게 하찮으려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찰랑. 유리병을 채운 보랏빛 액체가 에반의 움직임에 작게 흔들렸다. 쉬지 않고 피어오르는 공기 방울과 점성으로 보았을 때, 저건.

“나, 힉스는 처음 봐 에반.”

“쉽게 돌아다니면 큰일이죠.”

힉스에 비하면 일루미넴은 애들 장난이랄까. 괴수들도 힉스에 스치면 제 아무리 덩치 큰 놈이라고 해도 순식간에 숨이 끊어졌다. 그렇기에 쓰는 쪽의 위험도 만만치 않았으나 살상력만은 남달랐기에 숙련된 자가 쓴다면 이만한 병기가 없다.

“……화살촉에 바르세요.”

“이걸?”

“이걸 쓰실 땐 반드시 장갑은 두 겹 이상 껴야 합니다.”

클로이는 덤덤한 얼굴을 한 에반의 모습에 숨을 골랐다. 괴수조차도 단번에 해치우는 힉스. 그것을 역대 아르네 공작들이 쓰지 않은 것은……. 아니, 쓰지 못한 것은 살상력이 남다른 만큼 가격 역시 위명에 걸맞게 사악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저 작은 병을 채우려면 적어도 저택 하나 값이다. 그런데 이거로는 기껏해야 화살통 두 개나 바를 수 있을까? 그러니 말하자면 에반이 건네는 힉스는 ‘비상시’일 것이다. 위기의 순간 클로이를 위한 마지막 보루. 아마 그의 전 재산을 다 털지 않았을까.

“무리하지 마세요.”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극독을, 구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힉스라니. 이거 뭐. 무리할 것도 없겠는데?”

“조심하세요.”

“걱정 마. 나, 이제 진짜로 갈게. 들어가 에반.”

“정말, 조심하세요.”

“걱정 말래두. 어쩌면 힉스는 뚜껑 한 번 열어보지 못할지도 몰라. 내 계획도 엄청나게 근사하니까.”

“네.”

“간다.”

아마 에반이 힉스의 값으로 원한 건 바로 제 웃음이었을 테니까.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어주고 클로이는 문을 활짝 열었다.

“가자, 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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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로 오가는 정기 마차 편에 몸을 숨겨 공작저를 빠져나온 클로이와 로지는 오래지 않아 마차에서 빠져나와 뒷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택한 것은 수도 외곽을 빙 돌아 나가는 작은 길. 만에 하나, 공작저를 빠져나온 클로이와 로지의 행적을 누가 눈치채고 마차를 습격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다각, 다각. 차디찬 돌길을 두드리는 편자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던 가운데, 문득 로지가 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떨어뜨렸다.

“그……인사 안 하셨죠?”

“응?”

“이대로 가요?”

밖에 나와 아가씨니, 클로이니 하는 소리를 하는 멍청이 짓은 하지 않는 게 정말 로지답다. 하지만, 이런 말은 정말 그녀답지 않다.

“그럼?”

“인사하고 가요. 어차피 밤에 움직일 거잖아요. 시간도 있는데.”

로지의 말에 고삐를 쥔 클로이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안 그래도 레이얼에게 인사도 못 하고 떠나게 되어 뒷머리가 당기던 참이었다.

“가도 돼?”

“안 될 건 뭐예요? 전 이 근처에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그 순간 클로이가 달리던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왔다. 훤한 대낮 레이얼을 찾아 달리는 클로이의 움직임엔 거침없었다. * * *

“분위기가 왜 이래?”

당연히 밤보다야 낮에 잠입하는 건 수배로 어렵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극악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클로이는 거의 쉬지 않고 순찰을 하는 경계병에게서 재빨리 몸을 숨기며 숨을 골랐다. 이건 거의 준 전시 상황의 느낌이었다. 경계병은 하나같이 완전 무장 상태였고, 황실의 분위기도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게 살벌했다. 오가는 시녀들은 거의 바닥에 시선을 붙인 채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 참. 늙은 시오도르가 아프댔지.’

쌤통이다, 영감. 입술을 삐죽인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황제가 앓아누웠다. 당연히 분위기가 살벌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아무 일 없을 때도 스무 겹의 호위를 두르고 살았잖나.

“흥. 웃겨 진짜.”

잠깐 사이 경계병이 두 번째로 지나간다.

“정말 제 몸 하나는 끔찍하게 여긴다니까.”

코웃음을 친 클로이가 경계병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숨어있던 기둥 뒤에서 나와 그대로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순식간에 테라스에 올라 조용히 숨을 고르며 방 안을 탐색했다.

“이런…….”

텅 빈 침실을 확인한 클로이는 작게 탄식했다. 항상 그를 만나러 왔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래서 클로이는 낮에 그가 ‘집무실’에 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살짝 허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클로이는 맥 놓고 돌아가는 대신 돌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보고 가지 못해 아쉽지만, 대신 흔적은 남길 참이었다. 침대 옆 탁자엔 언제나처럼 서류가 가득했다. 막 빈 종이를 찾아내 ‘레이얼’이라고 겨우 이름 석 자를 쓰던 차, 희미한 인기척이 잡혔다. 클로이는 그길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 죽였다. 빌어먹게도 이 방은 숨을 곳이 전혀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침실에 들어 온 자는 젊은 남자였다.

“밤에 보시던 서류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안다고.”

레이얼의 보좌관인 듯, 툴툴거리면서도 헤매지 않고 탁자로 다가가 서류를 챙겨 드는 품새가 아주 능숙했다.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클로이는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삼십 분이 넘게 기다렸다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뭔가 잊고 갔어도 진작에 왔다 갔을 시간이었다.

“하……. 이것 참.”

위기를 넘겨 다행이지만, 종이를 죄다 걷어 갔으니 작별 인사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분위기도 살벌하던데, 아무래도 새를 날려야 할 모양이었다.

“쯧.”

작게 혀를 찬 그녀가 창문에 손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너무 빨라 이번엔 침대 밑에 기어들어 가는 건 무리다! 클로이는 그대로 문으로 달렸다. 열린 문짝 뒤에나마 숨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을 때 클로이는 반가운 목소리를 터트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인 건 레이얼이었으니까.

“전하!”

“겁도 없이! 내가 메모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레이얼은 단박에 인상을 구기며 낮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클로이는 저를 힐난하는 듯한 레이얼을 보고도 서운하지 않았다.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하던 황실 분위기를 보지 않았던가.

“잘못하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거 봐. 걱정이라고. 클로이는 새파랗게 안색이 질린 레이얼을 향해 생긋 웃었다.

“이미 온 걸. 그래서 안아주지도 않을 셈이야?”

하. 짙은 한숨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클로이는 그의 품에 갇혔다. 쿵쿵쿵.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들리는 심박이 무겁고 가팔랐다. 잔뜩 놀란 것 같은 소리. 클로이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인사는 하고 가고 싶었어.”

“……간다고?”

“북부에 잠시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어.”

“이렇게 갑자기!”

몸을 비트는 레이얼을 클로이는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이 영리한 남자는 이 시기에 자리보전한 아르네의 두 남자를 두고 굳이 클로이가 북부로 가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클로이!”

그녀를 부르는 레이얼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하지만 클로이는 제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 절대로 그를 안은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 애원하는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꽤 강력해서 보면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 아니, 북부에 가서도 내내 떠오를 테지. 그건 곤란해. 클로이는 고막을 절절하게 울리는 레이얼의 목소리를 애써 흘려 버리며 입을 열었다.

“레이얼 시오도르. 난 그대를 위해서 힘을 냈지. 그러니 이제 아르네를 위해 힘을 내야 하는 내게, 응원을 덧붙여줘.”

“하나, 클로이! 공작도 없는 북부의 일을 어떻게 하려고.”

레이얼이 진심으로 힘을 쓴다며 제 가슴에 고집스럽게 얼굴을 파묻고 버티는 클로이쯤이야 쉽게 떼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필사적으로 파고드는 그녀가 어째서 그러는지는 안다는 듯, 그저 눅눅해진 목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다녀올게. 금방 올 수 있어.”

“…….”

“길롯에게 지고 싶지 않아.”

길롯의 덫에 빠져 중태에 빠진 아르네 공작의 이야기에 남자의 숨이 잠깐이었지만, 멎었다. 어깨를 붙들던 그의 손이 쓱, 미끄러지더니 그대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흐읍!”

레이얼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강한 힘으로 안아주었다. 가슴속에 배인 연약한 감정들이 남김없이 쥐어짜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을 헐떡이는 사이로 레이얼이 속삭였다.

“지지 마. 나도 지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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